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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GWORK STUDIO 최형욱 Apr 22. 2021

메타버스 속 어린이 :
게임은 질병인가?

지난 2021년 3월 10일  로블록스사가 미국증시에 상장 하였습니다. 무려 기업가치가 300억달러(약34조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로블록스는 “가상 세계를 스스로 창조하고 실시간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비디오게임 플랫폼으로 일종의 샌드박스(Sand Box, 유저가 마음대로 콘텐츠를 제작하고 즐기는 서비스)로 분류된 됩니다. 블록 형태의 아바타가 만들어지면 모든 행동은 자유이며 타인이 만든 가상 세계를 탐험할 수도 있고, 자신이 직접 게임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CNBC)  미국 어린이 청소년 사이에서는 이미 유투브 보다 평균 접속시간이 훨씬 앞질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익숙한 메타버스 세계는  마인크래프트, 닌텐도의 동물의 숲 , 일명 lol 리그오브레전드, 최근 네이버 자회사에서 만든 제페토 등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메타버스>의 저자 김상균 교수는 어린이 청소년들이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거나 충동적 성향을 보이는 것은 비단 게임의 영향이라기보다 원래 청소년기의 전전두피질이 덜 발달한 뇌의 특성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자유롭고 아름다운 인간만이 참됨 목적을 이룰 수 있는데 인간은 ‘놀이충동’를 통해 감각적 사고와 이성적 사고를 조화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가상현실이 있기 전에도 어린이 청소년들 사이에는 폭력과 충동이 있었습니다. 또한 통계에 잡히지 않는 잔학한 사건 사고도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최근 청소년들이 가상세계에서 만나 수영장에서 놀면서 ‘벚어봐’ 등 성희롱적 발언과 아바타를 통해 성적인 제스쳐를 구현해 논란이 되었습니다. 가상 세계에서 폭언과 희롱을 한 아이의 본래 성향은 겉으로 숨겨져 있을뿐 본래 내면에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학교폭력위원회에 불려나가면 가장 많이 하시는 발언입니다. “우리 아이는 집에서는 절대 그러지 않습니다. 우리아이가 그럴 리가 없어요.” 아이들은 언제나 상황에 맞는 페르소나를 사용할 뿐입니다.  다만 메타버스 세계가 익명이라는 가면을 쓰고 자신의 욕망을 필터 없이 드러내도 안전 하다고 느끼게 만들었을 따름입니다.  다만가상세계에서 자신의 행동이 문제가 될시 경찰이 ip주소를 추적해서  발각될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 덜 발달한 전전두피질의 추론적 사고가 따라가지 못했을 뿐입니다.  


로블럭스나 마인크레프트같은  세계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에 대해  부모들은 이중적인 시각으로 헷갈려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온라인 게임에 비해 건전히 논다는 의견입니다. 한때 크게 유행한 마인크래프트 같은 경우 건축적 수학적 사고를 하고 기획 집행하며 스스로 만들어 갈수 있다는 점이 부모를 조금 안심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악한 그래픽은 자극적이고 리얼한 그래픽보다 안심하게 하는 기능도 있었던 것 습니다. 실재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마인크래프트를 인수한 목적이 코딩 수학교육등 교육플랫폼으로 활용하기 위함 입니다. 


다른 한편으론 특별한 목적없이 돌아 다니며 대화하는 모습이 못마땅하다는 시각입니다. 10대 초반 어린이부터 청소년기까지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특별한 목적없이 돌아다니면 안되는 것일까요?  자고로 사회는 특별한 목적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은 ‘무뢰배’라고 명명하며 불안하고 사고를 만들어내거나 건달짓을 일삼거나 하는 등 사회 불안 요소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아파트 단지에는 주민이 아닌자가 어슬렁 거리면 필시 판촉행위를 하려는 사람이거나 범죄를 기획하는 사람으로 오해 받습니다. 회사 빌딩에서도 정직원 명패를 매지않은 사람이 어슬렁거리면 필시 제지를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거리는 어떻습니까?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다니는 사람이 이유없이 제지를 당한다면 그 존재는 이세계에 발 붙일 곳이 없다는 의미 입니다. 사회밖 존재로 규정하고 쫒아내는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특정 아파트단지 특정 빌딩에 출입 자격이 안되는 것도 서러운데 세계 자체에서 출입자격이 없는 것은 비극입니다. 


왜 아이들은 어슬렁 거리면 안될까요? 


 ‘학업’이라는 목적을 사회가 어린이청소년의 삶의 발달과제로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 시기 아이들은 학습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보는 것이죠. 그러므로 아이들이 가야할 곳은 학교, 공부방, 학원, 집 입니다. 이 합의 안에  ‘거리’는 없습니다.  특히 목적 없는 거리 활보는 대단히 위태로워 보이고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어슬렁 거림은 세계를 경험하고 이해하기 위해 가장 첫번재로 행하는 움직임입니다. 그런데 어린이 청소년에게 세계안에서 움직임은 제약 하고 오직 교과서 위에서 눈의 움직임과 학교안에서 규정된 프로그램안에서 움직임만 허용하게 된다면 아이들은 실재 세계를 어디서 배우게 될까요? 책과 인터넷과 동영상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현실에서 작동되지 않는 지식은 겉도는 지식이됩니다. 그래서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시험은 치뤄야하니 그냥 암기를 합니다. 암기는 겉돌고 진짜 지식으로 체화 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단기 기억력 테스트만 남게 됩니다. 시험의 변별력은 자기주도적 창의적 추론적 사고를 목표로 하는 출제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결국 ‘하기싫어도 이해안가도 얼마나 오래 참고 암기를 반복하느냐’ 를 증명하는 테스트가 됩니다. 이렇게 고도의 인내심 테스트를 통과한 최상위층이 우리사회의 엘리트 층이 됩니다. 그 엘리트들은 어떤 사고를 가지고 작동하게 될까요? 


다시 메타버스에서 어슬렁거리는 어린이 주제로 돌아오면, 현실에서 어슬렁거림이 허락되지 않으니 아이들은 메타버스에서 어슬렁거립니다. 사실 채워지지 않는 진짜 배움에대한 갈증을 가상세계에서 채우려하는 것입니다. 아마 메타버스에서 어슬렁거리는 아이들이 못마땅한 어른들은 현실에서 어슬렁거리는 어린이 청소년들 또한 못마땅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이미 오랜시간 코로나로 인해 집안에서 메타버스 세계에만 관심을 보이는 아이를 어떻게 해야할까요 ?


가장 최고의 대안은 진짜 세계가 보다흥미 진진하며 내가 해볼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경험을 점차 늘려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경주용 말을 타고 달리는 게임은 실제 말을 타는 경험과 견줄 수 없습니다. 실제 말은  게임의 경주와 달리 역동적으로 타고 달리기 까지 무척 오랜 훈련 시간이 필요합니다. 말들을 다루는 것도 어렵고 성격도 제각각입니다. 하지만 조금씩 선생님이 잡아주던 고삐를 제손으로 쥐고 점차 리듬에 맞추어 달리고 말과 교감하다보면 뇌가받는 쾌락 자극은 게임의 쾌락자극과 비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저희아이들은 시골이라 지역 승마장이 몇군데 있었고 교육청 지원으로 저렴하게  승마프로그램 참여가능했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시도할 수 없는 상태가 될 때, 삶의 의미와 동기를 잃어버렸을 때 삶을 놓아 버리게 됩니다. 극한의 유태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플랭클 박사는 그의 유명한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저서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가장 근원적인 치료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강한사람, 힘이 장사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살아남 아야 할 이유가 분명했던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살아 남았습니다. 희망의 이유가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조건이  인간을 야만상태로 몰아가는 상황에서 모두가 야만의 상태가 되지 않고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자유를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극한의 수용소에서 성자 아니면 짐승 두부류만 남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자유로 존엄함을 선택한 사람과 짐승적 처우에 짐승처럼 반응한 사람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내적동기로 자기다움을 선택할  있는 ‘마지막 자유 중요합니다. ‘자유 굶은 어린이 청소년들은  허기를 채우려고 무어라도 자신의 내면에 구겨 넣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내적 동기로 무언가를 일구고 시도할 수 없는 상태로 유년기를 계속 보낸 한 어린이를 상상해 봅니다. 그 어린아이는 어떤 어른으로 성장 했을까요? 지금 사회에 많은 문제가 되고 있는 인물들의 유년시절을 인터뷰해보면 어떤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교육계 종사자 사이에서 돌아 다니는 우스겟 농담이 하나 있습니다. 소위 좋은 학군에 사는 엄마가 아이를 지속적으로 관리해서 성공적으로 특목고, 미국 석박사에 포스트 닥터까지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른 후반이 다 되어 가는 그 아이가  엄마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엄마 !! 나 이제 뭐하면 되?” 


주어진 세계에서 본인이 형성하거나 기여할 것이 없을 때 아이들은 일탈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길 시도합니다. 

어른들이 제시한 획일적 기준 이외에 성취를 할 만한 영역이 없을 때 다른 방향으로 자아 형성의 욕구를 표현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가상세계 속 게임입니다. 게임의 큰 매력의 극대화된 작동 감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세계에서는 상상 이상의 것을 구현합니다. 초인적 능력이 여러 선택 옵션에 따라 극명하게 발휘됩니다.  게임 중독이 단순히 공부를 안 하게 만드는 나쁜 것이다 라고 비난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면에 아이들의 욕구가 어떻게 좌절 되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게임이 어떻게 아이들 세계에서 대체재로서 만족감을 주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게임을 해서 공부를 안한다라기 보다는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만한 도구가 그것 외에는 없기 때문에 게임을 하는 이 보다 진실에 가깝습니다. 게임에 빠져 있는 아이의 생활 반경을  유심이 살펴봅시다. 그 아이가 과연 이 세계에 자기 존재감을 인정받을 만한 영역이 남아 있던가요? 


 어른들의 가상세계

비단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만 적용되는 질문은 아닐 것입니다. 소위 30-40대 어른조차도 소수의 성공적 지위, 경제적 지위를 가진 사람 이외에 세계 형성과 기여를 통해 충분히 자기다움을 표현할  자리가 있을까요?

집을 자신의 능력으로 장만 할 수 있을까요? 가정을 자신의 땀으로 온전히 세울 수 있을까요? 자녀 교육비를 자신의 능력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까요? 심지어 적기에 결혼은 할 수 있을까요?  

이 모든 질문에 대해 대답이 자신이 없다면 어른들은 무엇을 통해 자기의 자신을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드러낼 수 있을까요?  


역대 최저의 출산율과 역대 최고의 공무원 시험 경쟁률은 별개의 수치가 아니라 모두 연결되어 있는 질문입니다우리는 과연 이 세계에서 형성하고 자리 잡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구를 실현할 수 있을까요? 집안이 특출 나지 않아도 그나마 정당하게 노력 한만큼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 국가고시 이외에 없기 때문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한 곳을 향해 달리는 것이 아닐까요? 젊은이들은 사실 크게 성공하는 것보다 공정함에 목말라 있습니다.  그나마 출신과 인맥 여부와 상관없이 공정한 보상을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이 국가 고시 밖에 없다는 판단은 아주 틀린 판단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성세대들의 젊은이들이 도전 정신이 부족하다는 등의 식어빠진 조언은 들어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젊은이들은 기성세대들이 일구어 놓은 공정하지 못한 토양 위에서 자라고 있는 어린 묘목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이 세계 형성과 자신의 형성에 기여할 수 없을 때 지나치게 안정함과 공정함에 매달리는 기울어진 측면을 보았습니다. 또 다른 극단적측면은  ‘치트’와 ‘요행’에 함께 가담하는 것입니다. 기성세대의 공범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70년대 말죽거리 신화에 대해 잘 알 고 있습니다.   80년대 3저 호황으로 인한 사회적 부가  부동산과 신도시 개발호재로 중산층에게 재분배되었음을 경험하였습니다. 부동산 불패신화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평범한 직장인들의 연봉보다 몇 년간 가만히 묵혀둔 부동산의 시세차익이 더 큽니다. 우리의 몇몇 성공적 부모들이 70-80년대 그러했든 지금은 30-40대도 그 신화에 동참합니다.   


또 다른 형식은 비트코인과 주식입니다. 부동산은 처음 종잣돈 마련이 어렵습니다. 도움을 받거나 십 년 가까이 모으지 않으면 작은 부동산 경매조차 뛰어들기 어렵습니다. 아니면 아슬아슬한 대출의 파도타기를 해야 합니다.  반면 주식이나 비트코인은 비교적 적은 종잣돈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20년 - 30년 근면 노동과 장기 저축을 해도 서울에 집 한칸 마련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기술 혁신으로 인해  과도기에 비트코인은 급격하게 널뛰기를 합니다.  몇억 몇백억 차익을 보았다는 소문이 종종 들립니다.   절제력 부족으로 빠져나오지 못하는 중독성과 생활리듬이 피폐해지는 문제는 차치하고 서라도 복권처럼 몇 백만 원 잃어버려도 그만이라는 각오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주변에도 심심치 않게 있습니다. 


어린이 청소년들의 가상 게임과 어른들의 첨단 기술자본 투자 시장과의 유사성이 이제 보이는  같습니다.


위 어린이들의 게임과 어른들의 게임판의  이면에는 결국  자유 문제가 숨겨져 있습니다.

어릴때 제가 나를 찾고 나를 아늑하게 보호할수 있는 장소로 어른들이 잘 들어오지 않는 쾌쾌하고 낮은 다락방을 찾았듯이 상대적으로 선택의 자유와 기회가 부족한 이들은  기성어른들이 잘 찾아올수 없는 ‘영토’를 개척하기 위해서 새로운 모험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론 기성 어른들은 이런 젊은이들의 비트코인 열풍과  어린이 십대들의  게임 과몰입을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물론 어른들이  젊은 세대와 미래세대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우려를 표현하시지만 그 불편함의 본질은 ‘아이들이 빠져있는 세계가 기성세대는 잘 모르는 새로운영토’ 라는데 있습니다. 자신이 한창젊은 때인 70-90년대 전성기를 통과하면서 쌓은 경험들이 유효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기성세대가 쌓아올린 기존의 유니버스에서는 자신이 최상위 경험자입니다.  후발 추종자들이 많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선발주자인 자신의 지위는 올라갑니다. 후배들에게 격려도 해주고 조언도 해주고 어려우면 도와도 줄수 있는 여유도 있습니다. 여기서 자연스러운 권위가 발생합니다. 나이들면서 이러한 권위의 자리를 서있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세대들은 기성세대가 세운 유니버스를 버리고 전혀 다른 메타유니버스를 세우고 그 안에서만 생활 합니다. 그리고 어른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굽신 거리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그안에서 억대 수입을 올리기도 하고 몇년 안에 수백억을 벌어 파이어족 선언을 하기도 합니다. 이를 바라보는 기성세대들은 불편합니다. 뭐라고 해야할지 애매해 집니다. 큰 나무 아래에서는 큰 나무가 자랄수 없습니다. 큰나무가 썩고 사라져야만 그 자리에 다시 새로운 큰 나무가 자랄 수 있습니다. 


저희집 아이들은 핸드폰도 없고 게임도 타자 연습외에는 하지 않습니다. 저 자신도 중학교때 삼국지 RPG 이후로 컴퓨터 게임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하는 어린이들에게 하지 말라고 말하기에 마음에 머뭇거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른들이 본질적인 ‘자유’의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대안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어른들 자신 조차도 ‘자유’와 이 세계에서 효능감 있는 삶, 자신다움을 찾는 삶을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불행한 어른은 불행한 어린이를 만듭니다.  


이 세계에서 ‘효능감’을 발휘하는 집단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이 모든 플랫폼을 기획하고 만들었던 엘리트 집단입니다. 세계적인 IT 기업 총수의 말 한마디에 비트코인 주가가 들썩입니다. 벌써 우리나라 3대 연예기획사는 발빠르게 국내신규 발표한 메타버스에 170억 규모의 투자를 하였습니다.  세계적인 금융자본들은 미국어린이 청소년이 대다수 이용하는 메타버스의 주식에 주목하고 있는 여론에 살살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기성세대가 일궈 놓은 부동산 위주의 세계를 훌훌 떠나 자유의 영토를 찾기 위해 젊은 세대들은 새로운 메타버스에서 자신만의 영토를 개척 할 수 있을까요? ‘나다움’을 거대 자본의 작전 아래서 찾을 수 있을까요? 내가 이세계에 기여하며 이 세계안에 긍정적으로 관계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경험을 과연 언제쯤 할 수 있을까요?  상위 1%이외에는 이러한 긍정적 경험을 할수 없도록 시스템 된 세상이라면 무언가 잘못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세상은 1%만 제외하곤 원래 삶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 일까요?  


위의 질문에 긍정적 답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 현재  젊은이들의 대답입니다. 기성세대가 문제라고 규정하는 대부분의 사안들은 문제가 아니라 기성세대가 제시한 삶의 방식에 대한 젊은 세대의 답변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종족을 이 땅에 남기지 않는 것으로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자신의 '자유'를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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