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두칠성
결국 도망치듯 짐을 챙겼다.
새벽 3시.
정말 불편하고 싫다! 최악이다.
종일 운전해왔는데....
샹베리의 지저분한 숙소에서, 밤새 한숨도 못잤다. 서~늘한 적막이 방 안을 메우고 있었고,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발소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마찰음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게 했다. 오래된 배관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에는 쇠 냄새 ( 피 냄새)가 섞여 있는 듯했고, 눅눅한 벽지에서는 곰팡이와 먼지가 뒤엉킨 냄새가 천천히 배어 나왔다. 침대 시트는 축축하게 식어 있었고, 바닥은 맨발을 디딜 때마다 오래된 먼지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곳은 몸과 마음을 조금씩 갉아먹는 폐쇄된 감옥 같았다.
그런 감옥의 문을 나서는 순간.
한겨울의 공기가 얼굴을 세게 후려쳤다. 예고 없이 날아든 비수처럼 날카로운 한기가 목덜미를 파고들었고,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 안쪽까지 얼어붙는 듯했다. 그래도 그 차가운 공기는 방 안의 탁한 공기보다 훨씬 견딜 만했다. 추위는 몸을 괴롭혔지만, 불결함과 불안이 가득한 공간에서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딘가 안도감이 밀려왔다.
알프스를 넘는 길은 숨이 막힐 만큼 고요했다. 모든 것이 얼어붙어 굳어버린 듯한 적막 속에서, 새벽의 어둠은 눈 덮인 산맥을 완전히 삼킨 뒤였다. 밤하늘은 아주 가까이 내려앉아 있었고, 별들도 얼어붙어 또렷했다. 나는 핸들을 꽉 쥔 채 천천히 산길을 올랐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도로 옆으로는 검은 낭떠러지가 끝없이 이어졌고, 헤드라이트 불빛은 눈 쌓인 도로 가장자리를 희미하게 비추며 앞으로 나아갔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공기는 점점 더 얇고 차가워졌다. 차 안의 히터는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손끝은 여전히 얼어붙은 듯 저렸다. 피로가 눈꺼풀을 무겁게 눌렀고, 어깨와 목덜미는 오래 긴장한 탓에 돌처럼 굳어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산 위로 올라갈수록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졌다. 인간은 육체가 가장 지쳐갈 때 오히려 감각이 날카로워진다. 피로는 몸을 무디게 만들지만, 동시에 존재를 가장 본질적인 상태로 끌어내린다. 불필요한 생각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숨 쉬는 일과 살아 있다는 감각뿐이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설경은 장엄하면서도 위태로운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달빛을 머금은 산봉우리들은 푸른빛과 은빛 사이를 오가며 서 있었고, 눈 위에 드리운 그림자는 칠흑처럼 짙었다. 나무들은 모두 얼어붙은 검은 형상처럼 서 있었고, 바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 웅장한 침묵은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존재가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요는 언제나 인간의 사유를 드러내는 거울이다. 구조가 사라지고 언어가 멈춘 자리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을 자각한다. 어둠은 존재가 스스로를 다시 감각하게 만드는 검은 빛이다.
길가에 차를 세웠다.
시동을 끄는 순간, 세상이 한순간에 멈춰 섰다. 엔진 소리가 사라지자 남은 것은 완전한 정적뿐이었다.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내리자, 찬 공기가 옷깃 안으로 밀려들며 피부를 스쳤다. 밤의 한기는 뼛속까지 서서히 스며들었다. 바닥에는 얇게 얼어붙은 눈이 밟힐 때마다 바삭하고 메마른 소리를 냈다.
고개를 들자 검은 하늘 위로 북두칠성이 손에 닿을 듯 낮게 떠 있었다. 도시에서 보던 별들과는 전혀 달랐다. 산 위의 별들은 훨씬 크고 선명했다. 공기가 너무 차갑고 맑아서, 별빛마저 얼음 조각처럼 날카롭게 박혀 있는 듯했다. 어쩌면 이곳은 오랜 여정을 끝낸 별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빛났고, 무심한 반짝임 속에는 우주의 질서와 고요한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그 아래 서 있는 나는 한없이 작고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지만, 동시에 그 광대한 질서 안에 포함된 하나의 점이기도 했다.
입김이 하얗게 피어올랐다가 이내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그 흐릿한 숨결을 바라보다 문득 그것이 내 존재의 형상처럼 느껴졌다. 인간의 삶도 어쩌면 이 입김과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사라진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분명히 어둠 속에 흔적을 남긴다.
나는 이 깊고 적막한 새벽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북두칠성이 지켜보는 밤, 고요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어쩌면 이 순간이야말로 내가 가장 온전하게 나로 존재하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의 나는 어떤 이름으로도 불리지 않는다. 직업도, 관계도, 역할도 사라진 채 오직 한 사람의 존재로만 서 있었다. 누구의 기대도, 사회가 부여한 이름도, 살아온 이력도 이 어둠 속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남은 것은 추위에 떨고 있는 몸과,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눈, 그리고 살아 있다는 감각뿐이었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비로소 구조로부터 벗어난 존재의 맨살을 만지는 기분이 들었다. 구조주의 철학자들이 말하듯, 인간은 언제나 거대한 체계 속에서 살아간다. 가족, 사회, 언어, 역할, 기억. 우리는 그것들을 통해 자신을 설명한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 이런 순간이 찾아온다.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고, 아무 이름도 필요하지 않은 순간. 그때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을 하나의 생명으로 느낀다.
춥고, 피곤하고, 외롭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선명하게 살아 있는 존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