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 양육환경과 놀이실험에 대한 개인적인 성찰 보고서
양평에 몇 년 지내다 보니 역귀촌 현상이 종종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미취학 초등 저학년까지는 전원의 낭만적인 생활을 누리다가 본격적으로 자녀교육 경쟁체계에 돌입하는 시기가 되면 인프라가 더욱 갖추어져 있는 대도시로 다시 돌아가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양평 지역은 가까운 남양주 별내 신도시부터, 분당, 노원구 등 대도시로 충분히 이동이 가능한 교외 지역이기 때문에 여러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선택을 내리는 배경에는 부모의 직장 이동 등 개인적인 배경이 작동하지겠만이를 제외한 공통적인 이유를 추론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바로 맹모삼천지교의 이론입니다. 양평은 인구 12만의 촌입니다. 이 시골에서 한 학생이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대도시 지역의 유명 학군지에 들어가면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밀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유명 학원 강사가 출강을 오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들이 대도시 학군 지를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곳에' 가면 대부분의 모든 친구가 잠을 줄여가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고 모두가 열심히 하는 면학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녀도 사회에서 성공을 위해 필요로 하는 습관, 즉 근면함 성실함 꾸준함 등의 경쟁력 있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자녀의 몸에 베이길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녀를 아끼는 부모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범죄가 가득한 환경 속으로 자신의 자녀를 일부러 떨어뜨리는 부모는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위해 좀 더 좋은 환경으로 이동하는 부모의 마음은 다 같지만 그 좋은 환경에 대한 정의는 각자 가치관에 따라 다른 것 같습니다.
자녀를 위해 좀 더 좋은 환경으로 이동하는 부모의 마음은 다 같지만 그 좋은 환경에 대한 정의는 각자 가치관에 따라 다른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러한 복잡한 마음의 배경에 깔려있는 보이지 않는 인식에 관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 인식은 귀족교육과 보편공교육 사이의 묶은 논쟁과 닮아 있습니다.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교육 시스템은 귀족 자녀를 위해서만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예를 들면 "농부가 글 공부해서 어디따 쓰려고 해" 질부의 아들로 태어난 김구 선생님이 들었던 말이었습니다. 그는 글을 배우고 싶어서 부모 몰래 서당에 가서 한문을 훔쳐 배웠습니다.
공교육이 실행되는 과정에서 당시 사회 주류 세력은 돈 낭비라며 거대한 반대가 있었고 수많은 피흘림과 투쟁의 과정을 통해서 오늘날 공교육 시스템이라는 합의에 어렵게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현재는 지금 그 공교육 시스템에 대한 회의론이 다시금 대두되고 있습니다.
수월성 교육은 탁월한 아이들만 선별해서 교육하는 것이 전체 사회를 위해서 이롭다는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미 여러 통계가 증명하고 있듯이 어려서부터 훌륭한 부모의 영향 아래 충분한 영양공급을 받은 아이들은 지능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탁월한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아이들만 선별해서 이들에게만 선택적으로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면 이들이 나중에 국가를 이끄는 훌륭한 인재로 자라난다는 철학이 수월성 교육의 밑바탕입니다. 수많은 노예의 어린이가, 소작농의 어린이가 교육을 받지 못하는 이유도 동일했습니다. 어차피 노예는 평생 노예이고 농부는 평생 농부인데 글공부와 교양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생각이었습니다. 실제로 어려서 충분한 영양 공급과 문학과 교양에 접근하지 못했던 어린이들은 능력과 품행에 있어서 귀족의 자녀와 차이점을 보였고 이러한 경험들은 누적이 되면서 점차 공교육이 낭비라는 지배층의 편견을 더욱더 강화시켰습니다. 이렇게 몇 세대가 지나고 나면 존엄한 혈통과 가문과 그렇지 않은 혈통이 실재하는 효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갈릴리에서 어찌 선지자가 나오겠느냐?"
"흑인이 어떻게 대학에 가느냐?"
"여성이 뭘 알겠느냐?"
이는 과거에 모두 같은 맥락에서 나온 확증 편향적인 사고입니다.
경쟁력 있는 학군지로 이동하려는 부모의 마음 이면에는 평등과 효율성 중에 어느 곳에 비중을 두느냐는 가치관의 충돌이 부모의 마음속에서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사회는 "인기드라마 오징어게임"의 축소판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상위 1% 안에 들어가면 모두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 들어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뛰어난 아이들이 모여있는 커뮤니티 안에 들어가면 그 정상적 삶에 도달하는 속도가 매우 가속화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사회는 "인기드라마 오징어게임"의 축소판입니다. 마치 99%는 다 죽어나갈 것을 전제로 게임을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그 1% 안에 드는 게 자신일 것이라는 망상을 가지고 전쟁하 듯이 경쟁에 참여하는 것 같습니다. 애초에 이 게임의 룰 자체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왜 안 하는 것일까요? 정말 부도덕하고 게으르고 사기 치는 사람 빼고 한 60%-80% 정도 함께 잘 살 수 있는 게임의 규칙은 없을까요?
애초에 이 게임의 룰 자체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왜 안 하는 것일까요?
지방도시에서 고등학교 담임을 하고 있는 친 누님이 있습니다. 지방도시의 교육현장의 양극화는 처참한 수준입니다. 교사는 교실에서 한 두 명을 위해서 수업을 하고 나머지는 다자고 있다고 합니다. 공교육 교사들은 무력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지방 교실은 이미 다국적 교실이 된 지 오래입니다. 지방의 경우 평균 15-20% 정도가 다문화 학생입니다. 서울 경기는 절대 인구가 많아서 외국인 학생 비율이 8-9%일 뿐이지 절대적인 숫자는 월등히 많습니다.
자신의 자녀를 한 반에 한 두 명만 공부에 집중하고 나머진 다 사회 부적응 하는 아이들로 가득한 학교에 보내고 싶은 부모가 있을까요? 직장 때문에 혹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그 커뮤니티에 소속된 부모와 아이들은 왠지 모를 패배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자녀가 빼어난 소수 집단에 소속되어서 안정과 행복을 누리길 바라는 마음은 모두 보편적인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런 바람은 절대로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신기루와 같은 것입니다. 유토피아 같은 것이죠. 수월하고 빼어나고 미남 미녀인 사람들만 모여 사는 세상. 아마 그곳에 소속되어 있으면 자신이 선택받은 사람이고 우월하다는 느낌과 함께 잠시 행복감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은 세계에 실존하고 있고 그리고 그 실존은 소위 엘리트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도 때때로 큰 영향을 미칩니다. 마치 서울의 명문대학을 나와 그 어렵다는 임용고시를 통과해도 그 교사가 일하는 현장은 다문화 교실인 것처럼 말이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삶의 다양한 차이를 마주하지 않고 살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삶의 다양한 차이를 마주하지 않고 살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혹시 한 사람이 수월성 교육의 결과 저명한 지도자나 리더가 된다 하더라도 다양한 지구 구성원에 대한 보편적인 공감 능력과 감각이 없으면 그는 자신의 그 높은 지위를 유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엘리트 교육에 대해 사람들이 거부감을 가지는 이유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백성의 마음을 모르거나 폭정을 일삼은 지도자는 불행한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보편 교육은 왜 중요할까요? 만일 특정 집단의 사람을 부모가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경제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인간으로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하게 기본적으로 받아야 할 권리들로부터 사회가 애초에 접근권리를 제한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당장의 자국민의 이익을 위해 이민자들을 차별하고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라고 배제하는 정책을 펼쳤을 때 십 년 이 십 년 후에 그 사회에는 어떤 일이 발생할까? 눈에 가시를 치웠으니 부유하고 강한 나라가 될까요? 그건 사회라는 생물을 우습게 여긴 단순 무지한 판단입니다.
사회라는 생물을 우습게 여긴 단순 무지한 판단입니다.
과거 유럽사회는 아랍과 중국으로부터 배운 발달된 항해 총포 기술을 바탕으로 식민지 정책을 펼쳐서 16-19세기 동안 부를 축적하고 문화적 번성을 이루었습니다. 동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를 착취하여 지금의 문화적 기술적 번영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나중에 밝혀진 결과 그것은 미래의 에너지를 미리 끌어다 쓴 '불스원샷 카페인 음료' 같은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유럽사회의 불안은 모두 과거 식민 정책의 부채로부터 비롯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아프리카의 내전, 동유럽 난민, 중동 전쟁, 팔레스타인 문제 등 유럽 사회의 현존하는 불안은 사실 대부분 역사적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강대국 시절 과거에 그 지역에 행 했던 일과 관련이 깊습니다. 단순히 자국이익을 위해 '아몰랑' 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렇든 역사와 사회는 단순히 강자 약자 지배자 피지배자 승자와 패자로 단순하게 구분될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현실은 오징어게임이 아닌데 우리 사회는 마치 오징어 게임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죠. 승자가 되면 다 잘될 거야.
현실은 오징어게임이 아닌데 우리 사회는 마치 오징어 게임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죠.
자녀를 데리고 좋은 학군으로 이동하는 부모의 마음은 단순한 욕망으로부터 출발해서 그 이면에 대단히 복잡한 가치관의 충돌로 논의를 확장하였습니다. 저는 이 질문을 정말 좋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성공적일 확률이 높은)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 우리는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던지고 싶습니다.
독일의 명문 김나지움에 진학해서 고급 관료가 되고 높은 지위에서 수많은 사람을 관리 감독 통솔하는 성실하고 존경받는 가장이었던 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그가 주로 한 업무는 유태인은 분류하고 수용소에 보내서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이 극단적인 사례를 통해 수월성 교육과 보편 교육 사이의 철학적 사고의 긴장의 끊을 놓아 버렸을 때 극단적으로 설사 내 자녀가 높은 경쟁률을 뚫고 사회 내 높은 지위에 올라갈지라도 그가 감당해야 할 역사적 무게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아무리 내 아이가 영재 수재 이어도 이 복잡한 섬유조직 같은 사회 안에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가지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이미 우리 사회 안에 존재하는 여러 불안 요소들을 해소하고 조화하고 함께 어울려 사는 법을 교육의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다면 아무리 내 아이가 영재 수재 이어도 이 복잡한 섬유조직 같은 사회 안에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가지게 됩니다. 제가 도달한 생각은 중요한 것은 여기가 교육하기 좋냐 저기가 교육하기 좋냐가 아닙니다. 이 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불안과 사회 통합의 문제로 우리의 질문을 옮기고 싶습니다.
좋은 대학을 나왔던 우리 교사이신 누님처럼 실재 삶은 드라마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