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욱 개인전 작가노트
빈둥 ver.2.0
BINDOONG ver.2.0
최형욱
Choi, Heong-uk
2019.7.5(Fri)_2019.8.26(Sun)
김종영 미술관
서울시 종로구 평장 32길 30
02-3217-6485
www.kimchongyung.com
논다는 행위는 개인이 자신이 처한 환경에 적응을 도모하는 활동이다. 다른 말로 하면 놀이는 온갖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경계에 다가가고 경험을 하고 배우는 일이다. -귄터 벨리치(놀이터 디자이너)-
이번 “빈둥”프로젝트 작업은 놀이에 관한 것이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장소와 권리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본 인은 그동안 개인의 자유와 장소에 관련된 주제들을 탐구하는 작업들을 해왔다. 이번 작업은 그러한 탐구의 연장선 위에 있다.
장소를 만들고 장소를 표기하고 장소를 사용하는 문제는 중립적일 수 없는 행위이다. 철저한 힘의 위계가 작 용하는 자원이 바로 ‘장소’이다. 대표적인 예로 한 장소에서 어떠한 행위가 허락되고 안 되고가 누구에 의해 규제되는지를 잘 살펴보면 그 장소의 주권자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집안에서 가구 배치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 그 집안의 실제 권력자이다. 좀 더 확장하면, 마을은? 도시는? 국가는?
그래서 경제적으로 주도권이 없는 사회 구성원들은 자신의 자유를 위한 영토를 개발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측적 행동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 어른들은 차등적 비용을 지급하고 금기가 허락되는 일탈의 장소로 향하고 청 소년은 실사용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야간에 놀이터를 점령한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바꿀 수 있는 장소는? 아니 그럴 수 있는 시간은 있을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구성원일수록 장소와 시간에 대한 자기주장을 하기가 어렵다. 영화관에서 소리를 지르면 안 되는 것처럼 개인의 자유는 다른 이의 권리를 침범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사회적 합의에 따라 제약되는 때도 있지만 어른들이 중요한 담화를 나누고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행위가 금지되는 것처럼 철저히 위계에 의해 특정 행위가 금지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사회 구조가 느슨하고 전체적으로 가난하던 시기에는 집안은 좁았을 지라도 상대적으로 자유를 구가할 수 있는 지배권이 느슨한 영역이 넓었다. 예를 들면 본인의 어릴 적만 해도 아직 복개가 되지 않은 지방의 시궁창 하천 주변에서 굴러다니는 쓰레기 중 철 깡통을 주워 구멍을 뚫고 쥐불놀이를 하였다. 몇 년 후 그 하천은 복개되었고 시장 공영주차장이 되었다.
놀이란 자신의 환경에 적응을 도모하는 행위이다. 대부분 창조적으로 일 하는 사람들은 ‘놀고’ 있다. 주어진 자료를 주목하고 뒤집고 충돌시키고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해 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구조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것이 하나의 담론이 되고 양식이 되고 흐름이 된다.
어쩌면 기성세대 어른들이 어릴 때는 당연하게 누리던 자원들 (햇볕, 시간, 공터, 놀이, 자유)을 현재의 아이 들은 고부가 가치 사업이라는 미명 아래 비싼 비용을 지불해야만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교체되어 가는 아닌가 싶다. 흙탕물에 우의를 입고 몸을 담그는 것도 고비용을 주고 체험하는 예술교육 프로그램이 되는 식이다. 이는 예술교육현장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강사로 일하면서 느끼는 자기모순이다.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어른과 아이들은 급변하는 세상에서 창조적으로 적응을 도모하기 위해 발버둥 쳐야 만 한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빈둥거릴 시간과 적당히 이상한 짓을 해도 금지당하지 않는 비어있는 영토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어른들의 경제를 위한 시설 만들기가 아니라 사용자 스스로 자기 몰입과 충족을 위한 느슨한 열린 구 조의 놀이 모듈을 실험적으로 만들어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실험 모듈은 궁극적으로 공공영역에서 시민주도 의 놀이운동으로 연결될 것을 염두에 두고 제작되었다.
놀이가 가짜 놀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 몇 가지 기준을 가지고 구조를 만들고자 하였다.
첫째, 어른에 의해 행위가 규제되지 않을 것.
둘째, 적절한 위험을 스스로 감내하도록 기다릴 것.
셋째, 느슨하고 조작 가능한 공간 구조를 가질 것.
넷째, 스스로 행동에 스스로 책임을 질 것.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예측 불가능한 불안한 삶 가운데 인간이 환경과 자신을 통합하고 위험을 극복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이다. 많은 사람은 이러한 ‘황무지의 인간화’(Edward Ralph) 과정을 통해 세상의 위협에 저항하고 자신의 삶을 지탱해 나가는 힘을 얻게 된다.
폐허 위에서 장소를 전유하고 놀이를 상상하는 아이들의 눈이야말로 기댈 것이 없는 시대에 기대할 만한 오 래된 유산이 아닐까? 장기적으로 이 작업은 공유지에 시민사회 주도의 예술놀이 영토를 세우는데 목표를 두 고 있다. 자리가 없는 아이들에게 자리를 마련해주되 스스로 변형과 조작 가능하며 열린 결말의 연속된 경험으로서 위험들을 스스로 조금씩 극복해 볼 수 있는 그러한 영토를 마련하고자 한다. 기성품 산업과 어른들의 업적을 위해 존재하는 전형적인 공원이 아니라 장소를 스스로 만들어 보는 그러한 원형적 경험을 할 수 있는 영토를 지향한다. 그러한 장소는 독보적인 예술가 혼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실제 삶을 염려하는 상식을 가진 어른들과 그리고 공공기관의 후원과 일반시민들과 활동가들이 함께 모여 세워나가야 한다. 이번 작업은 그러한 공유지 개척 작업을 위한 첫 단추라고 할 수 있다.
20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