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ARY YELLOW
2024/12/21/09:00
파리의 아침이 늘 그랬나? 창문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부드러운 햇살이 실크 커튼을 타고 흘러내렸고, 바람은 향긋한 빵 냄새를 실어 나르며 거리를 깨웠다. 나는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제의 여운이 아직도 나를 감싸고 있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오늘은 다시, 오늘의 여행 페이지를 펼쳐야 하는 날이었다. 아침은 존재가 다시 세상에 합류하는 순간이다. 햇살과 빵 냄새는 나의 의식을 깨우는 ‘현상’이었다. 세계는 늘 거기 있었으나, 내가 눈을 뜨는 순간 비로소 파리는 나의 파리로 도래한다.
먼저 어제 예약해 둔 프랑스 대통령궁 뒤편, 헤르메스 본점을 찾아 길을 나섰다. 손에는 전날 예약된 티켓을 쥐고 있었고, 마음은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직원은 우리가 찾는 곳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예약이 잘못되고, 장소도 잘못 찾아온 것이었다. 당황했지만, 여행에서는 이런 실수조차 이야기가 된다. 잘못 들어선 길, 잘못된 예약, 순간의 당황. 그러나 인간의 삶이란 언제나 정확한 계산보다 우연과 오차의 연속 위에 있다. 여행은, 아니 삶은 잘못 들어선 골목에서 피어나는 이야기로 충만해진다.
우리는 방향을 나누기로 했다. 한 팀은 몽마르트로, 우리는 다시 헤르메스 본점을 찾아 떠났다. 가는 길에, 명품 매장들이 우아한 쇼윈도 너머로 우리를 유혹했다. 디올의 문을 열고 들어가 머플러를 하나 골랐다. 눈 끝에 닿는 촉감이 부드럽고도 따뜻했다. 걸어 걸어서, 헤르메스 본점에 도착했다. 이곳은 하나의 예술 공간처럼 느껴졌다. 원하는 제품은 구매할 수 없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원한만큼의 가방은 볼 수 있었다. 우여곡절을 풀어서 말하고 싶기도 하지만, 생각보다 재미없다. 그래서 생략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정성을 들여 고른 작은 소품 하나하나가 그날의 기억을 더욱 깊이 새겼다. 쇼핑조차 기억을 고정하는 방식이 된다. 부드러운 천의 결, 작은 소품의 질감은 시간과 장소를 봉인한 상징이다. 우리는 물건을 사는 것인지, 시간을 구입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에서, 몽마르트에서 먼저 도착한 일행들과 다시 만났다. 레스토랑 내부의 주방 가까운 자리에서 프랑스 요리를 나누며 하루 동안의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접시 위에는 정갈한 음식이 놓여 있었고, 공기에는 웃음과 대화가 가득했다.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씹고, 언어를 생각하고, 분위기를 맛보고, 식당 풍경을 기억 속에 새겼다. 식사는 존재가 세계와 교감하는 의식이다. ‘먹는다’는 것은 그 땅의 시간과 문화를 내 몸에 들이는 것이다. 웃음과 대화가 곁들여졌을 때, 음식은 더 이상 영양분이 아니라 기억의 물질이 된다.
전쟁을 피해 자의든 타의든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살았던, 몽마르트 언덕으로 낡은 돌길을 따라 걸었다. 그 길이 낡았는지 아닌지 이제는 알 수 없다. 길모퉁이마다 예술가들의 작은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작은 스케치북을 펼쳐 들고 연필을 움직이던 어느 화가가, 술에 취해 감정이 고조된 예술가들의 고성이,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내 곁에 서 있는 듯했다. 성당에 들러 잠시 눈을 감았다. 몽마르트의 고요함 속에서 숨을 고르자, 마음이 차분해졌다. 역사는 돌 위에 새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그 위를 걸으며 상상하고 호흡할 때 다시 살아난다. 몽마르트 언덕은 과거의 화가들이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장소이며, 동시에 지금 내 발걸음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현재였다.
생피에르 성당을 돌아, 몽마르트의 상징인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내려와 전망대에 섰다. 파리는 저 아래,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붉고 회색 빛의 지붕들이 유려하게 이어졌고, 몽마르트 대성당은 에펠탑을 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에펠탑은 몽마르트의 전망대를 바라보지 않았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도 응시와 무관심이 있다. 인간의 시선이 서로를 완전히 포착할 수 없듯이, 파리의 상징물들 또한 저마다의 침묵 속에서 존재한다. 그것은 부재의 대화이며, 그래서 더욱 시적이다.
언덕 아래로 내려오다가, 2층짜리 회전목마를 보고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50년 전, 처음으로 회전목마를 타던 순간이. 나는 일행들에게 장난스레 말했다. "우리, 회전목마를 타자!" 모두가 웃었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아이처럼 순간 자기가 원하는 회전목마를 타고 있었다. 회전목마가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속도가 얼굴을 스치고, 행복이 나타났다. 순간, 세상의 모든 행복은 내 꺼였다. 회전목마의 원형 운동은 단조로운 반복 같지만, 그 안에서 경험은 매번 새로워진다. 아이의 기쁨이 성인의 몸에서 다시 소환될 때,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원형임을 드러낸다.
몽마르트를 내려와 돌아서는 길목에 서점에 들렀다. 따뜻한 조명이 책장을 비추었고,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종이의 부드러운 마찰음이 마음을 간지럽혔다. 오래된 책의 향기 속에서, 나는 내면의 평화를 찾았다. 책장은 타인의 정신과 시간의 집합체이다. 책을 펼치는 순간, 나는 나의 현재와 과거의 타인을 동시에 살아낸다.
노트르담 성당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 서서히 깊어 가고 있었고 추웠다. 이제는 일행들의 눈치가 더 빨라졌다. 덕분에 길게 늘어선 기다림의 줄을 줄이고 노트르담 성당을 품을 수 있었다. 고딕 양식의 화려한 장식과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쏟아지는 빛이 나를 압도했다. 천년의 시간을 머금은 성당 속에서, 나는 역사의 무게를 느꼈다. 침묵 속에서, 신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불멸에 대해 생각했다. 100년을 못 사는 유한한 인간의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창작물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 가지는 본질을 생명 하나로 정의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술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시간 위에 새겨진 인간의 흔적이 아닐까? 불탄 이곳을 다시 재건하고, 그곳을 다시 찾고. 지난날 재건된 숭례문을 다시 찾듯. 노트르담 성당을 보았다. 불멸의 인간.
신의 이름 아래 세워진 성당에서조차, 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을 본다. 인간이 창조하고, 파괴하고, 다시 세우는 반복 속에서 인간의 불멸은 증명된다. 불멸은 생물학적 수명이 아니라, 시간 위에 남겨진 흔적의 형식으로 우리를 넘어 이어진다.
가볍게 요기를 하고, 세계 최강의 프랑스 우버 택시를 타고 에펠탑으로 향했다. 정말 빠르다. 차선을 만들어 내는 택시. 프랑스 영화 ‘택시’는 논픽션. 택시 차창 밖으로 떨면서 보이는 도시는 반짝이는 보석처럼 빛났지만, 빠른 유성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이윽고, 철의 거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불빛이 반짝이며 탑을 타고 흐르고, 우리는 천천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로 올랐다. 비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그러나 나는 그 거친 비바람이 마치 이 순간을 더 생생하게 해주는 듯 느껴졌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에펠 탑이 등대가 되어 내려 비추는 도시는, 전체가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시간도 흥분한 듯 빠르게 지나갔다. 고통과 불편조차 경험을 더 깊게 새긴다. 비바람은 생생함의 촉매이다. 행복은 편안하고 안전한 상태보다, 몸이 흔들리는 순간 더 강하게 다가온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개선문으로 다시 돌아갔다. 파리의 여행은 개선문에서 시작해서 개선문으로 끝난다고 했던가. 전쟁의 승리와 패배, 역사와 사건의 시간이 교차하는 그곳에서 나는 오래된 돌 벽을 손끝으로 느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며 자신의 생각을 품었을까? 꺼지지 않는 불꽃이 흔들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시간과 기억, 그리고 불멸에 대한 의지처럼 보였다. 개선문은 기억의 집합체이다. 돌에 새겨진 이름은 인간의 죽음을 넘어선 존재의 방식이다. 꺼지지 않는 불꽃은 ‘기억하라’는 인간의 명령이자, 시간에 맞서는 의지였다.
숙소로 돌아오는 RER 열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의 파리는 조용했지만 여전히 살아있었다. 오늘의 기억이 하나하나 스쳐 지나갔다. 아침의 햇살에서부터 저녁의 에펠 탑 CANARY YELLOW 불빛까지, 모든 것이 내 안에서 선명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시간은 단순히 시계로 재는 양적 흐름이 아니다. 아침 햇살에서 시작해 저녁 에펠 탑 불빛 아래에서 느낀 감정의 연속은 하나의 질적 시간이다. 이것이 바로 지속이다. 인생의 진짜 경험은 이런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만들어진다. 오늘 하루의 모든 사건은 그 자체로 기억 속에서 새롭게 재창조된 현재일 뿐이다. 과거를 기억하는 순간도 현재이고, 미래를 생각하는 순간도 현재이고, 모든 건 지금 이 순간 현재에 증명할 수 없는 존재로 있다. 또한 만들어진다. 느낌적인 느낌으로. 존재의 증명은 요구 되어질 수 없다. 시간은 흐르는 의식 속에서 늘 현재로만 존재한다. 나는 과거를 회상하며 현재를 살고, 미래를 꿈꾸며 현재를 살뿐이다. 결국 인생은 ‘지금’이라는 무대에서만 펼쳐진다.
몽마르트를 떠나며 뒤돌아 보았을 때, 그 회전목마는 멈춰 있었다. 다음 손님을 기다리는 듯했다. 나는 생각했다. 인생도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까? 어떤 순간들은 그대로 멈춰 있다가, 언젠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인생은 충분히 포근할 이유가 있으므로 그렇게 해줘야 한다. 그리고, 또 꿈 하나를 만들었다. 다시 이 도시를 찾아와, 저 회전목마를 타리라고.
멈춤은 끝이 아니라 기다림이다. 인생은 직선적 종결이 아니라, 원형적 회귀의 연속이다. 어떤 순간은 멈춘 채 기다리며, 우리가 다시 다가갈 때 비로소 되살아난다.
몽마르트의 낡은 돌길, 서점에서 넘긴 오래된 책장, 노트르담 성당의 고요함, 그리고 개선문에서 느낀 불멸의 시간… 이 모든 장소는 기억의 공간이자, 내면의 시간과 결합해 독특한 경험이 되었다. 내가 지나온 길 위에 시간은 남아 있지 않다. 시간은 바로 내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이란, 과거와 현재의 경험이 끊임없이 대화하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오늘 느낀 모든 감각과 감정은 언젠가 다른 시간 속에서 다시 불쑥 나타나며 나를 또 다른 여행으로 이끌 것이다. 몽마르트 회전목마로.
여행은 공간의 이동에서 가지는 시간의 사유이다. 길 위에 새겨진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서 다시 출현한다. 여행은 외부의 풍경이 아니라, 내면의 시간의 확장이다. 회전목마처럼 반복적인 회전의 경험조차, 시간의 연속 속에서, 늘 새롭고 독특한 기억의 일부로 만들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인생은 직선적 시간의 나열이 아니라, 각 순간이 감정과 기억으로 물들어 확장되는 하나의 살아 있는 파동이다. 소설책을 읽을 때와 같다. 페이지 순서대로 읽어 내지만, 어느 순간 멈추고 의식을 확장한다. 또한, 이런 생각은 하이데거와 같은 사유일 수 있다. 하이데거의 학문적 성과와 나치에 부역한 사실이 후대의 평가에서 분분하지만, 학문적 사유만 바라보고자 한다. 옳고 그름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인생은 선형적 진보가 아니라 파동이다. 각 순간은 과거와 미래의 층위를 불러내며 현재를 확장한다. 존재란 언제나 시간과 함께 있고, 그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울림이다.
회전목마가 멈춘 것은 기다림의 끝이 아니라 다음 순간의 시작이다. 인생도 그렇다. 너무 서두르지 마라. '천천히 걸어도 괜찮다'는 파리의 속삭임을 나는 이미 들었다. 에펠탑에서 내려다본 파리는 삶의 전체적인 조화를 상징한다. 그 높이에서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져 보이듯, 삶의 순간들도 그 흐름 속에서 자연스레 연결될 것이다. 산의 정상에서 아득히 내려다 보이는 마을의 모습처럼. 마음의 평화는 외부에서 얻기도 하지만, 그 끝은 결국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삶은 서두르는 경주가 아니다. 파리는 회전목마처럼 천천히 돌면서도, 에펠탑처럼 웅장히 서 있으며, 노트르담처럼 불멸을 품는다. 여행은 나를 가르친다. 존재의 조화는 외부에서 발견되기보다, 결국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임을.
몽마르트의 언덕 낡은 돌길을 따라,
예술가들의 흔적 속에 숨을 고른다.
역사의 무게를 느끼고,
예술이란 인간의 흔적이 새겨진 시간의 기록.
노트르담의 스테인드글라스,
천년의 빛이 쏟아지며,
신의 존재가 아닌,
인간의 불멸을 생각하게 한다.
에펠탑의 불빛 아래, 도시는 별처럼 반짝이고
개선문은 시간과 기억이 교차하는 곳,
얼마나 많은 꿈이 이곳을 지나갔을까?
꺼지지 않는 불꽃이 흔들리며 타오른다.
회전목마. 기다리는 순간
어떤 순간은 그대로 남아 기다린다.
시간이 멈춘 그곳에서,
회전목마를 타고,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