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어린이는 자기만의 작은 공간을 좋아할까?
어린이의 놀이를 오랫동안 관찰하면서 발견한 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변을 조심스레 탐색하는 가 싶더니 어느 순간 재료를 마음껏 사용해도 된다는 걸 알면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들의 아지트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친구 한 두 명과 겨우 들어 갈만 한 본부를 만듭니다. 그 속에 들어가는 게 뭐 그리 좋은지 그 속에서 키득댑니다.
아이들은 왜 자기들만이 공간을 원할까요?
자기 스케일에 맞는 자기만의 공간을 원하는 것은 비단 어린이뿐일까요?
2차세계대전 당시 식민제국주의의 이론적 토대가 된 '레벤스라움 living spac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우월한 우리 국민이 생활하기에 생활권역이 너무 좁다. 그래서 식민지 개척이 불가피하다는 식으로 침략을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가깝께는 일본이 이를 차용하여 '대동아공영'이라는 이름으로 아시아 식민정책을 정당화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이이고 어른이고 자기 생활영역의 스케일이 다 다르고 저마다 자기 영역이 좁다고 생각하는데서 모든 비극이 시작됩니다. 모두가 공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보통은 '힘'의 논리로 불만을 잠재웁니다. 힘이 없거나 자본이 없거나 정보가 부족한 사람들은 '부족한 공간'을 그냥 감당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이 세상에 올 때 철저한 약자로 옵니다. 만일 신뢰할 만한 어른의 보호가 없다면 어린아이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또한 아이들은 철저한 이방인으로 이 땅에 옵니다. 이미 구성되어 있는 세상의 문화, 풍습, 관습, 뭐 하나 미리 알고 온 경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이 땅에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안합니다. 불안한 세상에 태어나 본인이 할 수 있는 기술이라곤 약간의 귀여움과 울음과 일탈 밖에 없습니다. 이 세 가지 기술만 가지고 험준한 영유아기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이상하게도 작은 공간을 좋아합니다. 어떤 어른들은 갑갑증을 느낄 크기이지만 아이들은 그런 공간을 참으로 좋아합니다. 심지어 숨바꼭질할 때 자기 머리만 이불속에 넣어 놓고선 자신은 안전하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실재적으로 완벽한 차단보다는 본인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그 느낌을 통해서 안정감을 얻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아이들을 보호해주는 것은 건물과 같은 실체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따뜻하고 포근하게 자신을 감싸주는 그 안전한 느낌을 본질적으로 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는 아직 정보를 객관적으로 처리하는 인지능력이 부족해서 일수 있지만 이러한 안정된 감각을 원하는 것은 거의 본성이라고 보입니다.
어린이에게는 권력투쟁, 정보독점을 통해 경쟁 우위에 서서 공간을 차지할 능력이 없으므로 아이들이 이러한 느낌을 획득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바로 신뢰할만한 보호자를 통해 이 느낌을 얻게 됩니다. 이 보호자가 없거나 신뢰할만하지 못한 사람인 경우에는 어린이는 마치 벌거 벗은 채 전쟁터에 내보내진 모양이 되고 맙니다. 여린 맨살로 모든 공격과 상처를 받아내는 것 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사회를 신뢰하지 못하고 상처 받은 아이는 자라나서 사회 전체의 부담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제가 어릴 적 살던 주택에는 특이한 공간이 하나 있었습니다. 누님들이 사용하는 방에는 문을 열면 기어 올라가는 차가운 시멘트 계단이 하나 나왔습니다. 마치 마법의 계단과 같았습니다. 그 문을 열면 시큰하고 퀴퀴한 냄새가 물씬 풍겨져 나왔습니다. 계단을 올라가면 어린 내가 겨우 앉을 수 있을 만한 높이의 다락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온갖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하교 후 상급학교에 다니고 있는 누나들이 돌아올 때까지 홀로 시간을 보낸 적이 많았습니다. 심심할 때면 그 공간에 들어가 여러 기물들을 가지고 놀거나 조그마한 창문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왜 어린 시절의 나는 그 음습하고 쾌쾌한 곳을 굳이 정기적으로 기어 올라갔을까요? 별로 위생적이지 않은 그 공간에 들어가서 도대체 나는 무엇을 얻으려고 했던 것일까요?
아이에게는 이 세상이 자신의 힘으로 컨트롤 불가능한 것들 투성입니다. 거대한 가구, 기계, 연장, 도구, 자동차 등 컨트롤 불가능한 물건들로 가득합니다. 심지어 초등 일 학년이 가위질만 잘해도 교육 성공이라고 합니다. 반면 항상 모든 기물의 사용권을 승인하는 중심에는 어른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자기만의 것을 찾기 위해서 구석진 곳, 음습한 곳, 굳이 어른들이 어른들의 시선이 닿지 않은 장소로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다락방은 키 작은 내가 전유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라는 것을 어린이였던 저는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주방은 어머니의 공간이었습니다. 방은 누나의 것이었습니다. 안방의 tv는 부모님의 것이었습니다. 키 작은 제가 전유할 수 있는 공간은 습한 냄새나는 다락 공간이 유일했습니다. 나의 최후의 피난처였습니다.
어른들은 어린이들을 자신이 감시 가능한 시야 안에 두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안정적으로 애착 시기를 보낸 아이라면 조금만 커도 어른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을 찾아 잘도 도망 다닙니다. 하지만 이것도 여유 공간이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애초에 관리자의 시선을 피할 수 없도록 팬옵티콘처럼 설계된 고밀도의 시공간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유명 소아정신과 의사와 연예인이 나와 상담을 하는 프로그램에서 마음 둘 곳 없는 둘째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나오지 않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동생들과 언니와 부모의 잔소리로부터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화장실 변기 위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린이들의 공간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고 진지한 문제입니다. 어른들에게 적용해 보면 전 세계를 전쟁의 광기로 내몰 만큼 심각했던 '레벤스라움'의 문제입니다. 아이들이라고 그 문제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돈이 없어서 좁은 집에 사는데 그럼 어떡하냐?"
재화의 분배와 같이 너무 큰 문제는 제가 다룰만한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두 가지 관점에서 공감을 호소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모든 문제가 개인의 능력 문제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호소하고 싶습니다. 주로 능력 있고 사회적으로 성공하신 분들이 이런 입장을 주로 가지고 계십니다. 본인의 인생 경험에서 볼 때 이 명제는 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인의 성공과 노력 이면에는 분명 이미 주어진 자원들이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부모에게 받은 게 하나도 없어도 성공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만큼 노력을 많이 하신 것에 대해 사회가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건강한 인격과 삶을 긍정할 수 있는 태도 그리고 성실한 체력 등.. 이 보이지 않는 선물들을 어딘가로부터 받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의 성공적인 삶을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어려서 신뢰할 만한 보호자를 경험하지 못한 어린이는 커서 사회적 부채가 되어 돌아옵니다. 불우한 환경에서도 잘 큰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인생의 중간중간 선물과 같은 스승, 친구, 선배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이를 잘 알고 있기때문에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는 우월하고 능력이 되는 집단이기 때문에 약한 집단을 우위에 서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는 히틀러의 '레벤스라움'과 닮아있습니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논리로 아픔을 겪은 역사가 있는데 우리가 또 다른 타자에게 아픔을 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두 번째 호소하고 싶은 지점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도보'와'거리'의 가치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어린이 청소년에게 집이 비극적인 환경일수록 거리가 더욱 중요해집니다. 예컨대 거리의 청소년들을 단순히 집으로 돌려 보내는 것이 해법이 아닙니다. 그 친구들은 집이 거리보다 더 지옥이기 때문에 길거리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해법은 거리의 순기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다소 빈곤한 집에서 채워질 수 없었던 기능들을 거리에서 채워줄 수 있는 '느슨한 공동체'라는 제2의 보호막이 필요합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거리를 활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시대의 어린이와 청소년은 도보에서 지워졌습니다. 학교-학원-집이라는 쳇바퀴 속에 12여 년을 보내고 난생처음 대학생활을 자유를 얻었는데 4-6년 뒤 백수라는 어두운 그늘이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도보에서 건강한 자기 삶을 살고 있는 다양한 어른들의 느슨한 관심을 받으면서 활보하고 다닐 수 있어야 합니다. 집안 환경이 넉넉지 않을수록 더욱더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착취당하지 않고 건강한 상식의 사장님 밑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어야 하며 어린아이는 옆집의 강아지를 대신 돌봐주거나 옆집이 휴가 간 기간 동안 그 집의 화분의 물을 주고 용돈벌이를 하는 이야기 책 속 주인공처럼 자기 수준 안에서 사회와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교육프로그램과 교육서비스 제공으로 다 채울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 종일 돌봄에 관한 의견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저는 현재 정부의 '종일 돌봄' '틈새 돌봄' 정책은 몇 가지 중요한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서 맞벌이 부부가 안심하고 아이를 맡길 수 있는 환경을 정부가 책임지고 만들어 준다는 취지입니다.
근본적으로 이 정책의 근간은 '아이'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국가경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좋은 취지 여부를 떠나서 여전히 어린이를 객체와 수단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정책의 의도야 어떻든 좋은 결과로 이어지면 되지 않느냐 하시겠지만 의도에는 철학이 반영되어 있고 철학은 실행에 있어서 전혀 다른 방침을 낳게 됩니다.
정책이 출산율 조절과 맞벌이 부모가 육아 부담 없이 계속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 설계된 정책과 어린이의 존재 자체와 삶을 위해 설계된 정책은 결이 매우 다르게 됩니다. 아이를 정책의 수단으로 생각하면 아이를 어른들의 시선과 사회로부터 분리시키고 사고 없이 관리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가 됩니다. 실제로 지역 돌봄 센터 들은 열악한 운영 환경 속에서 소수의 사명감 있는 활동가들과 빠듯한 운영비용으로 인해 비전문가들이 뒤섞여 허덕이면서 관리만 하기에도 벅찬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책이 아닌 아이의 존재에 목적을 두면 관점이 달라지게 됩니다. 아이에게 가장 좋은 환경은 무엇일까요? 부모나 어른이 느슨히 지켜보는 가운데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노는 것입니다. 일단 특정 공간 안에 특정 시간 동안 아이를 넣어 놓고 관리자에게 모두 책임지라고 하면 운영 방식은 뻔해집니다. '위험 부담을 최소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등학생들이 거의 중고등학생과 맞먹는 정신적 압박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실내에서 조용히 숙제나 하며 자아의 본성을 쳐서 복종하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이것이 국가가 원하는 인재상이고 교육정책이라면 국가는 더 이상 4차 산업혁명, AI 전문가, 미래의 먹거리 운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자율성이라는 토양이 없이 건강한 나무도 뿌리도 열매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하교 후 자동차 픽업 혹은 학원으로 방과 후 돌봄 공간으로... 책임과 관리의 공간으로 밀어 넣기 전에 중간지대가 있어야 합니다. 하교 중에 동네 공터에서 공놀이가 시작되면 가방 집어던지고 즉흥에서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집 저 집 놀러 다니기도 하고 어린이들끼리 약속을 잡고 인라인 스케이트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자기들만의 놀이를 기획 집행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여백'을 모조리 프로그램으로 채워 버리면 아이들 속의 '자발성'과 '호기심'이라는 불씨는 12-13살쯤 완벽히 꺼지게 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요즘 아이들은 사춘기가 빨리 온다'는 사회통념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라고 개인적으로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