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서쪽은 물감이 뜨겁다

MULBERRY

by 원성진 화가

2024/12/22/09:00


파리를 떠나는 길, 도시의 아련한 잔상이 여운처럼 남아 있었다. 시내에서 외곽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풍경은 콘크리트 색의 복잡한 구조물의 고가로 복잡하게 흘렀다. 오늘의 목적지는 칼레. 그러나 떠나기에 앞서, 어젯밤 계획했던 대로 파리의 서쪽 공원 한가운데 자리한, 자연과 건축이 조화를 이루는 특별한 공간, 루이뷔통 재단으로 향했다.


공원 속에 자리 잡은 이곳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이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시선은 자연스레 건축물에 사로잡혔다. 프랭크 게리의 손길 아래 탄생한 이 구조물은 바람을 머금은 돛처럼 유려하게 휘어 있었다. 투명한 곡선과 비대칭 구조는 마치 바다를 가르는 배처럼 역동적인 움직임을 품고 있었다. 빛과 그림자의 교차 속에서, 건물은 매 순간 다른 표정을 지었다. 햇살이 스며들며 유리 패널 위에서 부서지고, 표현하기 어려운 색이 물결처럼 흘렀다.

이곳에서 건축의 공간은, 바람을 타는 하나의 존재가 되어 있었다. 로마네스크의 철저한 대칭구조가 아닌, 루이뷔통 재단의 비대칭적 구조를 보며, 출발점과 종착점이 없는 비선형적 공간, 끊임없이 연결되고 확장되는 흐름이 보였다. 그것은 마치 인생의 지도와도 같았다. 직선적 서사가 아닌, 우연과 필연이 얽히며 만들어내는 경로. 인간의 삶을 설명하려는 모든 구조적 틀이 결국 비선형적 세계 앞에서 흔들리는 것처럼, 건축은 그 자체로 인간 실존을 비추는 은유였다.

또한 바다와 같은 계단식 얕은 물의 흐름이 건물을 비치고 있었다. 물은 건축을 반영하면서도 왜곡했고, 반영과 왜곡의 교차는 현실과 환영의 경계를 흐리게 했다. 이는 곧 철학자들이 말하던 ‘재현의 불가능성’을 떠올리게 했다. 세계는 언제나 반영되지만, 그 반영은 결코 원본일 수 없다는 사실.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 또한 그 자체가 아닌 수많은 굴절의 층위임을 이 물의 표면은 말해주고 있었다.


입장권을 손에 쥐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또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빛이 자유롭게 흐르는 내부 공간은 미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벽과 천장, 그리고 바닥까지도 건축적 조형미가 살아 있었고, 이곳에 전시된 작품들은 건축과 조화를 이루며 더욱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건축은 그 자체로 전시의 틀이 아니라, 예술과 대화를 나누는 제3의 존재였다.


팝 아트 전시가 한창이었다. MULBERRY색의 강렬한 입술, 생생한 색감, 대담한 구도, 그리고 익숙한 이미지들이 낯설게 다가왔다. 팝아트는 대중문화와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혁명이었다. 아서 단토(Arthur Danto)는 서구 미술은 르네상스 이후 재현을 목표로 하다가, 모더니즘을 거쳐 자기 탐구로 전환되고, 앤디 워홀을 통해, 예술과 일상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예술은 더 이상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했다. “이것이 왜 예술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현대 예술의 핵심이 되었다고 주장하며, 예술은 더 이상 어떤 특정한 목적이나 발전 방향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완전히 열린 상태가 되었다. 이제 예술은 개별 작가의 철학과 개념을 반영하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즉, 예술은 더 이상 역사적 발전의 틀 안에 갇히지 않으며, 모든 것이 가능해진 시대에 들어섰다는 것이 단토의 핵심 생각이다. 단토의 생각에 따르면, 예술의 종말 그 이후의 작품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사유 속에서 ‘예술의 종말’은 끝이 아니라 ‘다양성의 시작’이었다. 루이뷔통 재단에서 마주한 작품들 또한 그러했다. 고정된 의미가 아닌, 각기 다른 해석과 감각의 층위를 만들어내며 관람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물론 동시대 문화 연구론 자들의 평가는 다른 면이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앤디 워홀의 작품이 프랑스 파리에서 전시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제 유럽도 미국에 의해 변질된 모더니즘을 받아들인 것일까? 평론가들의 분석도 중요하지만, 뒤샹이나 앤디 워홀이나 존 케이지, 백남준 등의 많은 창작자들의 작품들이 현재에 회자되고 있고 주목받고, 따라 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이 트렌드. 그의 작품 속에서, 색은 단순한 미적 요소를 넘어서 반복되는 이미지 속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차이들을 통해 미국이 원하는 모던을 만들어낸다. 예술은 정치와 사회, 자본과 욕망을 끊임없이 비추는 거울이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원색 패널은 어둠 속에서 색을 발하며, 붉은빛, 푸른빛, 보랏빛이 서로 뒤섞이고 일렁인다.


그중에서도 발걸음을 붙잡은 것은 마치 공간을 입체적으로 해체한 듯한 작품이었다. 투명한 실과 얽혀 있는 듯한 구조가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작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선과 면이 중첩되며 만들어내는 착시효과 속에서, 시선은 끊임없이 흔들렸다. 낯익은 것들이 낯설게 보이는 순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이 작품은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세계를 다시금 질문하게 했다. 서도호라는 현대미술의 유명한 한국 작가의 작품이었다.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이 공간은 단순한 시각적 즐거움을 넘어, 깊은 사유를 선물했다. 선과 면의 중첩, 공간의 해체적 표현은 익숙한 감각을 벗어나 새로운 감각적 지평을 열어주는 작업이다. 이 순간,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감각과 사유가 새롭게 재구성되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 없음을 보여주는 것인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가? 경계를 보여주는 것인가? 노자의 무를 보여주는 것인가? 싯다르타의 공을 보여주는 것인가? 이는 결국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가르는 철학적 질문이었다.


전시실을 거닐며 예술이 던지는 질문들을 하나씩 생각했다. 소비주의와 매스미디어, 그리고 현대인의 소외된 감정들이 작품 속에서 속삭이고 있었다. 작품들을 바라보며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가 떠올랐다. 그는 기술과 예술,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며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열었던 인물이었다. 그의 작품 속에서도, 이곳에서 마주한 작품들 속에서도, 예술은 단순한 시각적 대상이 아니라 우리 시대를 비추는 거울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루이뷔통 재단에서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남긴 인상은 깊었다. 건축과 예술이 공존하며 끊임없이 대화를 만들어내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예술이 더 이상 특정한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의 삶 속에 깃든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는 곳. 루이뷔통 재단 미술관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교차하는 장소였고, 관람객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선물하는 공간이었다. 예술은 고정된 작품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사건이다. 이 모든 작품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아직 생성 중인 존재다. 작품과 관람객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의미를 생산한다. 의미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유동적 사건이었다.


다시 길을 나섰다. 차창 밖으로 파리의 마지막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도시를 떠나는 길목에서, 방금 본 작품들에 대해 사유를 이어갔다. 빛과 색이 만들어낸 감각적인 경험, 팝아트가 던지는 질문들, 그리고 프랭크 게리의 건축물이 보여준 혁신까지. 예술은 여행의 쉼표이자, 또 다른 시작이었다. 파리의 서쪽에서 만난 이 짧고도 깊은 순간은 기억될 것이다. 마치 루이뷔통 재단의 유리 패널처럼, 시간에 따라 다른 색으로 반짝이며, 기억 속에서 또 다른 이야기로 피어날 것이다.



루이비통


자연과 건축이 조화를 이루는 곳

바람을 머금은 돛처럼 유려하게 휘어

빛과 그림자의 교차 속

햇살은 흔들리며 스며들고 부서지고,


MULBERRY 색의 강렬한 입술

소비주의와 허상은 대중문화의 혁명으로 나아간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존재의 본질을 질문하게 된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교차하고, 공존하고, 포개어진다.

예술은 우리 삶의 거울이 되어,

소외된 감정을 드러내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빛과 색이 만들어낸 감각,

예술은 여행의 쉼표이자 새로운 시작.

유리 패널처럼,

시간에 따라 다른 색으로 현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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