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내륙을 종단하며

칼레

by 원성진 화가


터널이 끝나갈 즈음, 나는 다시 눈을 떴다. 감겨 있던 의식이 천천히 떠오르듯 열리고, 차창 밖으로 희미한 빛들이 점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칼레의 새벽이었다.


런던을 떠난 지 몇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나는 이미 다른 세계의 표면 위에 내려와 있었다. 경계는 분명 존재했지만, 그것을 통과하는 감각은 너무도 매끄러워, 마치 공간이 스스로를 접어 다른 장소를 펼쳐 보인 것만 같았다.


APPLE GREEN. 이동의 색.
그 빛은 형태를 움직이며, 흐르고, 스며들고, 순간마다 다른 결을 만든다. 나는 그 진동 속에서 미세하게 분해되었다가, 다시 조립되는 기분이었다. 어제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닮아 있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차를 몰아 기차에서 내려오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더 투명하고, 더 가볍고, 어딘가 덜 익은 냄새를 품고 있었다. 그 공기는 폐를 스치며 천천히 몸 안으로 번졌고, 나는 그제야 새로운 땅에 도착했음을 실감했다.


다시 시작이었다.


새로운 대륙, 새로운 길, 그리고 아직 쓰이지 않은 이야기.
나는 크리스마스의 밤을 지나, 또 하나의 세계로 발을 디뎠다.


여정은 계속된다.
새벽의 여우처럼, 낯선 길 위를 소리 없이 탐색하며.


이상하게도, 근거 없는 확신이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섬이라는 한정된 감각에서 벗어나, 대륙이라는 확장된 구조 위에 올라섰다는 사실. 그 넓이만큼, 나 역시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만약 이 길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함정이 있다면, 피하기보다는 기꺼이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었다. 그 또한 하나의 경로일 테니까.


칼레의 도로 위로 다시 올라섰다.
고속도로를 따라 달리는 동안, 창밖의 풍경은 처음 도착했던 밤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둠이 걷히자, 이곳은 점차 시골과 도시의 경계로 자신을 드러냈다.


차가운 공기가 살갗을 스치듯 스며드는 가운데, 풍경은 묘하게 깊은 고요를 품고 있었다. 드넓은 평야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처럼 시야를 가득 채웠고, 그 위에 드문드문 놓인 나무들과 소박한 농가들은 마치 누군가 신중하게 찍어둔 점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대륙의 도로는 거대한 회로를 닮아 있었다.
그 위를 달리는 인간은 신호였고, 데이터였으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흐름의 일부였다. 세계는 서로를 호출하고 연결하는 네트워크로 작동하고 있었다.


멀리 교회의 첨탑이 솟아 있었다. 그 선은 하늘을 향해 조용히 뻗어 있었고, 풍경 전체에 오래된 시간을 덧입히고 있었다. 그 고요함 속에서, 나는 다시금 유럽 대륙이 가진 고유한 깊이를 느꼈다.


도로는 긴 호흡으로 이어졌다.
차선은 넓었고, 흐름은 느긋했다. 간간이 스쳐 지나가는 차량들만이 이 공간이 여전히 현재에 속해 있음을 상기시켰다.


한적한 휴게소에 들를 때마다, 나는 뜨거운 에스프레소 한 잔과 바삭한 크루아상으로 몸을 덥혔다. 커피 향과 버터향이 입안에 퍼졌고, 피로는 잠시 뒤로 밀려났다. 졸음을 떨치기 위해 에너지 드링크를 들이키기도 했고, 때로는 설탕을 듬뿍 넣은 커피로 억지로 감각을 끌어올렸다.


이른 아침의 고속도로는 이상한 시간대에 놓여 있었다. 밤을 건너온 차량들이 여전히 달리고 있었고,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멈추지 않는 흐름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풍경은 점차 반복으로 변해갔다.
이국적이던 장면들은 서서히 익숙한 패턴으로 수렴했고, 끝없이 이어지는 도로는 마치 동일한 장면을 복제해 나가는 장치처럼 느껴졌다.


핸들을 쥔 손은 점점 굳어갔고, 몸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감각은 둔해지고, 시간은 늘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마음속 어딘가에서 다시 작은 불빛이 켜졌다.


이 길의 끝에는 로마가 있다.


내일도, 그다음 날도 계속 달려야 하겠지만, 그 끝에는 분명 어떤 장면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눈 덮인 알프스의 압도적인 능선, 지중해 위로 흩어지는 빛의 파편들, 그리고 시간조차 굳어버린 듯한 도시.


프랑스 교외의 고속도로 풍경은 겨울 그 자체였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들판, 색색의 지붕 아래 고요히 잠든 마을들. 모든 것은 조용했고, 그 조용함은 결코 비어 있지 않았다.


회색 구름이 하늘을 가득 덮고 있었지만, 그 아래의 풍경은 오히려 더 선명하게 살아 있었다.


나는 속도를 유지한 채, 이 광활한 흐름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렇게 프랑스의 중심부를 향해 나아가며, 나는 겨울이라는 계절 속으로, 그리고 유럽이라는 오래된 시간 속으로 조금씩 더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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