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NGWORK STUDIO Feb 05. 2021

아이들에게 위험한 사회

아이 키우기 힘든 세상

아이 키우기 힘든 세상입니다. 

어린이 납치, 학대, 폭행, 교통사고, 심지어 그루밍 성폭행과 살인 까지... 한 번씩 터지는 끔찍한 뉴스들이 아이 키우는 부모들의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만듭니다.  사건 사고에 대한 방지책을 두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아이 하나 기르는데, 사회적으로 엄청나게 큰 에너지가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속절없이 잃어버리는 아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린이 사망사고 


통계에 의하면 2018년 사고에 의한 14세 미만 어린이 사망자 수는 167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어린이 10만 명 당 2.4명입니다.  과거와 비교해보면 어린이 사고 사망자 수는 2018년 167명, 2010년 511명, 2000년 1,500명, 1996년 2, 521명의 어린이가 비의도적 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참고로 미국은 2018년 당시 10만 명당 7.1명입니다. 천조국인 미국보다 안전하니 우리나라는 괜찮은 것일까요? 사실 미국은 OECD 국가들 중 어린이 사고 사망률에서 하위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어린이 사고 사망률이 점점 양호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더라도 167명의 부모님들의 찢어지는 가슴을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1996년도에 어린이 10만 명 당 사고 사망자 수는 무려 24.3명이었습니다. 한 해에 멀쩡한 어린이 2,521명이 사고로 죽은 것입니다.  현제 성년이 된 80년대 - 90년대 생들은 이렇게 잔인한 세계에서 기특하게도 살아남은 것입니다. 그 이전 통계는 잘 잡히질 않아서 그렇지 이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연스레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시절 끔찍한 어린이 살해의 주범은 누구였을까요? 미치광이였을까요? 흉악범? 납치범? 사이코패스? 


애석하게도 그 시절 연간 2,500여 명 중 무려 절반이 넘는 어린이가 일반 차량에 죽었습니다. 

사망률이 현저히 줄어든 최근에도 부동의 사망사고 1위는 차량입니다. (2016년 32.2%). 차라리 잔혹한 범죄자가 우리 어린이를 빼앗아 갔다고  했더라면  적이 누구인지 선명하기 때문에 그나마 대비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적의 모습은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차량사고를 낸 사람은 선량한 아버지일 수도, 경찰일 수도 심지어 판사일 수도 있습니다.


어린이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고는  주변의 평범한 어른들이나 누구보다도 아이를 사랑하는 친부모가 돌보는 일상생활 공간 근처에서 발생합니다. 한두 명의 끔찍한 범죄자를 어떻게 처치할지를 논쟁하면서 동네에 대한 혐오와 차별 두려움 때문에 갈등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린이 사고 사망자 수는 연간 167여 명이고 이 중 대다수는 차량과 집과 같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죽어갑니다.


차량에 대한 문제에 있어 보행자 책임과 운전자 중 누구의 책임이 더 큰 것일까요? 


아마도 제가 사고를 내면 부주의한 어린이와 잘 돌보지 못한 보호자를 탓할 것입니다. 아마도 만일 우리 아이가 차량사고를 당하면 부주의한 운전자를 탓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책임의 크기는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은 지난해 스쿨존 교통사고에 대한 특별 가중처벌 법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 중에 법조인들이 꽤나 많았던 것입니다. 법체계의 형량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이유였습니다. 과도한 처벌이라는 것이죠. 법 전문가인 본인들도 스쿨존에서 운이 없으면 징역행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의 안전을 위해 사회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지만 실재 법이 구현되고 집행되는 과정에서 사실은 집행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편집되기가 쉬운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죽은 약자의 목소리를 대신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차량으로 죽은 아이의 부모가 아이의 영정 사진을 들고 대통령 면전에 나왔을까요.? 


실재 매년 20만 건이 넘는 교통사고 중 15,000여 건이 어린이 사고입니다. 또  수천 명의 사망자 중 30-70여 명의 어린이가 차량에 치여 혹은 차량 안에서 사망합니다. 그리고 사회는 애들의 부주의와 그 애들을 붙잡지 못한 부모 탓을 합니다. 물론 강화된 스쿨존 처벌법의 부작용(주정차 문제와 근본적인 등교 시스템 등)에대해 세밀한 조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어린이의 죽음과 평범한 어른의 책임 공방에서 어른의 목소리가 크게 거북함을 드러내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하물며 어린이가 다치는 것쯤이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주류 어른의 큰 이익과 어린이의 사소한 안전이 충돌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우리 사회는 과연 어느 편을 들어줄까요?  결과를 장담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린이집, 학교, 부모 등 어린이에 대해 보호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되도록 밖에 내보내지 않는 방향으로 의사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제가 근본적으로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어른들의 선한 의도와 달리 도시공간의 편집과 법 시스템과 여러 책임 공방 사이에서 엉뚱하게도 약자들의 영역이 축소되는 결과로 미끄러집니다.  이는 분명 '갖춰지지 않으면 결혼을 포기한다' '점점 애 키우기 힘들다'는 젊은 세대의  선택과 긴밀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도시 혹은 마을은 어른들과 차량과 도로의 전유물은 아닐 것입니다. 각기 다른 존재들이 자신들의 존재 비중만큼 도시를 활보하고 누릴 수 있도록 공공영역이 확보되어야 살기 좋은 동네라고 생각합니다. 평균적으로 어린이 인구가 마을의 10분의 1이라면 영토 또한 최소 10분의 1 정도는 그들이 충분히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실재 도시 계획에서 거대 블록의 지극히 일부, 실내 안에 어린이들을 몰아넣고 감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역화하는 것은 사실 조직 폭력배나 마피아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살기 힘든 공간에서 갈등을 줄이려면 영역을 구분 짓는 것이지요.  어른의 억울함과 어린이의 안전이 충돌할 때 도시공간 편집자는 극히 작은 부분을 선심 쓰듯 어린이 구역으로 지정해 줍니다.  


살기 좋은 도시 공간은 서로의 존재들이 느슨하게 서로 공존 가능한 형태여야 합니다.  영역을 나누고 책임을 미루고 서로 다투는 공간은 살기 힘든 공간입니다.  스쿨존 교통사고 처벌 강화법 논쟁을 지켜보면서 느낀 지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형량에 대해 전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우리 사회가 아이 키우기 힘든 공간이라는 사실은 선명해 보입니다. 




[참고 자료] 

교통공단 교통사고 통계, 2019

사고에 의한 어린이 사망 1996-2016 , 통계청


작가의 이전글 어린이의 자기다움의 추구는 해로운 교육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