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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GWORK STUDIO 최형욱 Aug 08. 2023

원초적 놀이_호모 파베르 Homo Faber

무엇이 인간의 길과 동물의 길을 다르게 만들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이라고 말했고 혹자는 사회성이라고 이야기하고 혹자는 도구라고 이야기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자연 생태계의 사회적 상호시스템에 대해서 점점 많은 과학 정보들이 밝혀지고 있다. 또한 무언가를 만드는 재주 또한  인간 고유의 능력은 아니다. 비버의 건축술과 베 짜는 새의 정교함과 흰개미 집의 정교함을 보면 인간 건축가조차도 감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두 가지 점에서 인간과 차이가 있다. 


동물은 환경에 맞게 조상들로부터 어떤 유전적으로 강화된 특질을 물려받았다. 예컨대 추운 지망의 곰은 아주 풍성한 털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런데 이 곰은 갑자기 따뜻한 환경으로 옮겨지면 살 수가 없게 된다. 자기 몸의 털가죽을 스스로 벗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산악지대 비탈진 경사면을 자유롭게 다니는 산양은 바위 경사면에 올라가 포식자로부터 어느 정도 자신을 지킬 수 있지만  초원에 내려다 놓으면 곧바로 먹잇감이 된다. 동물 신체의 강화된 특성들은 특정 환경을 살아가는데 매우 유리하지만 이는 양날의 검이 된다. 


하지만 인간은 어디에나 적응하며 살고 있다. 물론 적응의 기술이 지역마다 다르긴 하지만 온대 지역에 사는 사람이 열대우림이나 빙하나 화산 지대 혹은 심해를 탐험하는 일은 종종 있다. 즉 어느 환경에 데려다 놓아도  모험심 강하고 탐구심 강한 인간은  살아남을 방법을 강구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취약한 몸의 구조 강한 피부나 털가죽을 가지지도 못하고 아가미도 갖추지 못한 이 연약한 신체적 특성 때문에 인간은 유연한 생존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반면 인간은 도구를 몸 밖에 지니고 있다. 동물은 몸에 도구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두더지는 고성능 삽을 앞다리에 항상 달고 산다. 쥐 또한 벽을 파낼 수 있는 이빨을 항상 입술에 지니고 다닌다. 맹수들은 강력한 발톱과 강한 송곳니를 몸에 지니고 다닌다. 하지만 이 또한 양날의 검이다. 동물은 노화로 인해 혹은 불의의 사고로 인해 그 인체에 담긴 도구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면 그 동물은 공동체로부터 버림받거나 생존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은 근육의 힘도 맹수나 고릴라 보다 약하고 물속에서 견딜 수 있는 시간도 어떤 수중 포유류에 비해 현저히 적다. 하지만 맹수와 고릴라를 포획하는 것은 인간이다.  강력한 삽도, 활공할 날개도 몸에 지니고 있지 않지만 인간은 그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바로 도구를 변형하고 개발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이 환경과 관계 맺는 방식의 차이점을 설명할 때 빅터 파파넥은 동물은 자기 조형적으로 (autoplastically)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인간은 자신의 요구와 욕구에 맞추어 이식조형적으로 변형시킨다고(alloplastically) 정의하고 있다.(p277) 동물은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의 신체를 환경에 적응시켜 변형시키는 반면 오직 인간이라는 종만이 지구 환경을 자기 자신에게 맞추어 이식하고 변형한다. 



도구를 만드는 호모파베르(Homo Faber)의 특성은 어린이들의 원초적 놀이로부터 발견할 수 있다. 

도구를 만드는 호모파베르(Homo Faber)의 특성은 어린이들의 원초적 놀이로부터 발견할 수 있다. 

빈둥 플레이에서는 무언가 가르치는 수업을 결코 진행하지 않는다.  플레이워커는 "자 오늘은 나뭇가지로 뭘 만들 거야"라는 식의 발문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생의 환경에서 자신들의 고유한 놀이와 실험을 해도 된다는 허용의 분위기를 만들면 어김없이 어린이들은 곳곳에서 자신들만의 공작 행위를 한다.  


누군가는 주변에 널브러진 죽은 나뭇가지를 주워 모아  집을 만들고,  볏짚 목재 등  흩어진 재료를 모아서 본부를 만든다. 그리고 삽질을 한다. 삽은 땅을 대하는 가장 첫 번째 도구이다. 제한을 두지 않으면 어린이들의 토굴은 점점 깊어지고 마침내 서로 연결된다.  그리고 남아들 같은 경우 버려진 폐목으로 누구와 싸울 건지 모르겠지만  검과 창 칼 등을  깍는다.  불과 2학년인데, 자신의 힘으로 끝까지 하겠다며 몇 시간을 집중해서 나무를 깎는 집중력을 보여 준다.  로프 끝에 나무를 갈아낸 이빨을 묶어 올가미 로프를 만든다. 하늘의 새를 향해 끊임없이 로프를 던지고 논다. 어린이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 무던하게 연마하고 갈아내고 만들고 연결하고 던지고 파내고 연습을 반복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습에는 필연적으로 솜씨가 필요하게 되고 스스로 배움을 찾게 만드는 과정이 수반된다.  나무칼을 좀 더 그럴싸하게 연마하고 싶은 어린이는 솜씨 좋은 선배를  찾는다. '이렇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돼요?" 그때 비로소 플레이 워커는 응답한다.  앞선 기량을 무심히 툭 선보여주고 다시 뒷짐을 지고 지켜본다. 


어린 사슴은 어미 배에서 나오자마자 걷고 뛸 수 있고 새는 가르치고 배우지 않아도 편대 비행을 할 수 있다. 동물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특정한 솜씨를 그 몸에 지니고 태어난다.  하지만 인간은 그 도구와 솜씨를 몸에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보고 배우는 과정 솜씨를 연마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도구를 소유하고 사용하는 능력을 선생과 부모와 선배로부터 배우게 된다. 


빈둥 플레이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는 모토를 가지고 있지만 실재로는 배움이 일어나는 역설적 현장이 된다.  다만 일반적인 교육 현장과 다른 점은 어른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배움의  과정을 미리  설계해 놓고 그 과정을 따라오도록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어린이 스스로 원초적 내적 욕구에서 출발한 요청과 이에 다른 선배들의 반응 발견과 발명의 방식으로 배움이 발생하게 된다. 


나는 스스로 모순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 나는 놀이는 효용성과 거리가 멀고 그 자체로 자기 충족적인 재미를 위한 것이라고 하위징아의 주장을 부연했다. 놀이는 예술과 같이 당장의 효용성은 없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삶을 윤택하게 기여한다고 빈둥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사실 그 어떤 현장 보다도 교육적이고 기대치 않은 유익한 배움이 발생하는 현장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모순적인 주장에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이유는 실제로 그렇게 생각해서 시작을 했고 의도치 않게 어린이들이 도구를 발명하고 요청하고 배움의 욕구를 드러내는 현장을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사실 빈둥이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날 것의 환경, 자연과 야생의 환경을 어린이에게 주려는 이유는 분명하다.  자연은 살아 있는 실험실이고 인간과 어린이에게 살아있는 배움을 강하게 촉구하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미숙하기 때문에 그 미숙함을 보조하고 어려움을 덜어준다는 명분으로 진짜 환경과 그 환경에 대한 반응을 경험할 기회는 제한하고 가공된 환경, 유사 환경, 짝퉁의 환경으로 손쉽게 교육환경을 설계하기 때문에  어린이에게 배움은 시시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닐까? 배움이란 미래의 이득을 위해 참고 견디며 인내하고 극한의 훈련으로 자신을 내모는 것으로 잘못 전달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어린이의 배움은 실패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진짜 자연은 유치하지 않다. 아직 미지와 모르는 것 궁금한 것으로 가득 둘러싸여 있는 어린이는 배움을 좋아한다. 보다 아름다운 것을 위해 좀 더 탁월한 솜씨를 위해 몰입하고 열광하고 집중하기를 좋아하다. 미지의 울타리를 하나하나 파괴하고 자신의 울타리를 조금씩 확장하는데 이러한 흥미 있는 배움에 열광하지 않는 어린이는 없다. 진짜 살아있는 물질들은 살아있는 도구로 변형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어른들은 이미 그 길을 알고 있다. 다만 현재 관리 감독 시스템 속에서 실행이 용이하지 않기 때문에 안 하고 있을 뿐이다. 


삭족적리(削足適履)라는 말이 있다. 몇 해 전 한 신문에서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된 바 있다.  한조 시대에 회남자라는 책에 신발을 사는데 자신의 발이 맞지 않아 발을 깎으려고 한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모자를 사려하는데 모자가 맞지 않자 자신의 두피를 깎으려고 하였다. 기르기 위하여 길러야 할 목적물을 해치는 것은 비유컨대 발을 깎아 신에다 맞추고, 머리를 깎아 갓에다 맞추는 것과 같다. 규정과 시스템은 사람을 기르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인데 그 규정과 시스템에 사람을 억지로 맞추다 보니 도리여 사람을 해치는 일이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호모 파베르로서 인간은 자연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으로부터 필연적으로 탄생한다.  자연에 대해 자신의 욕구와 필요를 따라 도구를 발견하고 발명하고 솜씨를 연마하면서 최선의 기량을 발휘하기를 열망한다.  자기 자신의 신체적 취약함을 보완하고 거인이 되기 위해  주변 환경을 적극 활용하고 배움을 갈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발달의 과정이다.  이러한 발달을 위해 사회는 배움의 시스템을 갖추었지만 작금의 현실은 부모와 교사 시스템 안에 있는 다수가 불만족하고 서로를 불신하고 있는 형국이다. 


살아있는 배움의 환경으로 어린이를 초대하기 위해서는 부모와 어른들이 함께 신뢰를 바탕으로 함께 모험하기를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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