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놀이’를 통해 어린이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우리는 ‘놀이’를 통해 어린이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기를 기대하는 것일까요?
어린이가 놀이를 통해 자기 주도적인 성장을 추구한 결과 어떻게 성장하였는지 그 결과를 궁금해하는 부모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빈둥 플레이의 핵심 가치는 ‘자기다움의 추구”입니다. 과연 어린이가 자기다움을 추구한 결과는 어떠할까요?
‘놀이둥지 빈둥’과 같은 놀이 운동은 아이들이 자기 스스로 내적 필요에서 나온 실험과 탐험을 마음껏 시도해보며 도전과 실패에 대한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게 됩니다. 이러한 활동은 어린이의 발달에 분명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빈둥의 놀이 현장을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직관적인 믿음을 객관적인 언어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회 전체적인 관점에서 아이들이 살아갈 삶을 생각할 때 어쩌면 이러한 믿음은 해로운 가르침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해보게 되었습니다.
선배 중에 중등교사인 분과 지나가다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초등 고학년인 자기 자녀를 교육하면서 느끼는 애로사항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저학년 어릴 때는 마음껏 놀게 했는데 고학년이 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학원 등) 공부를 시키게 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본래 ‘세상’이라는 것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는 없는 것 아니냐라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래서 하기 싫은 공부도 참고 오래 앉아 있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습니다.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고 있는 결과를 ‘예술가’로 살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슬픈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으로 그 선배의 삶과 연결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힘든 임용고시의 과정을 거치고 어렵게 교사직을 얻었지만 교직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마냥 안정적이고 편한 직업이 아닙니다. 정말 교육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명감으로, 가족을 위해서 혹은 힘겨운 책임감으로 이어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그 선배가 말속에 이런 의미를 어느 정도 포함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생의 본질은 인내와 고통일까요?
교육을 통한 어린이의 발달의 최종 목표가 ‘하고 싶지 않은 일도 견딜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그 결과로 ‘안정적인 직장과 수입’을 얻는 것이 최종 목적이라면 놀이 둥지에서 자기다움을 마음껏 펼치는 활동은 아이 인생에 참으로 해로운 가르침 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교육을 통해 ‘사회가 정해 놓은 선’을 지키고 ‘불필요한 생각'들을 지우고 오직 사회가 요구하는 생각에 충실하게 반응하는 인재가 되는 것이 목표라면 빈둥의 놀이 철학은 분명 아이들에게 해롭습니다. 빈둥의 놀이 정신은 정반대의 결과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론 객체인 어린이와 미래의 인재들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하는 이 ‘사회의 주체'는 누구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엘리트 어른들입니다. 엘리트가 아닌 어른들은 그런 정책결정권 밖에 있습니다.
그 엘리트 어른들은 어떤 성장과정을 통해 그 지위에 도달하게 되었을까요? 정말 자기 다운 행복한 삶을 추구해서 그 지위에 도달했을까요? 그 반대였을까요? 물론 개개인마다 사회적 성취를 이루는 동기는 다양합니다. 분노와 질투, 경제적 극복, 자아실현,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마음 등등 개인의 특징에 따라 동기가 다르고 개개인의 인생 시기별로 마음이 바뀌기도 합니다.
‘사회화’와 ‘인간발달’은 분명 자기의 이기심과 아집을 내려놓는 과정이 따라오게 됩니다. 이기심과 아집을 내려놓고 협력하는 것은 분명 성숙함의 표지입니다. 사회화는 공동체의 선을 이루는 과정을 통해 깊은 수준의 인간성을 경험하고 행복을 만들어가기 위함이지 결코 독재 전체주의 사회처럼 개개인의 인간성을 제거하기 위함은 아닐 것입니다.
빈둥 플레이에 새롭게 적어 놓아야 할지도 모르는 ‘슬로건’입니다. 빈둥은 여러모로 해롭다고 생각됩니다. 톱과 망치도 널려있고 폐자재도 쌓여있고 구조물들은 아이들이 만들어서 허술하고 관리할 것 투성입니다. 더 해로운 건 이곳이 추구하는 정신적 가치입니다. (물론 반어법입니다. 보기에 따라 진실일 수도 있고요.)
살면서 자기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고통을 수반할지도 모릅니다. 창조적인 일과 새로운 일을 추구하는 사람은 고생이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보기에 따라 이러한 삶은 선하고 아름답지 않습니다. 본질에 대해 질문하지 않고 주변의 현상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하지 않으며 주어진 업무에 그냥 충실하게 총생산량을 늘리고 돈을 모으고, 소비하는 것에 몰두하는 것이 국가가 원하는 선한 시민이라면 빈둥은 ‘불손한 시민’을 기르는 장소입니다. 자기다움은 통제되는 인간을 만드는데 목표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 다움’이란 무엇일까요?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며 세상과 어떻게 관계 맺으며 살아갈까? 질문하는 어린이는 성년이 되었을 때 피곤한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녀의 행복을 바라는 부모들은 사랑의 마음으로 대체적으로 ‘안정’을 권면합니다. ‘피곤하게 살지 마라’ ‘세상 별거 없다’ ‘모난돌이 정 맞는다’ ‘너만 별나게 살려고 하지 말아라’ ‘그냥 흘러가는 데로 살아라’ 인생의 굴곡을 많이 경험하신 어르신들의 조언입니다.
우리 어르신들이 한창 살아오신 1970-90년대의 전성기 시절들은 분명 그러한 명제가 선명하게 통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초고속 산업화를 겪으면서 부작용이 심각했었습니다. 상식과 법치가 통하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법을 지키는 것이 더 어리석은 시절이었습니다. 나 빼고 모두가 ‘도둑놈’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세금을 그대로 내는 것이 멍청한 행동이었습니다. 나랏 놈들이 모두 도둑이라는 불신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십니다. 통계를 보니 90년대까지 어린이 10만 명당 사망 사고율이 25.6명으로 주요 국가들 중 최하위였습니다.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위험과 폭력이 난무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저희 중학시절 일진들의 싸움은 카카오톡으로 괴롭히는 수준이 아니라 쇠파이프를 들고 하는 패싸움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시절을 통과하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어르신 세대가 후손들에게 강조하는 ‘안정’의 가치에는 모순된 부분이 있습니다. 본인들이 안정적으로 살 수 없었고 거친 사회를 살아오셨기 때문에 그렇게도 안정을 깊이 추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역설적으로 미래가 본인의 시절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질 것이 없을 것이라는 전제로 말씀을 하는 것이 이상합니다.
예컨대 ‘나 때도 법치를 지키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었어.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너 때도 법치를 지키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주장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즉 세계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도록 노력한 적이 없는 어르신들의 비겁한 변명은 ‘네가 세상을 아직 몰라서 그래, 혼자 유별나지 마라, 물 흐르듯 타협하며 살아라”라는 조언의 형식으로 둔갑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스스로 자기다움을 추구하길 포기하고 타협하면서 평생을 살아온 기성세대는 유별나게 자기다움을 추구하며 사는 젊은이들이 제 앞가림도 못하는 모습을 보며 걱정을 해주는 척하며 은근히 자기와 같지 않은 삶에 대해 비아냥 거립니다.
“그렇게 해서 밥을 먹고살겠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자기를 포기했던 어르신들의 숭고한 삶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가 있습니다. 이는 분명 존엄한 일이고 우리 후손들은 그 어르신들을 마땅히 존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조언데로 자기다움을 추구하는 삶은 “밥 먹고 살기” 고달픈 것이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말씀 이면에는 약간의 진실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모난돌은 또 정을 맞게 될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일을 생각하고 개혁을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심각한 저항에 부딪히게 됩니다.
하지만 정말 책임감있는 어른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리고 어떤 말을 후손들에게 남겨야 할까요? 자기 때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주기 위해 노력했던 어른들은 어떤 금언을 남기게 될까요? 내가 살았던 과거는 이러한 이유로 힘겨웠지만 네가 살 세상은 나와 다를 것이다. 너는 너 다운 너의 삶을 살아라. 내가 뒷배가 되어줄게. 힘들면 언제든 이야기해라고 말해 주시는 어르신들은 어디에 없을까요? 아니요. 분명 많이 있습니다. 건강한 상식을 가지고 살아온 어른들은 분명 그런 말을 자기 자손들에게 남길 것입니다. 앞으로 나는 어떤 중년의 시기를 보내고 어떤 말을 남기는 노년이 될까요? 내가 살아온 궤적이 그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