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새벽, 흔들리는 색

PARMA VIOLET

by 원성진 화가

2024/12/18/08:00


이른 새벽, RER 이층 전철에 몸을 실었다. 마치 거대한 도시의 깊숙한 벙커로 빨려 들어가듯, 지상을 달리던 전철은 어둠을 가르며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지하도를 빠져나와 지상과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바람 속에 우뚝 선 개선문이었다. 아니 먼저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 개선문이었다. 새벽빛에 잠긴 개선문은 마치 시간을 초월한 듯, 한 시대의 기억을 품고 꿋꿋이 도시를 지켜보고 있었다.


센 강의 바람은 지하도를 빠져나오기 전부터 나를 감쌌다. 차가운 공기가 내 몸을 흔들었지만, 내가 흔들린 것은 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 도시를 향한 기대감과 새벽의 적막함 속에서, 나 자신이 한없이 작아진 듯한 감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작음이 초라함은 아니었다. 파리의 새벽은 나를 소멸시키는 대신, 오히려 나를 투명하게 비춰 보였다.


이 거대한 도시는 내 앞에 열려 있지만, 그 안에서 내가 느끼는 고독은 내 자유의 본질이기도 하다. 나는 나의 선택과 흔들림을 통해 스스로를 완성해 가는 존재다. 흔들리는 순간은 결코 약함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이다. 여행이란 결국 나 자신을 매 순간 재창조하는 행위이며, 이 과정에서 나는 끊임없이 선택하고, 그 선택의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침이 오기까지 어디든 가야 했다. 그리고는 에펠 탑 아래를 걸었다. 차가운 철골 구조물일 거라 생각했지만, 가까이에서 바라본 에펠탑은 마치 바람결에 흔들리는 실루엣처럼 부드럽고 우아했다. 강인한 쇠의 뼈대 위로 흐르는 섬세한 곡선들은 오랜 세월 속에서 다듬어진 한 편의 시와 같았다. 그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도시를 생각했다. 파리를 감싸는 이 따뜻한 아름다움이, 결국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아닐까?


센 강을 건너며 에펠 탑을 등졌다. 여전히 강바람은 나를 따라왔지만,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다시 개선문으로 향했다. 이제 도시는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새벽의 적막함은 사라지고, 거리는 생기로 가득 찼다. 부드럽게 퍼지는 아침 햇살이 도시의 윤곽을 더욱 뚜렷이 비췄다. 그리고 나의 마음속 흔들림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랬다. 파리의 새벽은 고요 속에서도 묵직하게 흐르는 시간, 그리고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낯설고 불안했지만, 이내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흔들린다는 것은 내가 이곳의 일부가 되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른 새벽, 샤갈의 작품 같은 화려함이 느껴지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아름다웠던 건물. 아침까지도 빛나고 있었던 크리스마스 장식을 길 건너에 두고, 샹젤리제 거리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파리의 웅장함은 위대한 건축물과 화려한 조명에서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남긴 발자국과, 흩날린 이야기들이 모여 이루어진 거대한 서사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 또한 작은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내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들리는 순간들, 실수와 좌절의 나날들은 때로 나를 나약하게 했지만, 결국 그것들이 나를 이루는 조각이었다. 내 삶도 마치 새벽의 파리처럼, 고요 속에서 천천히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흔들림은 부정이 아니라 성장의 신호,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파리는 말한다. 흔들리는 날들 속에서도 나는 나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그것은 하나의 결을 이루는 과정이라고.

지금 나는 파리를 걷고 있지만, 이 도시는 나를 정의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느끼는 감정은 내가 만든 것, 내가 선택한 것, 그리고 그것이 곧 나다. 나는 사르트르가 말한 ‘대자(對自)’이며, 데카르트가 말한 이성적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다. 이른 새벽, Parma Violet 색으로 물든 파리는 내게 삶의 철학을 들려주는 위로였다. 흔들리며 완성된 도시처럼, 나 역시 흔들리며 나를 채워가고 있었다. 흔들려야 틈이 보이고, 나아갈 수 있다. 샹젤리제 거리에서 마주한 이 생각은, 언젠가 나를 위로할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파리에서의 첫날은 쇼핑으로 시작해 쇼핑으로 끝났다. 아침 일찍, 헤르메스 매장 앞에 길게 늘어선 줄 속에 나도 있었다. 그 속에서는 여유로운 파리의 아침이 없었다. 기다림 끝에 들어선 매장은 부드러운 가죽의 향과 고급 향수의 속삭임이 뒤섞인 공간이었다. 샹젤리제 거리로 발길을 옮기며 거리를 메운 많은 매장들을 방문하기도 하고, 지나치기도 했다. 시작은 기대감으로 들뜬 발걸음이었지만, 오랜 시간 길을 찾아가며, 거듭 걷다 보니 몸이 점점 무거워졌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고, 바라보고, 또 걷기를 반복하는 동안 지쳐갔다.

어느새 프랑스 대통령궁 뒤편, 또 다른 헤르메스 매장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다시 마레 지구로 향했다. 중세의 흔적이 스민 골목길을 따라 걸으며 마치 시간 속을 여행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모든 감흥도 고픈 배 앞에서는 희미해졌다. 오후 세 시가 지나서야 겨우 햄버거 하나로 첫 끼를 해결했다. 늦은 점심이었지만, 온종일 걸으며 소진된 내게는 그 무엇보다 값진 한 끼였다.


그 후 퐁피두 센터를 지나쳤다. 중세와 현대가 공존하는 파리의 진면목을 담은 건물, 그러나 그 강렬함을 충분히 음미할 여유는 없었다. 어둑해진 밤, 샤틀레 Les Halles 지하철역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RER 열차 안에서 체력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잠시 쉬었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파문이 일렁였다. 낮 동안 일행과의 사소한 마찰이 남긴 흔적이었다. 그 감정을 정리하지 않은 채 잠들고 싶지 않았다.


차가운 밤공기가 나를 감쌌다. 홀로 걷다 보니 작은 식당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간판 불빛 아래 놓인 소박한 테이블들이 마치 나를 부르는 듯했다.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잔잔한 파리의 밤은 여유로웠다. 희미한 대화소리가 공간을 메우고, 어디선가 흐르는 음악이 나지막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 소음 속에서 이상하리만치 깊은 고요를 느꼈다. 홀로 앉아 맥주를 마시는 이 순간, 하루의 끝자락에서 나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마치 긴 문장 끝에 찍힌 쉼표처럼, 나를 잠시 멈추게 했다.

낮 동안의 일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기대와 설렘으로 시작한 하루는 고단함과 마찰로 채워졌지만, 결국엔 이렇게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정리되고 있었다. 여행이란 어쩌면 이런 순간들의 연속 아닐까? 소란스럽고 복잡했던 하루를 마무리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내 안의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 맥주잔을 비우자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파리의 밤은 여전히 크리스마스였다. 이 도시에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오늘을 무사히 보냈다는 사실에 조용히 감사했다.

머리를 숙이고 숙소로 걸어가는 길에 생각했다. 여행은 새로운 곳만을 보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도 감내하며, 나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렇게 파리에서의 첫날밤은 고단함 속에서도 보랏빛 평온을 남기고, 내일을 꿈꾸게 했다.



흔들림의 존재


이른 새벽, 나는 경계에 선다.

어둠과 빛, 고요와 소음, 과거와 미래의 틈

강물은 흔들리며 갈 길을 가고,

도시는 흔들리며 완성된다.


흔들린다는 것은

불완전함이 아님을.

그것은 존재의 증명이며,

멈추지 않는 사유의 몸짓


개선문은 묵묵히 서서 시간을 지켜보고,

에펠탑은 쇠로 빚어진 곡선으로 질문한다.

강인함 이란 부드러움 속에서 살아남는 것,

흔들림 이란 무너짐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


센 강의 바람이 속삭인다.

너는 흘러가는가, 머무르는가?

나는 답한다.

흔들림 속에서 나는 나를 찾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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