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족적리 : 발을 깎아 신발에 맞추다
앞의 장에서 어린이 사망사고 통계를 가지고 전체적인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어린이 안전 관련된 분절되고 파편적인 뉴스 정보가 우리의 선입견을 어떻게 형성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어린이 관련 상식은 대다수 미디어에 의해 형성되는데 그 밑바탕에는 어린이에게 이 세계는 위험하다는 두려움이 깔려있습니다. 이 말은 일견 사실인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좀 더 복잡합니다. 어른들에게 유리한 책임회피 논리는 엉뚱하게도 어린이의 반경을 제약하는 결과로 미끄러집니다.
앞서 제시한 통계처럼 제일 위험한 것은 차량인데도 도시 공간의 구성 방식 때문에 아이들의 몸의 움직임을 차량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어린이 보호 구역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만 처벌을 강화한다고 어른들을 겁박합니다. 결과적으로 볼멘소리만 나오고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은 도시에서 그림자처럼 최대한 보이지 않게 움직여야 한다는 명제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보다 많은 어린이들은 평범한 사람이 운전하는 차량에 의해, 엄마와 함께 있는 침대에서 가구에 깔려서 사고를 당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범죄자를 두려워하면서 거리에서 만나게 될 모든 어른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고 어린이를 보호하고 움직입니다. 아이들을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보고 주변의 익명의 어른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고 어린이 사고 시 엄벌에 처한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은 결코 좋은 해결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른과 차량 위주로 편집된 도시 공간에서 어린이의 안전을 위해 아이들의 활동 반경을 제한하면서 오히려 주택과 같은 장소에서 실내 어린이 사고가 늘어났습니다. 이는 어린이들을 만나는 교육 현장에서 경험적으로 느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신체 감각이 둔화된 어린이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층간 소음문제와 안전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뛰지 마’, ‘하지 마’를 내재화하면서 자라는 어린이들은 자신의 신체를 스스로 제어할 능력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해당 연령에 따라 자연스레 기대되는 신체성 발달이 늦어지는 것입니다. 계단을 하나 오르고 내리는 것조차 게걸음 걷는 듯 한 어린이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이오덕 시인은 까치발을 들고 걷는 아이들은 세계와의 신뢰관계에 이상이 있음을 보여 주는 징후라고 했습니다.
안전을 위해 모든 시설이 스펀지로 둘러싸인 실내 놀이터에서 조차 아이들의 감각을 신뢰할 수 없는 부모들이 일일이 뒤 쫓아다녀야 합니다. 아이들을 끌어내리고 붙잡고 다그칩니다. 이러한 신체 능력의 결핍은 집안, 집안 마룻바닥에서 발생하는 높은 사고 건수로 반증됩니다.
2018년 소비자 위해 감지 시스템을 통해 접수된 어린이 안전사고 건수는 24,097건입니다. 어린이 안전사고가 주로 발생하는 장소는 16,343여건으로 67%가 '주택’입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위해한 품목은 ‘바닥재’와 ‘침실가구’로 각각 2873건, 2497건으로 매년 비슷한 통계를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어린이가 보내는 시간의 양과 사고 빈도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가 오래 보내는 장소에서 안전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어린이에게 바깥은 위험하다는 인식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실제로 위험한 곳은 바깥이 아니라 실내, 특히 어린이가 주로 생활하는 집 안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어린이를 돌보는 가장 최고의 자격을 갖춘 사람은 누구일까요? 어린이집 학대, 부실 급식 논란 등등 뉴스가 붉어질 때마다 각종 교육 시설의 교사와 돌봄 책임자들에 대한 자격 논쟁에 불이 붙습니다.
과연 어린이를 정상적인 제 부모만큼 아끼고 보살펴줄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그런 부모와 함께 있는 주택에서도 매년 16,000여 건의 사고가 발생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해석을 내려야 할까요? 안전 교육을 강화하고 책임자를 추궁한다는 식의 해법은 있으나 마나 한 해법입니다. 공기 질이 나빠졌으니 사람 더러 숨을 쉬지 말라고, 법으로 처벌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런 식의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닐까요?
누구보다도 자기 자녀를 제일 아끼고 있고 학교, 유치원, 어린이 집에서 발생하는 모든 안전사고에 대해 누구보다 민감하게 항의할 정도로 자기 자녀를 아끼는 그 부모도 막지 못하는 미끄러짐과 부딪힘 낙상 사고를 이 세상 어느 누구가 막을 수 있을까요??
안전 교육을 강화하자는 식의 단순 결론을 맺으면 학교 유치원과 같은 공공기관에서 보이는 반응은 정해져 있습니다. ‘금지와 제제’ 뿐입니다. 관리자 없을 때는 모든 시설을 봉쇄합니다. 그럼 부모들에게도 아동의 모든 활동을 봉쇄하고 모든 행위도 금지하고 아무것도 없는 무균실과 같은 실내에서 요리도 하지 말고 배달 음식만 시켜먹으면 정말 아동 사고가 줄어들까요? 그렇게 자라난 아이는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게 될까요? 그 아이에게 ‘자유’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요?
그 아이에게 ‘자유’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요?
사고가 났을 때 어린이 돌봄 관련 책임자에게 책임추궁을 하고 처벌하고 관련 폐쇄하고 규제를 강화하는 것은 일차원적인 사고입니다. 이러한 프로세스는 전형적인 구시대적 관료제 책임회피 시스템입니다. 이 다음은 어떻게 될까요? 자연스럽게 ‘아무 일도 시도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라는 정신이 우리 사회에 내재화 되게 됩니다.’ 어린이 위한 일? 취지는 좋아! 하지만 만일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지지?’ 어른들의 머릿속에 이 생각부터 먼저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관료들과 시민들이 이런 상태인데 엉뚱하게도 국가는 4차 산업혁명, 미래의 먹거리 , 혁신적인 인재 운운합니다. 혁신은 일상생활 문화의 토대 위에서 자라납니다. 시도를 장려하지 않는 부모와 이웃들에 둘러싸여 있는 아이가 나중에 미래를 선도할 인물이 된다? 만일 그런 인물이 나온다면 그 아이는 필히 우리 사회의 DNA가 아니라 다른 DNA를 수혈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단순 암기를 통해 경쟁 우위의 직업을 얻기 위한 지식 능력을 익히는 ‘교육’은 매우 낡은 개념입니다. 교육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될 모든 상황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주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일입니다. 이러한 능력은 반복적으로 암기 노트를 많이 작성한다고 길러지는 능력이 아닙니다. 낮은 단계의 위험을 스스로 경험하고 극복해보고 살아있는 경험을 통해 모방하고 예방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아이들의 놀이 본능은 이러한 살아있는 경험을 좋아합니다. 아이들은 스릴을 추구하고 회전을 좋아하고 뛰고 기어오르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 어린이에게 그런 본능이 있는 지를 한 번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서 스스로 삶에 필요한 것을 내면에 쌓아 놓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자신을 긍정할 수 없으면 세상을 신뢰할 수 없고 지금 여기서 미래로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사람은 살아있는 한 움직일 수밖에 없고 위험과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산다는 것은 위험을 다스리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물, 불, 광물, 자연자원, 등 덜 위험한 자원을 활용하여 더 큰 위험을 극복해 온 것이 인류 문명의 역사입니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 생존 자체가 위험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 힘과 기술을 발전시키기도 하고 문화와 예술로 그 상처들을 회복하면서 지내 왔습니다.
위험을 피해야 한다는 말은 허상에 가까운 말입니다. 위험은 살아 있는 존재라면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작은 위험을 극복해 본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큰 재난적 위험에 슬기롭게 대처할 뿐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위험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이 독립해서 살아가게 될 세상의 위험은 어려서 겪을 찰과상보다 훨씬 더 잔혹합니다.
전체 맥락에서 어린이의 위험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특정 뉴스와 이슈를 빌미로 어린이의 위험의 문제를 단차 원적으로 다루었을 때 우리는 관리와 제약의 방식으로 해결책을 논하게 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평범하고 성실한 어른들이 도시공간을 어떻게 편집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교사 선생님들이, 평범한 엄마 아빠들이 아이들을 여러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차량’이 아니고서는 밖으로 내보내지 않게 됩니다. 즉 길러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길러야 할 것을 해치는 것은 비유컨대 발을 깎아 신발에 다 맞추고 머릿살을 깎아 갓에 다 맞추는 것과 같은 삭족적리(削足適履)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