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의 안전과 신뢰의 삶의 방식
바퀴 달린 장바구니에 파뿌리와 각종 식료품을 바리바리 담아 힘겹게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는 할머니를 도와드린 적이 있습니다. 최소 60대 이상 어머니들이 주로 사용하는 도구인데, 젊은이들 중에 이런 방식으로 장보는 사람을 본적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왜일까요? 부끄러워서 일까요? ‘나’를 잃어버린 아줌마 같아서? 초라한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일까요? 젊은 부부는 대부분 차를 가지고 대형 마트를 가기 때문일까요? 최근 몇 년 사이 새벽에 문 앞까지 신선 식품을 배송해주는 서비스들이 점점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부끄러움과 무거움과 힘듦은 모두 외주화 됩니다. 그렇다면 운송 및 택배 기사들은 수입이 늘어나니까 그걸로 모두가 행복해지는 걸까요?
한 가지 분명한 건 바퀴 달린 장바구니의 움직임 속에는 상당히 많은 우발적인 만남들이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몸의 움직임, 거리의 풍경, 협상과 거래, 물건을 담는 행위, 평지 보행의 상대적 자유로움, 친환경적 실천, 수고로운 땀과 운동효과, 우연한 친철... 이 모든 경험은 클릭 한 번으로 내용물이 집 앞에 도착하고, 수많은 포장용품을 분리수거하는 행위로 대체되었습니다.
아이들의 ‘놀이’도 이러한 현상이 반영되는 것 같습니다. 어린이의 삶에 우발적인 행위가 끼어들 여지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학원과 같이 목적이 있는 장소을 향해 차량으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교육 및 체험 서비스를 완료한 후 다시 집 앞으로 배송되어 돌아옵니다. 아이들은 우발적인 만남과 배움의 기회를 ‘안전’이라는 등가물(?)과 교환하였습니다.
물론 그만큼 보행이 위험하다는 인식이 커진 것도 사실입니다. 최근 아동 성폭행범이 복역을 마치고 대놓고 뻔뻔하게 피해 아동이 살던 지역으로 되돌아온다는 뉴스에 온 국민이 들끓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입니다. 위험한 인물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와 우리 아이를 해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차량에 의해 언제 우리 아이가 덮쳐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삶의 현장으로부터 보호막을 치게 합니다. 세상은 믿음직스럽지 못한 것들 투성입니다. 언제 어디서 위험에 처해질지 모릅니다. 결과적으로 어린이는 점과 점을 사이를 차량으로 안전하게 배송되는 기이한 풍경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반문을 해봅니다. 이러한 환경은 누구의 잘못과 책임인가요?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어떤 조치를 취하고 있을까요? 생각해보면 잘못한 것은 그 소수의 어른들인데 왜 피해자인 어린이와 그 보호자가 모든 두려움과 수치를 짊어지고 살아야 할까요? 무엇을 잘못했길래 세상에 대해 오감각을 닫고 수송 차량 안의 가축처럼 이동해야 할까요? 그 위험한 인물이 동네를 활보하는 동안 동네에 상식 있는 대다수의 건강한 어른들은 모두 어디에 있었을까요? 아이가 위험할 때, 소리 지를 때, 단번에 달려와 도와줄 어른은 정말 하나도 없는 것일까요?
어린이의 보행을 회피하는 우리 부모들은 무의식 중에 차량 운전자들은 모두 부주의하고 아동을 배려하지 않는 난폭 운전자로 간주하는 것일까요? 어린이가 보행 중인 동네에서는 당연히 속도를 줄이고 주변을 살피는 것을 상식으로 여기는 운전자가 그렇지 않은 운전자보다 많아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우리의 어린이 보호 행동은 마치 그 반대인 양 행동합니다. 우리 사회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라는 불신은 어디로부터 왔을까요? 기성세대들이 자랑해 마지않는 세계 경제 11위의 나라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라면 지구는 과연 사람이 살만한 곳일까요?
학교폭력, 성폭력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왜 가해자는 고개 들고 활보하는데 왜 피해자가 수치와 두려움으로 얼굴을 가리고 스스로 조심하며 살아야 할까요? 왜 아이들은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며 스스로 그림자처럼 도보 활동을 숨겨야만 할까요?
생각해보면 세상에 억울한 사람들 약자들은 모두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수치와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당당하게 활보하고 살아가는데 피해와 억울함을 당한 사람들은 거리를 활보하지 못합니다. 이런 억울함을 중재해주어야 할 공적 영역의 권위기관들은 무슨 역할을 하는 걸까요? 예를 들어 성폭력을 당한 피해 여성에게 사실관계 조사한답시고 왜 따라갔나? 왜 거부하지 않았냐? 먼저 유혹한 거 아니냐는 식의 취조하는 경찰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왜 부끄러움은 피해자의 것이 되어야 하는 걸까요?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 것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라는 것이 공정한 사회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대응방식과 문화는 그 반대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 이면에는 사회가 개인의 피해에 대해 무책임하다는 불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권위기관과 사회와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이야말로 우리 삶을 지탱하는 아주 근본적인 방식입니다. 비행기를 타는 것도 비행기가 자동차보다 안전하다는 믿음 때문에 탈 수 있습니다. 내가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교통 법규를 지키리라는 믿음 때문에 오늘도 운전을 해서 일을 보러 갑니다. 높은 다리와 교각을 지나가는 것도 이를 건설한 사람들과 관련 행정가들이 법규에 맞게 지은 것이라는 신뢰가 있기 때문에 다리 위를 달릴 수 있습니다. 머리 위의 전신주가 나에게 쓰러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전기 시설을 곁에 두고 살아갑니다. 믿음과 신뢰가 없으면 우리는 공황장애와 같은 극도의 불안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 역사에서 종종 일어나는 재앙과 같은 사고들이 우리의 믿음과 신뢰를 깨버렸습니다.
이러한 트라우마를 경험한 일반인들이 삶의 대응 방식은 정해져 있습니다. 권위를 신뢰하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을 믿지 않는 것, 각자도생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문제의 이면에 있는 우리의 심리 상태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심리상태가 지속되었을 때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불행이 닥치지 않도록 움츠리고 보호하며 살았을 때 우리는 정말 참 ‘안정’과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 대해 침묵하고 아이의 동선을 가리는 방식으로 문제에 대응하면 거리는 점점 더 신뢰할 수 없는 공간, 활보하기 위험한 공간이 되어 갈 뿐입니다.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 종족을 번식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이것이 저출산 현상*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수의 위험한 어른은 믿음직한 사회가 충분히 제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네에 건강한 상식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이 보는 눈이 많으면 일탈을 꾀하는 사람이 함부로 범죄를 저지르지 못합니다. 보통 범죄는 이런 ‘눈’이 없는 장소에서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사회에 신뢰라는 프로세스가 작동하지 않으면 감시와 처벌만 강화됩니다. 그러면 그만큼 회피하는 요령 또한 능수 능란해지기 마련입니다. 아이가 동네를 자유롭게 활보하되 그 아이는 여러 시선들 속에서 결코 혼자 다녀서는 안 됩니다. 그리 친하지 않더라도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들, 상식 있는 어른들이 활보하고 경제 활동하는 도보는 어떤 철저한 어린이 관리시설보다 더 안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저출산을 문제가 아니라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저출산은 기성세대 어른들의 시각에서 문제이지 당사자들에게는 문제가 아닙니다. 젊은이가 세금을 많이 부담해야 한다는 논리 또한 정말 젊은이를 위한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노인이 받을 몫이 줄어든 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저출산은 도리어 젊은 세대가 자신을 키워준 기성세대에게 사회적 신뢰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20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