뷸효녀의 명절은 정직 대신 은밀, 다정 대신 봉투
누구에게나 존재만으로 기쁨인 시기가 있습니다. 눈, 코, 입이 어찌나 사랑스러워서. 손가락 발가락이 어찌나 영특해서 엄마 아빠의 자랑이고 흡족함이죠. 잠 잘 자는 게, 밥 잘 먹는 게 효도인 때가 있습니다.
그로부터 이십오 년쯤 지나면 기쁨들은 갖은 방법으로 불효를 저지르게 됩니다. 이러고 있는 걸 알면 엄마가 뒷목을 오백천 번 잡을 텐데. 엄마 아빠에게 감춘 수많은 비밀은 제 가장 큰 배려에요. 알아 봤자 혈압, 모르는 게 평화.
설날 아침은 고요했어요. 차례는 지난 주에 미리 다 끝냈고 엄마 아빠는 등산을 갔어요. 저는 모자를 눌러쓰고 붐붐마트 앞 ATM 기계에 다녀왔어요. 회사가 왜 이렇게 밤을 많이 새냐, 고 걱정하시는 엄마 아빠에게 진실이라는 불효 대신 봉투를 드리려고요.
오만 원짜리가 다 떨어진 ATM 기계에서 삼십만 원을 뽑아 둘둘 말아 쥐고 돌아왔어요. 만 원짜리로 뽑기를 잘 했어요. 봉투가 두둑하니까 괜히 많아 보이잖아요. 생기와 젊음, 낙관과 긍정을 써가며 번 돈. 지난 주에 애인한테 소고기 산다고 십오만 원이나 썼는데, 엄마 아빠 봉투에는 십만 원씩밖에 못 넣었어요. 제가 아까 불효녀라고 말했잖아요.
명절의 불효녀는 봉투를 통해 스스로를 기만하고 용서해요. 명절의 엄마 아빠는 봉투를 통해 잠시 망각할 수 있죠. 뜻대로 원하는 대로 안전한 길로 가지 않는 딸내미, 해외여행 보내주는 친구의 아들딸, 부모에게 순종했던 과거의 자신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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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봉투 십만원
아빠 봉투 십만원
여동생 봉투 오만원
남동생 봉투 오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