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으로 만난 파리의 색은 예술

ORANGE

by 원성진 화가

2024/12/19/08:00


파리에서의 둘째 날, 아침부터 몸이 무거웠다. 일어날 수는 있을까? 스스로 의심스러웠다. 감기 기운과 소화불량이 겹쳐 한 걸음 내디디는 것조차 버거웠다. 밤새 창가에 창문 틈으로 스며든 차가운 공기 때문일까, 아니면 여행의 긴장 탓일까? 그러나 이곳까지 와서 침대에만 머무를 수는 없었다. 파리의 태양이 서서히 도시를 데우기 시작할 즈음, 준비해 간 채혈 바늘로 스스로 손가락을 따고, 소화제와 진통제를 한꺼번에 먹고 나서야, 나는 천천히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가야 하니까.


버스를 타고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향했다. 콩코르드 광장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이곳이 간직한 역사의 무게를 떠올렸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혼식을 올린 곳, 그러나 그들이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이한 곳. 이곳을 스쳐간 무수한 생의 흔적을 생각하며, 나는 튈르리 정원을 지나 미술관으로 들어섰다. 지식은 가볍지 않다. 무거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겹게 온다. 그래도 생각해야 한다. 역사는 기록되고, 알아야 하니까. 역사를 안다는 것은 곧 오늘을 더 선명하게 살아가는 일이니까.


전시장 안은 파리의 습한 서늘함과는 달리 아늑했다. 호흡의 흐름이 느려지고, 공간은 빛과 색으로 가득 찼다. 특별전이 펼쳐진 전시장에서는 피카소, 마티스, 클레. 그들의 작품이 하나의 대화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림과 그림이 서로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말하는 듯했다. 그 대화 속에 나도 한 명의 목격자로 초대된 기분이었다.


피카소의 붓질과 팬의 놀림은 현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며, 인간의 얼굴과 형상을 낯설고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했다. 그것이 사실이다. 그의 ‘Portrait de Georges Braque’는 한 인물의 초상을 기하학적 언어로 풀어냈다. 누가 봐도 이 그림은 피카소라고 적어 놓은 듯하다. 물론 전시장의 파란색 벽지 면 위에 우드 액자와 갈색 톤의 그림은 대조적으로 밝게 보였지만, 시대를 아우르는 아픔이 함께 했었다. 생각해야 한다. 피카소는 시대가 만들어낸 천재인가? 시대의 요구로 새로운 길을 개척한 예술가인가? 아니면, 미술의 마침표를 찍은 존재인가? 그의 그림 앞에서 나는 역사와 예술이 동시에 던지는 질문에 서 있었다.

앙리 마티스의 색은 장조의 밝은 음악 같았다. 그의 에트르타 인테리어(Interieur à Étretat)는 창문 너머로 흘러드는 햇살과 실내의 그림자가 어우러지며 공간을 하나의 음악처럼 만들어냈다. 푸른색과 흰색이 부딪히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화면은, 마치 이른 오전의 산뜻한 공기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듯했다. 그 속에서 나를 발견했다. 아침은 화창하게 밝아 왔는데, 몸이 아파 일어나지 못하는 고통. 아파서 느끼는 고통이 아니라, 일어나지 못해 느끼는 고통 때문에, 애써 돌아 누우며 창밖을 외면하는 모습이 오늘 아침 나와 참 많이 닮았다. 마티스의 색은 내 아침의 아픔을 위로하는 듯, 동시에 내 안의 햇살을 일깨우는 듯했다.

파울 클레(PAUL KLEE) 앞에서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간. 결. 하. 다.

그의 작품은 색과 선의 조합이 시처럼 읽혔다. 위와 아래(Dessous et dessus)는 제목처럼 대비되는 개념과 층위를 탐구했다. 어디를 무엇을 위라고 부르고, 무엇을 아래라고 부를까? 서명이 없었다면 어떻게 걸어도 무방하다. 그의 그림 속에서 경계는 모호했고, 세계는 하나의 시적 추상으로 존재했다. 눈 코 입은, 태양은, 시든 꽃은, 목걸이 같은 경계는, 뜬금없는 하트는 구분하지 말라고 장난하듯 말했다. 봉인된 여인(Dame scellée)에서는 닫힌 얼굴 입술에 감춰진 인간 내면의 이야기가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클레의 색들은 마치 오래된 낙엽처럼 따뜻하면서도 서늘했고, 그의 선들은 기억의 흔적처럼 가볍게 때론 날카롭게 스쳤다. 그의 작품은 나에게 ‘너의 삶에도 경계는 허구일 수 있다’고 은밀히 말하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네의 ‘수련 연작’ 앞에 섰다.

타원형 전시실에 들어선 순간, 나는 호수 한가운데로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졌다. 모네는 호수의 풍경을, 시간과 빛이 만들어내는 변화의 흐름으로 담아냈다. 해 질 녘 강가에 번지는 오렌지 빛 햇살, 물결 위로 일렁이는 빛의 흔적, 바람결에 흔들리는 수련의 고요한 움직임. 그의 그림은 끝없이 이어지는 하나의 여정이었다. 미술사 전공 교수님의 설명을 듣기 전까지 후대에 와서 대형 크기로 확장시킨 모작인 줄 알았다.

특히 모네의 색감은 자연의 호흡을 담아낸 듯했다. 캔버스 위의 황금빛, 붉은 기운을 머금은 주황색, 물속에 녹아든 부드러운 푸른빛. 그것들은 시간의 결을 따라 변주하는 빛의 노래였다. 그림 앞에 서 있는 동안, 마치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오후 속을 거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목하게 둥근 벽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수련들은 하나의 강처럼 흐르고, 나는 그 강물 속에 잠시 떠다니는 작은 잎사귀가 된 듯했다. 모네가 그린 것은 빛과 물, 그리고 존재의 흔적이었다. 끊임없이 변하는 것,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 것. 인간이 포착하려 애쓰지만 결코 붙잡을 수 없는 것. 그는 수련을 통해 시간과 생명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철학적 메시지나, 기하학적 구도나, 명암의 스킬이 아니라 순간. 순간을 그려 냈다. 나도 그 순간을 살아간다. 순간.


미술관을 나서며, 컨디션이 점점 안 좋아지는 나는, 푸른 파리의 하늘을 오렌지 빛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모네의 수련처럼, 여행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은 눈부셨고, 어느 순간은 흐려졌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이 모여 하나의 풍경을 이루듯, 내 여정도 그렇게 빛과 색을 머금으며 이어지고 있었다. 몸이 아프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 역시 하나의 강렬한 지각 경험이 된다. 감각이 흐려지고 몸이 무거워질 때,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몸과 존재의 무게를 인식하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선물처럼 다가왔다.


오랑주리를 나와 레오폴드 세다르 셍고르 인도교를 건넜다. 센 강 위를 스치는 바람이 어딘가 노을빛 향기를 품고 있었다.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강변의 풍경은 초고화질 8K 영상처럼 눈앞에 선명히 펼쳐졌다. 모든 사물의 멀고 가까움은 있었지만, 선명도에서 느껴지는 원근은 없었다. 먼 곳에 솟아 있는 에펠 탑, 고요히 흐르는 물결을 따라 이어지는 강변 위에 루브르 박물관의 웅장한 자태, 그리고 하늘 위로 부드럽게 흩어진 구름들. 모네의 ‘양산을 든 여인’이라는 그림에서 본 듯한 구름이다. 그렇게 파리는 센 강의 물살 속에서 천천히 변화하는 빛을 남김없이 머금어 가고 있었다.


오르세 미술관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나의 가슴에는 묘한 기대감이 일었다. 과거 기차역이었던 건물을 개조한 이 미술관은 그 자체로 한 시대의 유산이었다. 서울에도 과거 서울역 건물이 지금 그러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오르세 미술관의 거대한 시계 창을 통해 쏟아지는 빛은 마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처럼 공간을 가득 채웠다. 시계 창 너머에는 중세의 파리가 그대로 빛바랜 영화 스크린처럼 있었다. 하지만 나의 몸은 점점 무거워졌다. 예술작품들이 빚어내는 빛과 색이 눈앞에서 춤추고 있었지만, 그것들을 충분히 음미할 힘이 없었다. 마음은 작품에 머물고 싶었으나, 몸은 점점 더 지쳐갔다.


지친 몸으로 경험한 파리는 고통 속에서도 나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었다. 이것이 바로 삶이다. 고통은 불행이 아니라, 우리를 더 깊고 진정한 삶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르세의 문을 넘는 순간 나는 다시금 예술의 축제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여기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예술적 혁신이 살아 숨 쉬는 성소였다. 과거의 기차역이었던 이곳은 여전히 여행 중이었다. 시간의 강을 건너, 예술이 흐르는 공간으로. 기차역에서 미술관으로 변한 오르세처럼, 우리의 삶도 끝없는 변화와 재탄생의 여정이다. 완벽하지 않은 순간 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다. 우리는 고통과 실수를 통해 더 강해지고, 더 생생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가장 먼저 입장한 전시관은 5층의 빈센트 반 고흐의 전시실이었다. 그의 '별이 빛나는 밤'은 캔버스 위에서 소용돌이치는 황금빛과 푸른 밤의 노래였다. 고흐는 보이는 하늘을 그리지 않았다. 그의 붓질은 밤하늘을 살아 숨 쉬게 했고, 별들은 거센 감정의 파도처럼 일렁였다.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빛이 아니라 움직이는 풍경이었다. 나는 마치 그 밤의 일부가 된 듯, 그의 혼란과 열정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자신이 본 세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느낀 세상을 화폭에 담아낸 예술가였다.


다음으로 클로드 모네의 '건초더미' 앞에 섰다. 가을빛이 내려앉은 들판, 부드러운 주홍빛과 황금빛의 변주. 모네는 역시 모네였다. 그는 빛과 시간이 만나 만들어내는 순간의 마법을 포착했다. 아침 햇살이 어루만지는 차가운 공기, 해 질 녘 노을이 스며드는 온기. 그의 붓질 속에서 시간은 흘러가면서도 영원히 머물렀다. 어린 시절 건초더미의 추억이 있어, 이 건초더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안다. 이것이 있어야 소와 말이 겨울을 날 수 있었고, 그것으로 생활에 필요한 많은 것을 만들 수 있었다. 겨울을 지탱하는 풍요였다. 그리고 그 시절 우리들의 따뜻한 아지트였다.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은 추억으로 다가온다. 그림의 전체적인 빛의 흐름에서 런던의 화가 윌리엄 터너를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에드가 드가의 '발레 리허설'에서는 무대 뒤의 긴장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발레리나들은 완벽함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지만, 드가는 그 화려함이 아니라 그 이면을 포착했다. 비스듬히 기댄 몸, 지친 표정, 혹독한 연습의 흔적들. 아름다움은 노력 위에 피어난다는 것을, 인생이 그렇듯, 드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름다움이 보일 때, 이면을 보라. 빛나 보일 때 뒤를 보라.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이 고스란히 담겼다.


모네의 건초더미와 드가의 발레리나들은 모두 시간을 품고 있다. 그것은 영원히 고정된 완벽함이 아니라, 변하고 흔들리며 빛나는 순간들이다. 삶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흔히 삶이 고요하고 안정적이기를 바라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은 바로 그 흔들림 속에서 피어난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앞에서는 숙연한 감정이 밀려왔다. 구부정한 허리로 이삭을 줍는 손길, 많은 평론들이 있지만 나는 가난하지만 품위를 잃지 않은 그들의 자세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이삭을 줍는 모습에서 숭고함을 느꼈다. 그렇다. 밀레는 노동의 숭고함을 그려낸 것이다. 황혼 속에서 번지는 부드러운 빛이 여인들의 실루엣을 감쌌고, 그것은 곧 인간 존재의 존엄함과 생존 자체가 삶의 목적임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듯했다. 그 시절 화려한 의자에 앉은 귀족을 향한 화가의 시선이, 들판으로 나와 아무도 보지 않는 그림을 그렸다. 이제는 보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


미술관의 출구 표지판을 따라 걸으며, 문득 작은 세숫대야에 폭포수를 받으려는 기분이 들었다. 쏟아지는 물살에 한 방울도 담지 못한 채, 모두 흩어져 버리는 느낌. 수많은, 어마어마한 작품들 앞을.

어.떻.게. 그.냥. 걸.어.갈 수 있단 말인가? 2024년의 인간은 가능한가?


오르세 미술관을 나서는 길, 해 질 녘, 센 강 위로 오렌지 빛 노을이 번지고 있었고, 한낮에 본 군밤 장수는 그대로 있었다. 바뀐 사실은 군밤장수가 식어서 굳어 먹을 수 없는 군밤을 싸게 팔려고 했다는 걸 뒤에 알았다. 낮에는 소량은 팔지 않겠다던 사람이 이제는 떨이하듯. 불판 위의 군밤도 변한다.

암튼 이곳에서의 시간은 예술이 우리 삶에 건네는 대화였고, 과거의 화가들이 남긴 목소리였다. 나는 이 도시가 품고 있는 예술적 유산에 욕심을 느꼈다.

오래도록 서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여행은 기대만큼 늘 순탄하지 않다. 몸은 여전히 무거웠고, 걸음은 느려졌다. 감기에 지친 눈으로 본 파리는 다른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빛나는 도시도, 잔잔한 강물도, 가로등 아래 어른거리는 그림자도. 좋은 컨디션이라면 놓쳤을 작은 디테일들이 오히려 선명하게 다가왔다. 여행이란 때로는 천천히 걷고, 멈춰 서서 바라보며, 있는 그대로의 순간을 받아들이는 것.

파리는 나의 지친 발걸음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감싸 안고 있었다. 아픈 몸으로 경험한 파리는 오히려 더 깊이 마음속에 각인되었다. 여행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우니까. 예술도 완벽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는 황홀한 찰나를 포착하는 것이다.

드가가 발레리나의 지친 순간을 그려낸 것처럼, 모네가 시간과 빛의 흐름을 그린 것처럼, 나 역시 나의 여정 속에서 자신만의 예술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 예술은 바로 나의 삶이다.




빛의 길


빛은 흐르고, 시간은 물결친다.

콩코르드 광장의 돌바닥에 중첩된 얼룩들,

무수한 삶과 죽음이 교차한 자리,

그곳을 비켜선 오랑주리


벽 위에 걸린 색들은 요동친다.

피카소는 형태를 부수고,

마티스는 색을 노래하며,

클레는 선으로 세계를 다시 쓴다.


위와 아래는 흐려지고, 안과 밖은 경계를 잃는다.

모네의 물빛 속에서, 스스로를 잊고 하나의 흔적이 된다.

붓끝에서 탄생한 빛의 여운,

잠시 머물다 흩어지는 존재의 파문.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순간은 여기에 있다.

강물 위에 비친 하늘처럼, 빛과 물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며,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여행의 길


파리의 노을빛 속에 숨겨진 진리를 찾는다.

완벽함의 압박 속에서 멈춤 이란 선택은 삶의 예술임을.

센강의 물결처럼 흐르는 시간

빛과 그림자, 희망과 고독이 조화를 이루며 속삭인다.


고흐의 별빛, 모네의 순간,

드가의 노력, 밀레의 존엄,

르누아르의 행복에서 모두가 말한다,

아름다움은 불완전함 속에 있다.


여행은 완벽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

지친 발걸음이 새로운 시선을 열고,

작은 디테일 속에 진정한 의미를 발견한다.


삶은 느림의 미학, 멈춤의 지혜,

고난 속에서 피어나는 진리의 명화.

여행은 끝이 없고,

여행은 삶이 되고, 삶은 여행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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