로열 앨버트 홀, 버킹엄 궁전, 빅벤

조용히 흐르는 템즈강

by 원성진 화가

공원을 빠져나와 길을 건너자,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거대한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로열 앨버트 홀이었다.

둥글게 솟은 돔 지붕은 흐린 겨울 하늘을 받치듯 고요히 서 있었고, 붉은 벽돌의 표면에는 오랜 시간의 색이 고스란히 스며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벽돌 사이사이에 남은 미세한 마모와 균열이 보였다. 수많은 계절이 지나간 자리였다. 건물 앞에는 이미 긴 줄이 만들어져 있었다. 두꺼운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손을 비비며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이곳에서는 누군가 악기를 들고 무대에 오를 것이다.

음악은 이상한 예술이다. 그것은 형태를 남기지 않는다. 연주가 끝나면 소리는 공기 속으로 풀려나가 사라진다. 그러나 인간은 그 사라지는 순간을 반복하며 기억을 만든다. 어쩌면 음악이 오래 남는 까닭은 바로 그 덧없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일수록 마음은 더 오래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그 풍경을 바라본 뒤, 차에 올라 다시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버킹엄 궁전이었다.

궁전에 가까워질수록 도로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넓은 광장이 펼쳐지고, 그 중심에 위엄 있는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버킹엄 궁전이었다.

궁전 앞 광장은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정문 위에서는 왕실 깃발이 겨울바람에 천천히 펄럭이고 있었다. 철문 앞에 선 근위병들은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관광객들의 카메라 셔터 소리와 웅성거림이 그들 주위를 맴돌았지만,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역사가 그렇듯, 권력 또한 언제나 장면을 만든다. 왕관과 군복, 궁전과 행진은 모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상징들이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만 권력을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권력의 본질은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권력은 스스로를 장면으로 드러낸다. 이미지가 권력의 언어가 되는 것이다.

차는 다시 움직였다.

도심의 길을 따라 달려 웨스트민스터 사원 앞에 도착했다.

고딕 양식의 첨탑이 흐린 하늘을 향해 길게 솟아 있었다. 건물 전체가 회색 돌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가까이에서 보면 그 표면에는 세월이 만든 미세한 얼룩들이 층처럼 쌓여 있었다. 문 앞에 서자 묘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수백 년 동안 왕들의 대관식이 이곳에서 열렸다. 수많은 왕과 여왕이 이 문을 지나 왕관을 머리에 올렸다.

그러나 시간은 누구에게도 머물지 않는다. 사람은 죽고, 왕도 죽는다. 제국 또한 언젠가는 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은 남는다. 인간이 만들어낸 의식은 시간을 건너며 반복된다. 반복되는 의식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역사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아마 전통이라는 것은 바로 그 반복의 감각일 것이다.

멀리서 종소리가 울렸다. 낮고 깊은 소리가 겨울 공기 속으로 퍼졌다.

조금 더 걸음을 옮기자, 런던의 상징적인 시계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빅벤이었다.

시계판은 흐린 햇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교한 장식이 둘러싼 시계의 바늘은 묵묵히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옆으로 템즈강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강물은 잔잔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도시는 늘 변한다. 왕이 바뀌고, 건물이 세워지고, 전쟁이 지나가고, 사람들이 떠나간다. 그러나 강은 여전히 같은 방향으로 흐른다. 수많은 역사와 사건들이 강 위를 스쳐 지나갔다.

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듯한 침묵으로, 오래된 도시 곁을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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