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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GWORK STUDIO Nov 14. 2024

사회라는 신체와 예술이라는 자율신경계


예술가들은 대부분 정치, 권력, 자본에 대해 다소 젬병인 사람들입니다.  그쪽으로 생각이 틔여있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예술 쪽으로 진로를 정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사회적 잉여라고 불리는 예술가들이 모여서 좀처럼 생산적인 일은 하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골라서 하며 놀고 먹고 마치 꿈꾸는 자와 같이 사는 예술가들이 사회라는 유기체 안에서 과연 어떤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네 맞습니다. 예술가의 일들은 그다지 쓸모가 없습니다. 예술을 업으로 삼고 있는 20년 경력의 예술가가 스스로 자조적으로 하는 말이니 믿으셔도 됩니다. 예술이 없어도 이 사회가 돌아가는데 큰 지장은 없습니다.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나 신체로 비유하면 예술가나 예술은 인체 기관의 어느 부위에 해당할까요? 모르긴 몰라도 확실히 심장 혈관 근육 그리고 뇌 쪽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단단한 뼈에 둘러 쌓인 핵심 생명 유지 기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식량 생산, 국방시스템, 사회운영시스템, 산업기반시설, 금융. 정치, 교통 운수, 무역 등등이 이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기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국가예산의 상당 부분이 이쪽 분야에 가장 많이 할당 되고 있고 예술 쪽에는 최소한의 비용만 책정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예술 쪽 예산을 무조건 늘려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현상적으로 국가가 어려울 때 가장 만만하게 절감하는 분야가 예술과 복지쪽 예산입니다. 그저 예술이 왜 항상 대민 복지와 같은 연장 선장에 있는지 그 사실이 저의 호기심을 유발할 뿐입니다.   


저는 '과연 예술이라는 장기기관이 손상되었을 때 사회라는 유기체 안에서 어떤 증상이나 결과가 나타나는가?' 로 질문을 바꿔보고 싶습니다. 


 '과연 예술이라는 장기기관이 손상되었을 때 사회라는 유기체 안에서 어떤 증상이나 결과가 나타나는가?' 로 질문을 바꿔보고 싶습니다. 



2024년 가을 오늘 아침 한 뉴스를 들었습니다. 세계 100대 기업의 CEO 중에 여성이 430여 명을 기록했다는 뉴스였습니다. 20년 전 정확히 같은 통계에서 100대 기업의 CEO 중 여성이 13명이었던 것과 대조적인 통계였습니다.  


꽤 오래전 기억입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이었던 시절 아직 뭣도 모르던 시절이었습니다. 중년 남성이었던 교수님이 앞으로는 여성의 시대가 올 거라고 어떤 예술 작품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짧게 지나가면서 말했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저는 그 말이 한국말 임에도 불구하고 무슨 소리인지, 무슨 맥락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사실 예술사를 살펴보면 이미 과거부터 많은 예술가들이 남성 위주의 미술계 패권에 대해 투쟁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예술가들은 시대를 앞서서 남들이 별로 문제라고 느끼지 않고 당연시 여기던 관습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이를 개인사적인 작품으로, 사진으로, 퍼포먼스로 실천으로 이 문제에 대해 깊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2024년 현재 많은 문제들이 여전히 우리 세계에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야에서 부분적으로 사회적 반성과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실제로 구조적으로 많은 부분들이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음을 체감합니다. 

탄광 갱도의 카나리아

저는 김형수 시인의 "삶이 언제 예술이 되는가"라는 책에서 예술가에 대해 비유한 한 대목에 공감이 되었습니다. 바로 '탄광 갱도 안의 카나리아 새'라는 비유가 참 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예민하고 가장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먼저 위험을 감지하고 먼저 죽어버리는 갱도의 카나리아 새처럼 예술가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못 느끼는 위험과 부당함을 감각적으로 먼저 느끼고 반응하는 참으로 외로운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예술인들이 문학인들이 -절대 예술가의 윤리적 범죄를 두둔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제 아내에게 잡혀 사는 평범한 중년 가장입니다.- 술과 중독 성적인 편력, 가정 파탄 등 안정적인 삶의 질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사회적으로 성공적인 지위에서 건강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은 불필요한 감정들을 감각할 이유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개인적인 견해로서 예술가를 사회라는 유기체 안에서 신체 감각 기관에 비유한다면 일종의 위험을 먼저 직관적으로 감지하는 교감신경과 스트레스 호르몬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가올 위험을 먼저 직감하고 온몸의 근육과 호흡을 긴장시키고 자극해서 위험에 대비하게 만드는 자율신경 같은 것이지요.  때때로 이와 같은 불안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면 우리 몸의 중앙통제 센터는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반복적인 훈련으로 이런 불안을 지우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고소작업자가 반복적으로 훈련하면 높은 곳에서 안전장치 없이 걸어 다녀도 전혀 떨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자율신경을 무시하는 훈련을 반복하는 것이죠. 그리고 한 순간에 무감각하게 높은 곳에서 보호장치 없이 일하다가 큰 사고가 납니다. 


사회라는 유기체도 자꾸 불편함 감정과 긴장을 유발하는 예술이라는 자율신경계의 반발을 때때로 무시합니다. 

사회라는 유기체도 자꾸 불편함 감정과 긴장을 유발하는 예술이라는 자율신경계의 반발을 때때로 무시합니다. 왜냐하면 사회가 진취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는데 걸림 돌이 되기 때문이지요. 한편 이 사회의 중앙통제센터는 누구일까요? 정부? 민심? 대중? 또 다른 자본 배후세력? 누가 이 사회의 주인이냐는 질문은 또 다른 논쟁 거리를 낳으니 여기서는 질문으로만 남겨 놓겠습니다. 어쩌면 예술가의 언어를 통제하려는 세력이 국민들로부터 권력을 찬탈하려는 욕망을 가진 세력이라고 역으로 추론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술가들은 숙명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면서 어느 정도 고통과 우울 속에서 묘한 이중적인 쾌감을 느끼는 사조마히즘적인 인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게 힘들다고 우는 소리 하는 예술가들에게 '그러게 누가 시켰어?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해놓고 왜 저래?'라고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것은 무리도 아닐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게 힘들다고 우는 소리 하는 예술가들에게 '그러게 누가 시켰어?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해놓고 왜 저래?'라고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것은 무리도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탄광촌의 광부들이 카나리아의 반응을 무시했을 때 공동체적 위기 상황 속에서 어떤 재난이 닥쳐올지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예술가들이 앞장서서 계몽적이거나 도덕적으로 훌륭한 일만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런 부류의 예술가도 있지만 그저 자신이 보고 느끼고 감각 한 것에 몰두하는 예술가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한 감각적 소용돌이에 휩싸여 자신으로 투영되는 이 사회의 가장 예민한 부분에 직업적으로 자신의 에너지를 전문적으로 소진하는 사람 그리고 이를 예술언어로 소화하고 무언가 발문하는 사람이 예술가라고 정의를 한다면 사회는 예술가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그저 한심 하게 여기기에는 가볍지 않은 공동책임이 있다는게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저는 예술가는 누군가 시켜서 공동체적인 윤리적 책임을 짊어진 것은 아니지만 공동체의 위기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먼저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므로 사회가 이를 가벼이 여기다가 정작 위기의 순간이 도래했을때 후회할만한 일이 생길지도 몰라 정도로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를 얼버무리고자 합니다.  


사회라는 유기체는 아주 작은 구멍에도 전체가 가라 앉을 수 있을 만큼 매우 취약합니다. 스트레스 호르몬과 몸이 주는 자율신경계의 신호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매우 저렴하고 효과적인 예방책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 사회가 예술가들의 신호와 그들이 만들어낸 진기한 기호들을 납득하기만 한다면 때때로 운 좋게 소수의 예술가들은 사회적으로 큰 보상을 얻게 됩니다. 제도가 그들을 인정을 해주는 것이죠. 점점 높아진 명성과 위상으로 인해  국제비엔날레에 참여하거나 명망 높은 갤러리에서 거래 되거나세계적인 부호들의 모임에 초대되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러한 보상을 얻지 못하는 99%의 예술가들은 사회의 어두운 음지에서 이를 갈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국가가 복지의 대상으로 분류하거나 뉴딜일자리라는 당근으로 유혹하면서 히키코모리가 되지 않고 양지로 나와서 뭐라도 생산적인 일을 하라고 국가로부터 지속적인 권유를 받습니다. 


당신이라는 사회 전체 유기체인 몸은 자율신경계의 예상치 못한 교란과 같은 대부분의 평범한 예술가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요?


혹시 속으로 '나 살기도 힘들다. 너네들 문제는 너네들이 알아서 해라?' 라고 생각하셨나요 ? 

만일 제가 맞추었다면 이것이 제가 용한 예술가라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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