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아니 20년도 더 된 이야기다. 친구들이 H.O.T에 빠져 내가 희준 부인이다, 너는 강타 가져라라는 싸움을 심심찮게 할 때, 신화에 빠져 주황색 우비를 쓰고 교실 뒤편에서 격렬한 춤을 출 때, 그들은 느끼지 못했겠지만 나는 그들에게 차가운 경멸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 밤마다 라디오 주파수를 맞췄다. 밤 12시에 맞춰 정신이 깨어났다. 처음 들어보는 가수의 이름과 미처 받아 적지 못한 제목의 노래들을 들었다. 하지만 잠들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DJ 유희열이었다. 얼굴도 몰랐다. 오로지 내가 아는 것은 그의 목소리 뿐이었다. 그의 조곤조곤하고 다정한 말투, 그리고 산발적으로 터지던 웃음소리 같은 것들. 매일 밤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뿐인데도 어쩐지 나는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정승환이라는 가수에 대해서도 K팝스타에서 '사랑에 빠지고 싶다'를 불렀었고 안테나 소속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 정도의 관심도 결국은 유희열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그런데 라디오를 진행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밤 12시의 라디오는 나에게 특별한 추억있었고 그래서 기대치가 높기에 조금만 받아들이기 어려워도 아예 관심 밖으로 밀려날 수도 있었다.
오래 라디오를 들으면서 자란 사람으로서 감히 판단해 보면 라디오만큼 그 사람 자체를 속이기 어려운 매체도 드물다. 무대에서는 연기를 할 수 있지만 오히려 얼굴도 보이지 않는 라디오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초반에는 써진 원고를 그대로 읽고 어느 정도 자신을 속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매일매일 진행하는 라디오에서 2시간 동안 자신의 본 모습을 원고와 정해진 리액션에 가둘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결국 본심이 튀어나오는 순간이 있다. 자신을 고백하게 되는 찰나가 있다. 무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민낯을 본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순간 청취자들은 심리적 친밀감을 느끼기도 하고 괴리를 느껴 떠나가기도 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매력'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제 와 고백해보자면 나는 오프닝을 듣는 순간부터 무너졌다. 이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구나. 24살의 이 청년은 나를 자꾸 아주 오래 전의 어느 늦은 밤으로 데려다 놨다. 예전에 진행했던 라디오를 찾아 들으면서 내가 알게 된 이 사람의 모습은 이렇다. 그는 사람들의 사연에 입에 발린 위로나 공감을 보태지 않고 뜸을 좀 들이더라도 충분히 이해한 후에 말을 보태려 했다. 그가 말하는 잔망과 교태가 더해진 유머를 잘 구사했고, 예의를 갖추면서 솔직했다. 일테면 어느 날 사연의 주인공이 자신은 이 방송을 늘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고, 숲디도 그렇냐고 물었을 때 으레 '그럼요! 저도 늘 그런 마음으로 라디오를 하러 오고 있어요.'라고 대답할 수도 있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처럼 그렇게 설레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라디오를 하면서 이 안에서 위로를 받고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는 대답을 했다. 사람들은 자신을 좋아해 주는 대상 앞에서 그 대상이 떠나갈 것이 두려워 애써 자신을 포장하려 한다. 뒤돌아서 지치고 씁쓸한 표정을 지을 수는 있겠지만 앞에서는 솜사탕 같은 얼굴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저런 대답을 들으면 어쩐지 안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앞면밖에 볼 수 없지만 적어도 자신을 꾸미느라 지나치게 무리하고 있지 않구나 하는 안도감 같은 것이 생긴다. 그 괴리가 클수록 사람은 망가지기 쉬우니까.
라디오를 듣고 그가 부른 노래를 찾아들었고, 그다음에 유튜브를 통해 영상들을 챙겨 봤다. 그 이후에 콘서트를 가게 됐다. 14일만 예매했었는데 고민하다 15일도 예매했다. 15일 공연을 보고 와서 나는 올 해에 가장 잘한 일로 15일 공연을 뒤늦게나마 예매한 일로 꼽겠다. 살면서 심장이 두근거리는 일을 만나는 게 쉽지 않다. 중, 고등학생 시절 체력장 이후로 이런 두근거림이 언제였지? 싶을 정도로 첫 등장의 순간에 미친 듯이 심박수가 올라갔다. 무대 위에서 3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그는 침착하고 유려했다. 아무리 오랜 기간 연습을 하고 리허설을 했다 해도 객석이 꽉 차고 사람들이 박수를 보내고 환호하면 자칫 흥분할 수 있다. 더군다나 20대고, 3년밖에 안된 경력이라면 잘하고 싶은 마음에 액션이 과해 지거나, 하지도 않아도 될 말을 보태서 미끄러질 수 있다. 그런데도 그는 과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밋밋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연습한 것에 충실하면서도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잘 대처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목소리만 듣던 대상을, 영상으로만 만났던 인물을 실제로 본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경험이었다. 피아노를 치면서 불러줬던 미완성 자작곡, 마지막 앙코르 무대까지 끝나고 인사를 전하면서 빠져나가는 사람들과 아직도 자신에게 인사를 보내던 사람들, 무대 위 자신이 서 있던 자리까지도 하나하나 담으려고 천천히 시선을 옮기 던 모습, 아쉬운 마음에 한번 더 온몸으로 불러 준 노래 한 소절 같은 것은 콘서트에 가지 않았다면 경험해보지 못했을 것들이다.
그는 어쩌면 얼떨떨할지도 모르겠다. 이 무대에 서 있는 것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이토록 환호하고 있는 것이. 나는 부끄럽지만 그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썼는데 이런 말을 썼다.
... 우리는 당신을 좋아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그 자체로 너무 행복하고 좋아서 사랑을 보내는 것도 맞아요. 누군가를 좋아할 때 사람들은 빛이 나잖아요. 살아있다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빚진 마음 없이 노래해주세요.
한번 이렇게 깊은 사랑을 보낸 대상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결코 잊을 수는 없으니까, 사랑의 표현은 뜨겁지 않고 따뜻할 수는 있어도 결코 아예 없던 일이 될 수는 없으니까 아주 오래오래 이 가수를 사랑하고 응원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