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둥 놀이 둥지 어린이 탐험가들의 발견의 경로
윤혜정(예술교육가)
(긴 원통 위에 앉아서 중심을 잡으며 놀고 있는 아이들)
“지금은 밀어주는 사람이 없는데, 왜 움직이는 거지?”
“바람이 밀어주고 있잖아.” (실제로 가을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
(자신만의 중심 잡기 방법을 찾은 한 아이)
“드디어 내 소질을 발견한 것 같아!”
(주변의 다른 아이들 보다 더 신나 보이는 아이가 너무 궁금해서 다가갔다).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그냥 놀고 있어요.”
(밧줄 위를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아이)
“너무 무서워요. 어떻게 걸어가야 할까요?”
“OO이가 지금 한 것처럼 그렇게 계속 걸어가면 될 것 같은데?”
(아이는 몇 발자국 더 걸어가다가 밧줄 위에 앉아서 이동하는 방법으로 바꾸었다).
“와! 그렇게 걸어 갈수도 있었네!”
“이 걸음에 이름을 붙였어요. 게원(꽃게와 자신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온)걸음이요!”
11월의 첫 번째 토요일 오후, 양평의 빈둥 놀이터 어린이 탐험가(나는 예술/놀이를 통해 만나거 함께 하는 어린이/청소년들을 탐험가라고 표현한다)들의 생생한 언어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그 날의 수많은 말들 중, 일부분이지만, 이 글을 읽게 될 이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빈둥 어린이 탐험가들의 말들로 이 글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저 말을 공유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날 현장의 생생함을 오롯이 보고, 듣고, 느끼면서 다시 한 번 “왜 아이들이 ‘놀이하는 인간’으로서의 경험을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지”, “왜 아이들이 ‘놀이하는 인간’으로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재발견을 하게 된 나의 생각을 가장 직접적으로 뒷받침 해 줄 수 있는 근거라는 것 또한 먼저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앞서 소개한 빈둥 어린이 탐험가들의 말들은 그리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많은 아이들이 했을 법한, 실제로 주변의 아이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들이기도 하다. 지금은 성인이 된 나 또한 어린이였을 때, 자주 했던 말들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왜 그 말들이, 아이들이 놀이하는 인간으로서의 경험을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직접적인 이유라고 나는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나는 그 이유를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예술 작업을 하는 동안 처음으로 발견하게 되었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순간마다 그러한 발견은 설레임이자 감동이었다. 하지만 올 해는 코로나로 인해 아이들과 실제로 만날 수 없게 되면서, 그러한 발견의 즐거움과 설레임을 제법 오랜 시간 경험하지 못 하고 있다가, 이번에 빈둥 어린이 탐험가들의 현장에 초대 받게 되어, 오랜만에 그 설레이는 발견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 특별해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그 말들은 어떻게 말이 되어, 아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흘러나오게 되었을까? 나는 그 말의 주인공이 아닌, 그저 호기심 많은 관찰자이자 초대 받은 한 사람일뿐이지만, 그 한 마디 속에 담긴 그 아이들의 수많은 과정이 그냥 사라져버리지 않도록, 이 글을 통해서나마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것이다.
그 말들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분명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 날, 빈둥 어린이 탐험가들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어디서나 쉽게 들을 수 있을 법한 아이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들을! 과장된, 거창한 표현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아이들이 왜 ‘놀이하는 인간’으로서의 경험을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지가 전혀 과장된, 거창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놀이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게 될, 놀이에 대한 정의는 무엇일까?
아이들의 놀이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를 알아차리기 전까지, 내가 생각하는 놀이는 ‘말 그대로 그냥 노는 것’, ‘아이들, 그 중에서도 좀 더 어린 아이들이 하는 즐거운 활동’ 정도였다. 그래서 유아나 초등학생들과 수업을 할 때에는 ‘음악 놀이’, ‘연극 놀이’라는 제목을 붙이면서도, 중학생부터는 수업에 ‘놀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주저하게 되었다. 학생들 입장에서도, 학교 선생님들 입장에서도, 학부모들 입장에서도, 수업에 ‘놀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수업이 학생들의 연령대와 맞지 않는다고 오해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아예 ‘놀이’라는 이름 자체를 붙이지 않게 되었다.
사실, 지금도 여전히 청소년들과의 수업에서는 ‘놀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에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놀이에 담긴 기술적, 예술적, 사회적 요소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놀이는 그냥 놀이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나의 생각을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빈둥 어린이 탐험가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지금까지 각 자 생각하고 있던 ‘놀이’의 정의에 대해 흥미를 갖고 새롭게 질문해보는 것은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6살 아이든, 10살 아이든, 13살 아이든, 자기 스스로, 자유롭게, 간섭 없이 놀아본 적이, 아이들 각 자의 삶에서 얼마나 될까? 거기에 더하여, 자기 스스로 자유롭게 놀거나 무언가를 하는 것에 대해 책임감까지 가져 본 적이, 얼마나 될까?
위험하기 때문에, 아직 어리기 때문에, 아이 스스로 놀거나 무언가를 하는 것을 그냥 지켜보는 것이 생각보다 많은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또는 당연하게 아이들의 그러한 과정에 개입을 하는 경우가 자주 일어난다. 주변 어른들의 그러한 모습/행동을 무조건 잘 못 됐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가 오롯이 하는 것을 그저 바라봐 주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빈둥 놀이터를 계획/준비하고 실천해나가고 있는 플레이 워커들은 어쩌면, 스스로 오롯이 해낼 수 있는 아이들과, 그 과정을 개입 없이, 충분히 지켜봐 줄 수 있는 부모님들 사이에서 중간 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이번에 빈둥 놀이터에서 어린이 탐험가들과 플레이워커들, 그리고 부모님들을 보며 느낄 수 있었다.
1. 아이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충분히, 하지만 ‘책임감’ 있게 하는 것. 끝까지 완성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완성을 하지 못 했다고 해서 실패나 중도 하차가 아니라는 것. 중요한 것은, 아이 스스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계획하고, 선택하고, 도전하고, 때로는 실패하면서, 책임감 있게 해보는 것!
2. 부모님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하는 것에 개입하지 않는, 말처럼 쉽지 않은 인내의 과정을 ‘놀이하듯이’ 해 보는 것. 순간적으로 아이에게 말이나 행동으로 개입하고 싶은 충동을 실제로 하지 않음으로서 아이에게서 수많은 것들을 발견해낼 수 있다는 기대감을 즐거이 가져보는 것.
“아이가 잘 해야 할 텐데” 라는 기대감과는 조금 다른, “아이에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는 흥미로운 기대감을 가져보는 것.
3. 플레이 워커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특히 어쩌면 부모님들이 보시기에는 특별한 계획도, 준비도 없이 그냥 아이들 맘대로 해봐! 라고 하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을 테지만, 그래서 톱 같은 도구들을 아이들이 쓰면서 놀게 하는 것에 당황 할 수도 있을 테지만, 아이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멋지게, 각자에게 내재되어 있는 기술적, 사회적, 예술적 역량이 우물처럼 솟아날 수 있도록 기회, 공간, 시간을 주면서, 꼭 필요한 순간에만 아이들의 작업에 개입을 하는, 느슨한 듯 보이는 촘촘함으로 아이들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
빈둥의 플레이 워커들과 어린이 탐험가들이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만날 때마다의 약속은 “스스로, 자유롭게, 하지만 ‘책임감’ 있게!”일 것이다. 그 책임감이라는 것은, “너희가 하고 싶은 대로 한 거니까, 그와 관련한, 특히 위험한 상황에 대한 책임감도 너희가 지는 거야.”가 아니다. 빈둥에서의 책임감이란, “너희가 스스로, 자유롭게 놀고,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는 만큼, 책임감 또한 충분히, 멋지게 발휘할 수 있을 거야!”라는 믿음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어른이 자신들을 온전히 믿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에서부터 이미 힘찬 첫 발자국을 띠게 되는 것이다.
빈둥 어린이 탐험가들의 여정을 매주 본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키만한 삽으로 모래를 한 가득 퍼내는 모습에서, 밧줄 위를 아슬아슬하게, 살짝 떨면서도, 한 걸음씩 내딛는 모습에서, 그 누구보다도 개구쟁이 같던 아이가 톱질을 하는 순간에는 그 누구보다도 진지한 모습에서, 언제, 어떻게 꽈당하고 굴러 떨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각적으로 중심을 잡아나가는 모습에서,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 즐거운 책임감으로 도전하고, 또 도전하는 아이들’과 ‘그러한 아이들의 도전을 바라봐주고, 기다려주고, 적절한 말과 행동으로 응원해주는 플레이워커’, 그리고 ‘여전히 불안한 듯 보이지만, 그럼에도 아이가 오롯이 해내는, 어쩌면 그 전까지 발견하지 못 했던 아이의 수많은 역량들을 보게 된 부모님’의 모습이, 마치 역동적으로 순환하는 거대한 삼각형처럼 느껴졌다.
앞에서 잠깐, 놀이에 담긴 기술적, 예술적, 사회적 요소에 대해 얘기한 것을 두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놀이에 대해 너무 과찬을 하는 것 아닌가라는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혹시 이 글을 읽게 될 사람들 중에 빈둥 놀이터에서 어린이 탐험가들의 모습/과정을 잠깐이라도 보신 분들이 계신다면, 그렇지 않더라도, 그냥 평범한 동네 놀이터에서 또는 집에서, 학교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신 분들이 계신다면, 그 모습을 잠깐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일반적인 놀이터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가운데가 뻥 뚫린 길다란 원통형의 놀이 기구(빈둥에서는 놀이 기구가 된다)에 한 아이가 앉아서 엉덩이의 움직임으로 앞뒤로 데굴데굴 굴리고 있다. 원통형이기 때문에, 아이는 곧이어 중심을 잃고 땅 위로 떨어진다. 다시 한 번 도전한다. 살살 굴리면서 떨어지지 않는 요령을 터득해냈다! 그러면서 자신감이 생겨서 좀 더 강렬하게 굴려본다. 아이는 이전보다 더 강렬하게 땅 위로 떨어졌다. 다시 한 번 했을 때는, 그냥 떨어진 것이 아니라 넘어졌다. 아이는 또 다시 도전한다. 이때 그 모습을 본 다른 아이들이 재미있어 보였는지, 함께 해보자고 한다. 함께 힘을 합치면, 더 강렬하게 굴려도 중심을 잘 잡고 있으면서 스릴을 즐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몇 몇 아이들은 엉덩이를 뒤에서 앞으로, 또 몇몇 아이들은 앞에서 뒤로 굴리다보니, 호흡이 맞지 않아, 놀이 기구의 움직임이 더 역동적이 된 만큼, 한두 명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이쪽 저쪽으로, 역동적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시 도전한다. 이때 “나랑 oo이랑 앞뒤에서 밀어주면 떨어지지 않고 재밌게 중심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자, 아이들은 충분히 호흡을 맞춘 듯 한 멋진 군무 같은 움직임으로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앞뒤에서 밀어주기 역할을 처음으로 제안했던 아이들 둘 만 하는 것이 미안했던지, 다른 아이들이 스스로, 자연스럽게 순서를 정해 밀어주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때 4~5살 정도의 어린 동생들도 함께 하고 싶다고 하니, 언니/오빠/누나/형들이 자기 혼자 중심을 잡고 있는 것이 여전히 쉽지 않음에도, 어린 동생들까지 곁에 두고, 안전하게, 그러면서도 재밌게 중심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순간적으로, 몸의 감각으로 터득해내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중심 잡기에 대한) 나만의 방법, 소질을 찾은 것 같아!”라고 뿌듯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얘기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재미있게 노는 것 같지만, 물론 그 당시에 아이들은 실제로도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굴러 떨어지고, 깔깔대고, 온 몸이 흙투성이가 되는 중에, 아이들은 어떻게 하면 중심을 잘 잡을 수 있을지에 대한 저마다의 기술을 그 누구의 도움도 아닌, 오롯이 자신의 몸의 감각과 의지, 그리고 흥미를 갖고 발견해내었다. 그것은 넘어지지 않기 위한, 중심을 잘 잡기 위한 기술이자, 고유한 움직임, 그리고 그 움직임을 통한 리듬감을 스스로 탐색/발견/표현해내고 있었다. 그 때 그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신 분들 중에 “아니, 그게 왜 예술인가요?”라고 질문한다면, “실제로 현대 무용수와 안무가들이 일상적인 움직임으로부터 창작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아이들은 자신만의 움직임, 안무를 만들고 있는걸요?”라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노래와 연주에만 리듬이 있는 것은 아니다. 노래를 부를 때도, 악기를 연주할 때에도 몸의 움직임은 항상 함께하기 때문이다. 음악 수업에서 ‘바디 퍼커션’이라는 수업을 하는 이유도, 우리 몸의 움직임을 통해 이미 다양한 리듬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새롭게 탐색하고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빈둥 놀이터에서 길다란 원통 기구에서 중심 잡기 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중심 잡기 기술, 자신만의 움직임/안무, 몸의 리듬, 협동심’을 자연스럽게, 재미있게 터득한 것이다. 그 누구의 도움도 아닌, 아이들 스스로!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배움이 있었다. 어쩌면 앞서 얘기한 것들보다 좀 더 중요한 배움일지도 모르겠다. 바로, ‘중심을 잃고 굴러 떨어지는 기술이자 움직임/안무, 몸의 리듬’이다! 아이들은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지면서도 “에잇! 자꾸 떨어지니까 재미없네. 그만 할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떨어지면 꺄르르 웃으면서, 빨개진 볼과 흙으로 뒤범벅 된 상태로 또 다시 원통 위로 올라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말 그대로 놀이하듯이, 감각적으로, 떨어지는 방법을 터득해냈다! 그리고 조금 덜 위험하게 떨어질 수 있는 멋진 방법까지 발견해냈고, 결국에는 떨어지지 않고, 멋지게, 여유롭게 중심을 잡고 그 순간의 움직임, 리듬, 함께 하는 즐거움을 오롯이 경험하고 있었다.
톱질은 차원이 다르지 않나요? 라고 누군가 질문한다면, 나는 그 날, 빈둥에서 직접 목격한, 엄청난 개구쟁이 인줄로만 알았으나, 엄청나게 진지하기까지 했던 한 어린이 탐험가의 모습을 소개하고 싶다.
방금 전 소개한 원통 놀이 기구에서 그 누구보다도 신나게 도전하고, 열정적으로 떨어지기를 반복하던 한 아이가 자신보다 형인 다른 아이가 톱질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신도 톱질을 하고 싶다고 플레이 워커에게 얘기했다. 나는 그 아이가 톱질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흥분하며 원통 놀이기구에서 놀던 그 아이의 방금 전까지의 그 역동적인 모습이 떠올랐다. 그 흥분이 여전히 아이의 빨개진 볼과 숨소리에서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톱질 또한 그와 비슷한 속도로, 흥분 속에서 하게 될까? 그 순간, 교실에서 함께 했던 몇 몇 아이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뼛속까지 개구쟁이인줄로만 알았던 아이들이 특히 만들기를 할 때, 그 누구보다도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아직 소근육이 튼튼하게 여물지 않았음에도 손가락을, 손을, 야무지게 움직이며, 리본 묶기를 여러 번 실패하면서도, 유난히 미끌미끌한 천에 투명 테이프 붙이기를 여러 번 실패하면서도, 가위질이 여전히 서툴지만, 단 한 번도 짜증내지 않고, 속상해하지 않고, 도전하고, 도전하고, 또 도전했던 그 아이들이 생각났다. 방금 전 까지도 프레스토(매우 빠르게)였던 아이들이 모데라토(보통 빠르기), 안단테(느리게)가 되어 오롯이 자신의 작업의 순간에 몰입하는 것이다. 그러한 순간을 여러 번 마주하게 되면서, 아이들에게는 단 하나의 속도가 아닌, 다양한 속도가 있고, 선생님이나 부모님의 적절한 가이드만 있으면, 때로는 스스로 그 다양한 속도들 중에서 그 순간에, 상황에 맞는 속도가 무엇인지를 아이들은 감각적으로 알아차리고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잠시 예전에 교실에서 만났던 아이들의 이야기로 돌아갔는데, 다시 빈둥의 어린이 탐험가로 돌아온다면, 방금 전까지 매우 빠른, 그 매우 빠름에서 더더욱 빠른 속도로 놀이에 몰입했던 그 어린이 탐험가는 톱질을 하기 위해, 플레이워커의, 부모님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수많은 속도들 중 비교적 차분한 ‘안단테(느리게)’의 속도가 되어 침착하게, 진지하게, 열정적으로 톱질에 몰입하고 있었다. 곁에 있던 플레이워커와 부모님은 톱질을 하고 있는 아이가 스스로 해내는 모습을 바라봐 주었다. 아이의 눈빛과 반복적인 톱질의 움직임과 리듬에서, 위험 할 수도 있는 톱질을 위험하지 않게, 즐기면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아이 스스로 너무나도 잘 알아차리면서 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원통 놀이기구를 데굴데굴 굴리면서 놀든, 톱질을 하든, 단단한 밧줄을 거대한 나무들에 연결하여 무언가를 만들어내든, 아이들에 의한 다양한 작업 과정 속에서 크고 작은 수많은 예측불가능한 상황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아이가 전혀 상상하지 못 했던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당황스럽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예측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생각보다 덜 당황스러워 한다는 것을 빈둥 어린이 탐험가들 각 자의, 때로는 함께 해나가는 작업들을 엿보면서 발견하고 또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이건 뭐지? 생각지도 못 했는데... 아! 그런데 이렇게 되고 보니,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어! 그럼, 그렇게 한 번 해볼까?”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아이들은 또 다른 가능성을 스스로 발견해내었고, 그렇게 예측불가능함의 짜릿한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내가 그 아이들이 아니고, 실제로 그 아이들에게 질문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을 테지만, 아마도 그 순간에 반짝! 하고 떠오른 그 예측불가능한 상황들은 말 그대로 반짝! 하고 떠올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 내재되어 있던 것들이 이번 놀이의 과정에서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며 그 순간에 반짝! 하고 떠오른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이 글의 시작 부분에 등장했던, 빈둥 어린이 탐험가들의 말들로 돌아가 보고자 한다.
“지금은 밀어주는 사람이 없는데, 왜 움직이는 거지?”
“바람이 밀어주고 있잖아.”
“아...!”
“드디어 내 소질을 발견한 것 같아!”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그냥 놀고 있어요.”
“너무 무서워요. 어떻게 걸어가야 할까요?”
“OO이가 지금 한 것처럼 그렇게 계속 걸어가면 될 것 같은데?”
“와! 그렇게 걸어 갈수도 있었네!”
“이 걸음에 이름을 붙였어요. 게원(꽃게와 자신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온)걸음이요!”
아이들이 그 순간에, 그 한마디의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도전과 때로는 실패, 하지만 또 다시 도전, 도전 또 도전,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들을 만나 감각적으로 절제와 균형을 발휘하고... 웃고, 떠들고, 때로는 다투기도 하면서, 차분하게, 진지하게 몰입하기도 하면서... 얼마나 다양한 순간들과 이야기들이 아이의 목소리를 통해 단 한 마디의 말로 드러났을까? 라고 생각하니, 나의 두 눈으로 다 담아내지 못 한 , 그 날의 빈둥 어린이 탐험가들의 순간순간들이 더없이 예쁘고, 멋지고, 감동스러운 것이다.
아이들은 놀이하면서 스스로, 감각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들을 배워나간다. 더 이상 놀면 안 될 것 같은(‘놀이’라는 단어의 고정관념 때문에?) 청소년, 성인들에게도 놀이는 여전히 중요한 삶의 과정이 아닐까? 그러한 이유로, 아이뿐만 아니라, 부모님, 학교에서는 선생님들 역시도 ‘지속적인 놀이’의 과정을 즐거이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의 내면에 숨 쉬고 있는 수많은 반짝거림들은 스스로, 자유롭게, 책임감과 함께 몸을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가운데, 탐색하고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놀이’에 대해 ‘지속적인 놀이’에 대해 의문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우선, 몸으로 직접 놀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집에서도, 방에서도, 책상 위에서도, 각 자의 방법으로 우선, 직접 놀아본다면 ‘놀이’, ‘지속적인 놀이’, ‘놀이하는 인간’에 대해 이전보다 한 뼘 더 알아차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