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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어에 대하여 Jun 03. 2024

할머니 기억을 훔쳤다

#치매걸린할머니 #손녀 #콤비



근 십 년간 할머니 치매를 바라보며 알게 된 것이 여러 가지다.

그중 하나가 치매는 직선이나 완만한 곡선처럼 점진적으로 전개되지 않는 것이다.

치매는 계단식으로 전개됐다.


시시각각 지켜보고 있으면

한순간의 변화가 느껴졌다.

예를 들어

'어느 순간'부터 어제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어느 순간'부터 홈쇼핑 주문을 혼자 할 수 없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 잘 언급할 일 없는 사람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지 못하는 등


계단식으로 뚝뚝 인지 능력이 떨어진다.


그리고 뚝 떨어진 인지 능력 그 상태로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일 년 정도 상태가 지속되다

어느 순간 뚝- 다시 한번 더 인지 능력이 떨어졌다.






곁에서 변화를 몸소 체감하기에

언젠가부터 엄마와 통화를 하며 곧잘 이런 이야기를 했다.(할머니는 외할머니다.)


엄마 할머니가 또 좀 다르네~ 엄마가 서울에 좀 오면 좋겠네.

엄마 할머니 지난번이랑 또 달라.

엄마 할머니 이제는 혼자 밖에 나가시면 안 될 것 같아.

아빠 할머니한테 인사 한번 드리러 오면 좋겠어.


한두 달에 한 번씩 엄마는 서울에 찾아왔지만

변화는 엄마가 서울에 있는 동안 찾아오지 않았다.

예고 없이 불쑥 왔다.






할머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 메이트였다.

우리는 제주도, 일본, 대만 등 둘이서 여행을 잘 다녔다.


할머니는 불호도 별로 없고, 고집도 없는

고상한 노인이었고

내게 한없이 자상한 사람이었기에

나는 엄마보다 할머니랑 여행 다니는 걸 더 좋아했다.


여행에서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은

할머니와 앳된 손녀 콤비에 관심을 가지고 친절을 베풀었기에

여행은 더 순조롭게 기억된다.


할머니도 내가 편한 손녀였기에 나랑 다니는 걸 좋아했다.

홈쇼핑에서 여행 상품이 나올 때면

나를 불러 우리 저기 갈래?

너무 좋네. 우리도 여행 가자~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나는

응 할머니 좋네! 다음에 가자~

오 좋은데? 할머니가 돈 내줄 거야?ㅎㅎ라고 넘겼다.

나는 직장인이었고

돈도, 시간도 제한적이었으니






그리고 20년 1월 정도에 할머니와 상하이 여행을 계획했다.

상하이 디즈니랜드를 다녀올 셈이었다.

돈도 시간도 적당한 곳이었다.


우리 할머니는

여기 온 사람 중 제일 나이 많은 사람일 거야!라는 찬사를 매우 좋아하셨다.

상하이 디즈니를 다녀온 가장 나이 많은 한국 사람으로 만들어 드릴 생각이었다.


여행에 엄마는 우려를 표했다.

할머니가 디즈니랜드를 어떻게 가시니..

너 지금 할머니 연세를 자각하고 있는 거지?

이제 그렇게 못 걸으셔~


아니 엄마! 내가 무리하지 않고 모시고 다닐게!

그리고 이번이 진짜 마지막 해외여행일 거야

언제 또 가시겠어.






엄마의 우려는 길지 않았다.

우한발 바이러스라는 게 빠르게 전 세계로 퍼졌고

중국은 여행 기피 1순위가 되었고

많은 공항이 폐쇄되었다.


야심 찬 마지막 해외여행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인생만사가 그렇지 뭐-


to 여행 좋아하는 우리 할머니

내가 딱 한 군데만 더 모시고 가려고 했는데

못했어.

이제는 집 밖에 나가는 것도 귀찮아하시네

미안해.

그래도 나 같은 손녀 없지?




이제는 치매 노인과 노처녀 손녀 콤비로 진화했다.

할머니 우리 남산이나 산책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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