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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공간 Jan 19. 2022

우리나라의 달동네

 달과 별이 잘 보이는 동네.



아름답고 아픈 그 시절의 이야기, 달동네


 낡고 오래된 동네는 왠지 모를 포근함과 애틋함이 공존한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오랜 동네는 왠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뛰어노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젊은이들은 떠나고 중, 장년층만 남아버린 곳이지만 자꾸만 어린아이들을 상상하게 한다. 웃음을 잃은 거리가 쓸쓸해 보였기 때문일까. 평화로워 보일지 몰라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삶을 이어가기 위한 몸부림이 애처롭게 보이기도 한다.


 달동네는 가난한 이들이 도시의 산비탈 등 외진 고지대에 판잣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되었다. 달동네라는 명칭은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중반 사이에 도심에서 쫓겨난 판자촌 주민이 정부가 정한 지역에 임시 천막을 치고 살면서 방에 누우면 밤하늘의 달과 별이 보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또한, 달이 떠있는 시간에 출근하여 달이 보며 퇴근하는 고된 삶을 뜻한다고도 한다.

 이 용어가 널리 쓰인 것은 1980년 TV 일일연속극 <달동네> 방영 이후이다. 어려운 처지에서 보듬고 살아가는 달동네 사람들의 애환을 그린 연속극 '달동네'가 큰 인기를 누리면서, 이후 ‘달동네’는 불량 노후 주택이 모여 있는 산동네의 대명사가 되었다. 아름다운 이름과는 달리 참으로 서글픈 뜻이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을 대변하는 알맞은 아름다운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치열하게 살아내는 삶과 평화로워 보이는 달동네. 그러나 치열함이 곧 평화일 수도 있다. 그들은 평화를 위해서 매 순간 노력해야 했기 때문이다.


 달동네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경제개발이 급속하게 추진되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라 할 수 있다.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한 만큼 달동네도 늘어났다. 일자리를 찾아 시골에서 도시로 모인 사람들은 높은 집값에 저렴한 터전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달동네 불량주택은 1961년 8만 4,440동에서 1970년 18만 7,500동까지 크게 늘어났다.

 경제개발과 맞물려 달동네가 성장했다는 것이 조금은 슬프게도 들린다. 분명히 몰려드는 사람들이 많으니 아파트 같은 주거 형태의 집을 많이 지었을 텐데 달동네가 존재하니 말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국적으로 달동네 재개발이 이루어졌다. 산비틀에는 판자촌이 아닌 대형 아파트들이 들어섰고 그 결과, 남은 달동네들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이다. 많고 많았던 달동네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거나, 오래된 삶의 터전이 사라지는 것을 반대하며 갖은 방법으로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지금부터 역사 속으로 사라지거나, 여전히 존재하는 우리나라의 달동네들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달동네, 아미동


 부산 아미동은 일제 강점기 시절의 일본인 공동묘지였던 곳에 6·25 전쟁 이후 임시 수도가 된 부산에 많은 피난민이 정착하면서 자연스럽게 달동네가 형성된 곳이다. 그 옆에는 평범한 달동네를 관광지로 바꾼 김천문화마을과 인접해 있다.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이 유명해진 이유는 바로 이 묘지 위에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이다.


 묘지 위에 산다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절 몸 뉘일 곳이 절실했던 이들에게 묘지가 무슨 대수였을까 싶다. 집을 짓기 전 유골은 제를 지내고 근처 절에 모시기도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는 2021년 도시 재생 사업 공사를 진행하다가 귀신을 목격한 인부들이 다수 발생해 위령제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공동묘지 위의 마을이라는 것을 더욱 실감 나게 하는 것은 바로 계단이나 담장에 실제로 비석들을 디딤돌과 주춧돌, 옹벽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실제 이 동네를 돌아다니다 보면 그 옛날 일본 전통가문의 문장이 그대로 남아있는 비석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지금은 독특한 마을의 이야기와 아기자기한 벽화들로 부산의 관광지로도 사랑받고 있는 달동네가 되었다. 죽은 사람들을 위한 묘지가 다시 살기 위해 존재하는 마을이 되었다는 게 인간의 윤회사상을 떠오르게 한다. 우리는 모두가 죽겠지만, 또 생기를 가지며 새롭게 살아낼 것이다. 활기차게 부활한 아미동처럼.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으로 재현되다, 송현동

 

 수질이 좋지 않았던 인천에는 1906년 송림동에 수도국이 생긴다. 1908년에는 송림산 꼭대기에 수돗물을 담아두는 배수지를 설치하며 이곳을 수도국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과 중국인에게 일자리를 뺏긴 사람들이 수도국산 일대 송현동과 송림동으로 모여들면서 자연스레 달동네가 형성되었고,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피난민들이 또 몰려왔다. 그리하여 60~70년대 송현동에는 달동네가 형성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무것도 없어서 더욱 똘똘 뭉쳐 살았던 동네였다. 인천 동구는 1999년부터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달동네를 철거하기 시작했는데 수십 년간 살아온 삶의 터전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주민의 건의로 지금의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이 탄생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일자리를 뺏긴 사람들의 터전이었지만 정을 붙이고 살았던 주민에게는 허름한 동네가 가장 큰 자랑거리이자 자산이었을 것이다.


 이런 배경으로 박물관을 둘러보면 실제 주민의 모습이나 사용했던 생필품들이 고스란히 전시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때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가게들과 생활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아이보다 어른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은 가족들과 함께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어른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으로 지금의 아이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고, 부모님의 어릴 적 존재했던 모습을 보며 신기해할 것이다. 그러니 온 가족이 함께 방문해 그 시절의 향수를 가득 느껴보는 것이 어떨까. 



한강변 노른자땅 달동네, 금호동

 

 대장간이 많아 대장장이의 마을이라고도 불렸던 금호동은 종로 등의 도심과 가깝고 한강을 끼고 있다. 서울 대표 부촌인 압구정과 마주하고 있는 금호동은 탁월한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였다. 서민의 애환을 담은 드라마 '서울의 달'의 배우 한석규가 떠돌았던 달동네의 배경지이기도 하다. 이곳의 특징인 비탈길에는 채소밭과 복숭아가 나는 과수원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일제 징용으로 끌려가 전쟁 재난을 입었던 사람들이 돌아와 정착한 이곳에 달동네가 생겨났고, 백범 김구 선생이 금호동 전재민 마을에 집과 청소년을 가르치는 백범학원을 짓기도 했다. 하지만 그 흔적은 한국전쟁 중에 사라지고 기념비만 남아있다. 한국전쟁 중 우리나라의 큰 자산이 사라졌다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 전국적으로 재개발이 한창일 당시, 금호동은 1990년대 초반부터 재개발이 본격화되어 달동네의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현재는 고급아파트 단지들이 달동네를 메우고 있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

 서울의 동북쪽 끝 불암산 자락에 있는 이곳은 주소가 노원구 중계동산 104번지라서 백사마을로 불린다. 1968년 개발을 이유로 청계천 등의 판자촌에서 살던 사람을 강제 이주시켜 정부에서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초기 형성 시에는 어설픈 판자촌이었지만 10년 후인 1978년경 마을 같은 모습이 갖춰졌다. 시장통이 형성될 만큼 붐볐던 거리, 물 공급도 원활하지 않아 공동 우물을 길어 쓰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 간의 유대가 끈끈하여 함께 그 시절을 버텨낼 수 있었다. 현재는 1,200여 개의 집이 있지만, 절반 이상이 빈집이다. 오래전부터 추진해온 재개발이 올해 착공 예정이라고 한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도 이렇게 곧 사라질 예정이다.


 작고 발전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오히려 단단히 뭉쳤던 시절이 그립다. 현재의 주거형태에서 찾기 어려운 풍경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달동네 골목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니 아쉬운 마음에 적적해졌다. 그들과의 직접적인 만남조차도 없었지만 그들의 유대가 어떤 의미일지, 어떤 행위일지 대충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골목길을 보존하며 아파트와 주택이 결합한 개발 방식으로 추진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달동네의 옛 모습 그대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달동네를 보며 가장 많이 느꼈던 것은 아팠기에 행복했을 것이라는 거다. 어쩔 수 없이 달동네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지만, 이웃들의 유대와 작은 동네 안에서 똘똘 뭉쳤을 그들이 한국인의 정을 그대로 나타내주는 것 같다. 활발해야 할 거리가 생기를 잃고 도시의 외관을 망친다면 재개발을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달동네의 정겨운 풍경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다신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우리나라의 달동네, 아프면서 따뜻한 곳이다. 반짝이는 도시에 가려 그림자처럼 보였겠지만, 그 그림자 속에는 더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 로컬스트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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