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없는) 슬기롭지 못한 의사생활

by 김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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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상하다. 어제 나는 그야말로 속상했다. 왜 이렇게 했을까? 작가와 감독이 그린 그림과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꼭 이래야만 했을까? 여러 가지 아쉬움이 남았다. 아쉬움이 얼마나 크냐면 이걸로 뭐라도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


신원호 PD와 이우정 작가가 만들어 내는 세계를 좋아한다. '응답하라' 시리즈부터 '슬기로운'까지 모든 드라마를 꼬박꼬박 챙겨봤다고 말할 순 없지만, 한 번 보면 그대로 붙들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이들이 그려내는 세계에 기대감을 갖게 한다. 지금까지 나온 모든 드라마들이 이만큼 사람들의 반응을 얻고 관심을 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임에는 분명하다. 그런데 늘 아쉬운 것은 후반부로 갈수록 생기는 캐릭터의 붕괴다. 11회까지 올 동안 켜켜이 매력 발산을 해서 시청자들의 마음을 얻도록 한 다음 단 몇 분 만에 캐릭터를 와르르 무너트려 버린다.



어제 가장 마음 아팠던 인물은 안치홍이다. 이 캐릭터가 내 마음을 설레게 하고 움직이게 한 것은 이 사람이 가진 진중함과 예의바름이었다. 채송화 교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세심하게 살펴서 선물하고, 다른 사람들은 비가 온다는 핑계로 가지 않은 캠핑에도 치홍은 말없이 나타났다. 그녀에게 자꾸만 들켜버린 마음을 고백하게 됐을 때도 치홍은 예의 있었고 그렇게 티가 나버린 마음을 사과했다.

그런데 어제 안치홍의 모습은 뜬금없이 박력 있는 연하남을 표방하거나, 익준에 대한 질투, 불안 때문인지는 몰라도 과한 거리 좁힘으로 도리어 내 마음을 멀어지게 했다. 소위 남자다움을 표시하는 방법으로 느닷없이 반말을 하거나, 어깨를 툭툭 치는 모습은 그동안 치홍이 보여줬던 매력의 가장 대척점에 있는 것이다. 제작진들이 치홍과 송화는 연결될 수 없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시청자들이여 이제 치홍에게 정을 떼라'라고 보여 준 장면이라면 납득이 가지만 왜 그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그야말로 만능 캐릭터인 이익준도 그렇다. 수술이면 수술, 노래면 노래, 대인관계면 대인관계 부족한 것 없이 똑 부러지게 하는 이익준이다. 남의 사랑까지도 센스 넘치게 챙기는 그런 익준도 자신의 사랑 앞에서는 망설이고 주춤하고 미숙하다는 설정 자체는 충분히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어제의 취중고백이라던가, 술자리에서의 게임을 통한 두 남자의 기싸움이라니. 20대 초반도 아니고 40대다. 어른이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 와중에 채송화는 어제 드라마 내내 부담스러움인지 난감함인지 모를 얼굴로 양 쪽 남자들을 살피기 바빴다.

아니 왜??? 채송화 교수는 귀신이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로 프로페셔널하고 깔끔한 인물 아니었나? 왜 이런 상황에서만 이렇게 어쩔 줄 몰라하는 캐릭터로 그려질까?


그래서 두 남자들의 고뇌가 깊다는 것을 표현하는 치홍이 당직실에서 첫 만남을 회상하는 장면이라던가 익준이 볼이 빨갛게 술에 취한 채로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들의 효과가 반감됐다. '내가 송화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내 사랑은 한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이렇게 오래된 감정인데!!!'를 표현하고 있는 두 남자에게 정작 가장 중요한 사랑의 대상에 대한 예의와 배려가 보이지 않았다. 니들 사랑만 중요하냐?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 건 그래서 작가의 슬기롭지 못한 캐릭터 사용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런 걸 보려고 했던 게 아닌데 싶어서 소리를 뮤트 하길 여러 번이었는데 나의 최애 커플 윈터가든에게마저 어제는 시련이 있었다. 드디어 첫 수술을 집도하고 두 사람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을 터트리는 장면까지는 설레고 좋았다. 그런데 그 장면을 정로사가 보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 것 까진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마지막에 장겨울을 불러내서 눈물까지 흘리며 내 아들을 붙잡아 달라고 표현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절박한 엄마 마음에 그랬다고 할 수 있지만 안정원이 마흔 살이고 장겨울이 스물아홉 살이다. 이들은 너무 어른이다. 자신들의 진로나 사랑에 부모가 개입해서 방향 조정이 필요한 나이가 아니다. 꿈도 사랑도 혼자 결정할 수 있다. 장겨울이 정로사의 부탁으로 그'래! 결심했어! 다시 한번 용기 내보는 거야!'라는 설정이라면 그동안 '당당당'의 상황이 와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책임감 있게 자신의 일을 해 낸 겨울이의 캐릭터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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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신원호 PD와 이우정 작가가 그려 내는 세계야말로 어벤저스 뺨치는 유토피아, 판타지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유능하고 사람 냄새 진하게 나는 사람들이 일과 사랑, 사랑과 일에도 이렇듯 진심인 세상, 흠결이라고는 그저 밥을 좀 심하게 빨리 먹고, 싹수없는 말투 정도인 세상은 정말 만나기 어렵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드라마가 현실적이고 사람 냄새가 난다고 하는 것은 배우가 가진 매력에 많이 기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5명의 배우가 혼신의 힘을 다 해 이 캐릭터들이 현실에 발붙인 사람처럼 보이게 했기 때문에 그나마 유니콘적인 이들의 존재가 이 세상 어딘가에 한 두 명쯤은 있겠지 믿어보는 것이다.

다만 어제 11화를 보고 깨달은 것은 아무리 배우의 매력과 카리스마가 흘러넘쳐도 가이드라인은 작가와 PD가 잡아주는 것이라는 거다. 원래 가지고 있던 캐릭터의 힘과 매력을 붕괴시키는 순간마저도 배우들의 매력으로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그래도 사랑받게끔 알아서 해주겠지 기대는 것은 너무 안일한 태도였다.




이제 겨우 최종화만 남았다. 시즌 2가 나온다는 얘기도 들었다. 시즌제로 만들기 좋은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이 인물들에 대한 배경과 서사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우왕좌왕하는 것도 인생사라고 한다지만 상황 따라 너무 달라져버리는 캐릭터에 마음을 주기란 쉽지 않다. 언젠가 사람들이 남편 찾기에만 너무 집중해서 안타깝다고 했던 인터뷰를 봤던 기억이 난다. 사실 이 드라마는 사람 사는 이야기,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메인인데 시청자들은 남편 찾는 일에만 관심을 둔다고. 그건 무책임한 말이지 않을까? 시청자는 감독이, 작가가 보여주는 대로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TV로 송출되는 것 외의 정보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시청자가 의사로, 환자로, 병원에 근무하는 직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겨우' 러브라인에 가장 큰 관심을 둔다면 그건 그렇게 보이도록 만든 감독의 깜냥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도 그들이 그려내는 세계가 재밌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안타깝고 서운할 일도 없다. 이렇게 긴 글을 남길 이유도 없다. 그들이 그려내는 인물들이 너무 매력 있고 마음을 주기에 충분하기에 좀 더 그 매력을 오래 간직해주길 응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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