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9월 13일. 영화 접속이 개봉한 날이다. 무려 23년 전의 영화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이 중학생 때였을까? 고등학생 때였을까? 확실히 성인이 된 후는 아니다. 오늘 나는 이 영화를 다시 봤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 들만큼, 혹은 더 나이가 든 지금.
어릴 때 이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과 오늘 내가 느낀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봐도 여전히 눈을 뗄 수 없었고 2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제는 동현(한석규)과 수현(전도연)의 감정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할까?
다른 멜로 영화와 다르게 이 영화는 두 주인공이 처음으로 서로 마주 보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이 그 이후에 사랑을 시작했는지, 아니면 동현은 원래 계획대로 호주로 이민을 떠났는지 알 수 없다. 그 유명한 사라 본의 A Lover's Concerto가 마지막에 깔리는 것으로 우리는 동현과 수현에 대해 희망적인 엔딩을 기대해보는 것이다.
PC 통신으로 만난 두 사람은 이름이 아닌 [해피엔드]와 [여인 2]로 대화를 나눴다. 가장 가까운 사이에도 할 수 없던 얘기도 얼굴을 모르니 더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아픈 충고도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응원도 서로 얼굴을 모른 채로 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은 매일 얼굴을 보는 현실 속 사람들과는 끊임없이 어긋나고 상처 받는다.
이 영화를 보면서 새삼 깨닫게 된 것은 90년대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진지한 정서 같은 것이었다. 이를테면 요즘에 자주 생략되는 어떤 생각하는 시간 같은 것들, 아니면 허세라고 이름 붙이는 취향 같은 것들이라고 해야 할까? 영화는 끊임없이 혼자 생각하는 동현과 수현을 보여준다. 창문에 기대 창 밖을 바라보는 동현, 차를 몰고 드라이브를 하면서 생각에 잠긴 수현, 담배를 피우며 끊임없이 걷는 동현, 책상이나 의자에 걸터앉아 고민하는 수현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요즘에 나오는 영화라고 한다면 많은 부분 잘려나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느릿느릿한 사유의 과정이 반가웠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 하나를 정하는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리니까. 아무리 다짐해도 쉽게 잡히지 않는 어떤 마음들이 있으니까. 그걸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았다. 왜 이렇게 우유부단해! 빨리빨리 결정하지 못하고! 책망하지 않는 느낌이랄까?
영화는 끊임없이 좋은 음악들을 들려준다. 덕분에 OST 앨범으로 70만 장이 나간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 물론 우리 집에도 이 CD가 있었다. 그 많던 좋은 CD들이 이사를 거치면서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가장 아쉽다.) 영화에 등장하는 노래들은 하나같이 낯선 가수와 생소한 제목의 노래들이었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벨벳 언더그라운드라는 그룹을 알게 됐다.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대사가 많은 편이 아닌데 그들이 할 말을 음악이 대신해준다. 그리고 충분히 그 음악들로 설명이 됐다. 그들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과 기분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선택을 기꺼이 할 수 있는 시대적 특징이 좋았다. 지금은 그런 마이너 한 취향을 자꾸 드러내는 것을 허세를 부린다고 욕할지도 모르겠다.
한 번 보고 좋은 영화로 기억에 남았으나 계속 돌려볼 수 없는 종류의 영화들이 있다. 나에게 접속은 그런 영화 중에 하나였다. 뭔가 보고 나면 마음이 너무 쓸쓸해졌다. 심지어 마지막은 해피엔딩이라고 해도 좋을 텐데도. 그래서 영화에 나왔던 노래는 가끔 찾아들어도 영화를 다시 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이 영화를 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시 봐도 좋았기 때문에 오늘 이 느닷없는 선택이 더 뿌듯했다. 90년대를 살아 본 사람들이라면 그저 영화에 등장하는 단성사나 피카디리 극장 같은 90년대 종로 풍경이 자주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추억을 되살리게 만들어 줄 것 같다. 서울에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종로에 한 가지 추억씩은 가지고 있을 테니.
접속의 쓸쓸한 분위기 때문에 이 영화가 한 겨울이 배경인 영화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이 영화의 배경은 완전히 초여름과 한여름을 관통하고 있었다. 더위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에 본다면 더 잠들 수 없을 영화 '접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