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아이보리 특별전 - 전망 좋은

by 김밀

영화나 책을 보지 않았어도 이 제목은 한 번쯤 다들 들어봤을 것 같다. '전망 좋은 방'. 나도 제목은 너무나 익숙했지만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시네큐브를 검색했다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특별전을 하고 있는 걸 봤다. 얼마 전에 재개봉했던 모리스가 있었고 이 영화도 있었다.

영화의 주인공인 루시는 헬레나 본햄 카터가 연기했다. 헬리나 본햄 카터 하면 팀 버튼 영화에서 특수 분장에 가까운 화장을 한 모습이나 신기한 코스튬을 한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아무리 30년도 더 된 영화라고 하지만 이런 고전적인 영화에서 그녀의 모습은 어떨까? 궁금했는데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놀라고 말았다.

마치 그 시대에 사는 사람처럼 그녀의 귀여운 이목구미와 전체적인 분위기가 영화에 너무 잘 어울렸다. 타인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다부지게 자신의 미래와 나에 대해 고민하는 루시의 캐릭터와 그녀의 얼굴과 딱 맞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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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고 싶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이 영화에 피렌체가 배경으로 나온다는 것도 있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 언제 다시 가볼 수 있을지 기약 없는 그 도시가 나온다. 냉정과 열정사이 탓인지 피렌체는 다분히 낭만적인 도시 같은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내가 처음 방문했던 피렌체는 나에게는 낭만과 거리가 멀었다. 나는 그곳에서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더위를 만났는데 탈수 직전에 숙소로 들어와 거의 밖에 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도망치듯 피렌체를 떠난 것이 내가 피렌체에 가진 인상 전부였다.

진짜 피렌체를 만난 것은 두 번째 방문에서였다. 선선하고 좋은 날씨 때문에 드디어 피렌체의 거리와 그 유명한 두오모 성당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피렌체에는 도심을 내려다볼 수 있는 멋진 언덕들이 있었다. 혼자여도, 둘이어도 충분히 낭만에 젖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그때부터 그 도시는 내 마음에 깊숙하게 들어왔고 현실로 돌아와서도 붉은색 지붕의 피렌체 전경 사진만 봐도 마음 한구석이 아련해지곤 했다.


루시와 조지도 내가 걸었던 그 피렌체 광장과 골목을 걸어 다닌다. 이 사람에게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서로를 자주 바라보고 아름다운 언덕에서 첫 키스를 나눈다. 루시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먼저 인정한 것은 조지였다. 하지만 루시는 다른 사람과 약혼을 한다. 그녀와 약혼한 세실은 그야말로 책만 읽고 여자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결혼 소식에 그녀를 떠나려고 했던 조지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루시는 결단을 내린다.


영화는 시대적인 배경 탓에 많은 부분 고전 연극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문어체의 대사들과 과장된 감정 표현들이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렌체의 풍경과 분위기, 사랑에 빠지는 이 두 사람이 너무 아름답다.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은 확실히 시적인 영화에 강해 보인다. '남아있는 나날', '모리스', '전망 좋은 방'도 그렇지만 가장 최근작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만 봐도 아름다운 영화에 특화된 감독임을 알 수 있다.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평일 낮에 시네큐브에서 영화를 본 일이 몇 번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때마다 관람객의 연령대가 꽤 높은 것에 놀라곤 한다. '아이 엠 러브'를 봤을 때는 중년 여성과 남성이 단체로 영화를 보러 온 듯 영화관이 꽉 찼었다. 코로나 때문에 과연 낮에 몇 명이나 있을까 (우리 동네에서는 몇 번째 나 혼자 영화를 보고 있다.) 싶었는데 객석의 1/3 정도는 채워져서 놀랐다. 수녀님들도 계셨고 혼자 오신 여성분들도 꽤 있었다. 대개 50,60대이신 분들이었다. 예전을 생각해 보면 이 영화가 오래된 영화이기 때문에, 젊은 시절 본 영화에 대한 향수 때문에 오신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저 시네큐브라는 곳에서 평일 낮에 영화를 즐기시는 어르신들이 꽤 많은지도 모르겠다. 이른바 다양성 영화를 자주 상영하는 이 극장을 자주 찾는 어르신들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동경의 마음이 생긴다. 나도 나이가 들어도 시네큐브를 찾아야지, 끊임없이 많은 영화들을 찾아보고 관심의 끈을 놓지 말아야지.


시네큐브에서 영화를 봐서 좋은 점 중에 하나는 정동길을 거쳐 덕수궁 돌담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선선한 바람이 불어 기분 좋게 길을 걸었다. 여름의 햇빛을 먹고 한껏 크고 푸른 나무가 우거진 너무나 익숙한 그 길을 천천히 걸었다. 영화의 장면들도 떠올리면서. 영화를 곱씹어보기에 아주 좋은 코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