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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GWORK STUDIO 최형욱 Nov 23. 2021

놀이와 세계 형성의 욕구

어린이의 게임과 어른들의 게임의 유사성


어떤 아이들은 주변과  잘 어울리고 새로운 놀이들을 발견하면서 지루할 틈 없이  잘 노는 반면

어떤 아이들은 계속해서 ‘심심해!’를 외치며  끊임없이 주변 어른에게 무언가를 해달라고 매달리거나 

심지어 주변에 있는 친구들을 툭툭 건드리고 시비 걸음으로서 재미를 찾는 어린이를 종종 보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어린이의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자발적 동기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타오를 수 있을까요? 그리고 내적 동기가 계속 타오른 결과  어린이는 어떻게 발달하게 되는 것일까요?   


잘 알려졌다시피 문화(culture) 란 단어는 서구의 경작(cultivating)이라는 어원에서 왔습니다.  하지만 이 ‘문화’라는 번역 자체가 일제강점기 번역된 단어입니다. 즉 우리 스스로 서양의 ‘문화’라는 말을 해석하고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일제의 시각으로 재해석된 의미로서  받아들여졌다는 의미입니다. 

일제강점기 우리가 경험한 문화란 일제와 서구의 문명과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과 동의어였습니다. 고유의 전통은 전근대 봉건적이고 타파해야 할 구습이었습니다. 물론 조선 구한말 봉건적 구습과 적폐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의 생활양식을 천하게 여기고 굴종하는 자세를 민족성 안에 내재화하게 된 것은 아픈 흔적으로 우리에게 남아있습니다. 문화(文化)의 본래 뜻이  경작(耕作), 양생(養生), 섭생(攝生)의 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문화를 서구의 글과 예술 등 고매한 것으로 번역해서 받아들였습니다. 특히 일제가 스스로 앞장서서 학습하였던 서구의 인문고전 교양과 예술작품이라는 의미로 왜곡되어 전래되었습니다.       


가난한 학생 출신으로 대기업의 대표가 되었고 그리고 한 나라의 대통령까지 된 분의 이야기를 인상 깊게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산업화 현장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치열하게 살았고 성공신화를 쓰신 분이었습니다. 인터뷰 중 지나가듯 잠깐 말한 한 부분이 유독 기억에 남았습니다.  본인께서 CEO가 되고 나서 문화적인 교양을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많이 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문맥상 의미는 이러했습니다. 상류층 모임에서도 가난한 출신이라는 티가 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했다는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클래식 작곡가와 곡 명을 외우는 것이 외국 대표들과 만날 때 도움이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클래식에 무지하면, 귀빈들 사이에서 쪽팔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우리 안에 있는 문화에 대한 인식과 유사합니다. 심지어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외국 작가 이름을 많이 아는 것이 예술적 수준의 척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 것 같습니다.  속으로 “ 이것도 모르냐 어이구 OO아!”라고 말하는 것이죠.  유감스럽게도 그 전 대통령께서는 현재 감옥에 수감 중이십니다. 


이것이 ‘문화’라는 말의 왜곡된 근대성이 심어준 병폐의 일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일상생활하는 주변분들을 전시에 초대할 때면 종종 미술에 문외한이라서... 그런데 잘 가보지 않아서 라는 말이 먼저 나오곤 합니다. 소위 고급문화 high culture와 대중적인 저속한 하위문화 low culture를 양분해 놓고  소위 문화인이 된다는 것은 high culture를 습득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무언가 특정 문학이나 예술을 사랑하면 줄줄 꿰게 되어 있습니다. 소위 ‘덕후’들에게서 발견되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예컨대 제가 특정 일본 만화나 피규어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해서 못 배운 사람이라거나 창피를 당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내가 관심이 없다고 해서 저급한 취미생활이라고 폄훼할 이유도 없지 않을까요? 문화란 생활양식과 기호의 다름이지 수준의 높고 낮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문학이나 클래식이나 미술 작품에 대해 모른다고 해서 못 배운 사람이라거나 창피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미주와 유럽 등지를 여행하면서 왜 성지 순례하듯 미술관을 관람하고 오스트리아에 가면 클래식 공연을 꼭 듣고 모차르트 초콜릿을 꼭 사서 돌아오는 것일까요? (바로 제가 처음 간 유럽 신혼여행에서 이대로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예술을 삶과 분리된 의미로 받아들여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와 예술이 배운자 들과 상류층의 전유물이라는 왜곡된 인식이 자리 잡은 이유는 급격한 산업화와 근대화의 내홍을 겪은 우리에게  외국에 대한 열등감과 욕망이 뒤범벅되어 엉겨 붙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일 문화 culture라는 말이 본래 어원대로 무언가 인간이 생활하기 위해 가꾸고 만들어 가는 양생이나 섭생의 행위로 이해하면 어떻게 될까요? 피겨를 수집하는 것도 culture이고  정원을 가꾸는 것도 culture입니다. 내가 밥해 먹고 삶을 일구는 모든 행위들이 culture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 차이만 있을 뿐 위계는 없습니다.


문화를 고급과 저급 사이에 차별을 두는 것은 소위 ‘구별 짓기 기호’로 작용합니다.  ‘고급시계’가 부의 상징이 되고 ‘수입차가’ 경제적 지위의 기표가 되듯이 그 문화는 허상을 달래주는 기표가 됩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형편이 되지 않아도 ‘간지’를 중시하기 때문에 고급차를 대출로 사는 젊은 이처럼 그 문화가 표상하는 기표를 유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내적 동기에서 우러나와서 사랑하지 않았고 별로 즐기지도 않았지만 상류 문화의 기호를 소유했다는 것을 보여 줘야 했기에 열심히  학습해야 했다면 그것은 문화라기보다는 체면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체면 관습 예절도 생활양식이니 큰 범주에서는 문화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렇다면 culture(문화라고 번역된)의 본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경작한다는 것, 밭을 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제 생각으론 그것은 인간의 생명을 일구는 행위입니다.  인간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불안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타납니다. 주변에 모르는 것, 모르는 환경들, 위험해 보이는 것 투성입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찾고 헤매고 길을 갑니다. 그 길 위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싸우고 갈등하고 사랑합니다.  이 모든 행위들이 삶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상태는 생명이 없고 정지해 있는 상태이다. 무언가를 일구어야 할 이유가 없는 상태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울과 무기력과 고독의 상태를 두려워하고 이를 치유해야만 할 병리적 증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어린이에게 해로운 환경  : 어린이의 게임중독과 일탈의 이유 


우리는 아무것도 시도할 수 없는 상태가 될 때, 삶의 의미와 동기를 잃어버렸을 때 삶을 아무렇게나 놓아 버리게 됩니다. 극한의 유태인 수용소 상황에서 살아남은 빅터 플랭클 박사는 인간에게 필요한 가장 근원적인 치료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강한 사람 힘센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살아남아야 할 존재 이유가 분명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힘으로 아무것도 시도할 수 없는 환경은 어린이에게 매우 해로운 환경입니다자신의 내적 동기로 무언가를 일구고 시도할 수 없는 상태로 유년기를 계속 보낸 한 어린이를 상상해 봅니다.  그 어린아이는 지금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까요?         


교사들 사이에 우스개 농담이 하나 있습니다. 소위 좋은 학군에 사는 엄마가 아이를 지속적으로 관리해서 특목고등학교,  미국 유학에 포스트 닥터까지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엄마 나 이제 뭐하면 될까?” 


주어진 세계에서 본인이 형성하거나 기여할 것이 없을 때 아이들은 일탈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길 시도합니다. 

어른들이 제시한 획일적 기준 이외에(공부 등) 성취를 할만한 영역이 없을 때  다른 방향으로 세계 형성의 욕구를 표현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게임입니다. 게임의 큰 매력의 극대화된 작용 감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세계에서는 상상 이상의 것을 구현합니다. 초인적 능력이 여러 선택 옵션에 따라 극명하게 발휘됩니다.  게임중독이 단순히 공부를 안 하게 만드는 나쁜 것이다라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아이들의 욕구가 어떻게 좌절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게임이 어떻게 아이들 세계에서 대체제로서 충족감을 주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게임을 해서 공부를 안한다라기 보다는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만한 도구가 게임 외에는 없기 때문에 게임을 하는 이 좀 더 진실에 가깝습니다.  저도 유년기 시절  병 치료로 인해 학교에 가지 못하는 기간이 반년 정도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세상과 마주하는 유효한 방법은 386 컴퓨터로 게임하는 것과 만화책 대여 두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게임에 빠져 있는 아이의 생활 반경과 노선을 유심이 살펴봅시다. 그 아이가 과연 이 세계에 자기 존재감을 인정받을 만한 영역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던가요? 


 어른들의 놀이 


비단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만 적용되는 질문은 아닐 것입니다. 소위 30-40대 어른조차도 극소수의 성공적 지위, 경제적 지위를 가진 사람 이외에 세계 형성과 기여를 통해 충분히 자기다움을 표현할  자리가 있을까요?

집을 자신 만의 능력으로 세울 수 있을까요? 가정을 자신의 땀으로 온전히 세울 수 있을까요? 자녀 교육을 자신의 능력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까요? 심지여 집안이 뒷받침되지 않아도 결혼은 할 수 있을까요?  

이 모든 질문에 대해 대답이 자신이 없다면 어른들은 무엇을 통해 자기의 자기다움을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드러낼 수 있을까요?  


역대 최저의 출산율과 역대 최고의 공무원 시험 경쟁률 별개의 수치가 아니라 모두 연결되어 있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 세계에서 형성하고 자리 잡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구를 실현할 수 있을까요? 집안이 특출 나지 않아도 그나마 노력하면 정당하게 노력 한만큼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 공무원 시험 이외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많은 수의 젊은이들이 거기에 매달리는 것이 아닐까요?  젊은이들은 사실 크게 성공하는 것보다 공정함에 더욱 목말라 있습니다.  그나마 출신과 인맥 여부와 상관없이 공정한 보상을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이 공무직 밖에 없다는 판단은 아주 틀린 판단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 도전 정신이 부족하다는 등의 말은 식어 빠진 꼰대의 언어입니다. 왜냐하면 젊은이들은 기성세대들이 일구어 놓은 공정하지 못한 토양 위에서 자라고 있는 묘목과 같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이 세계 형성과 자신의 형성에 기여할 수 없을 때 지나치게 안정함과 공정함에 매달리는 기울어진 측면을 살펴보았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 극단은  ‘치트’와 ‘요행’에 함께 가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70년대 말죽거리 신화에 대해 잘 알 고 있습니다.  80년대 3저 호황으로 인한 사회적 부가 부동산과 신도시 개발호재로 중산층에게 재분배되었음을 경험하였습니다. 부동산 불패신화는 2021년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평범한 직장인들의 연봉보다 몇 년간 가만히 묵혀둔 부동산의 시세차익이 더 큽니다. 우리의 몇몇 성공적 부모들이 70-80년대 그러했든 지금은 30-40대도 그 신화에 동참합니다.   

또 다른  형식은 비트코인과 주식입니다. 부동산은 일단 처음 종잣돈 마련이 어렵습니다. 도움을 받거나 십 년 가까이 모으지 않으면  작은 부동산 물건 하나 경매에 뛰어들기 어렵습니다. 아니면 아슬아슬한 대출의 파도타기를 해야 합니다.  반면 주식이나 비트코인은 비교적 적은 종잣돈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20년 - 30년 근면 노동과 장기 저축을 해도 서울에 집한칸 마련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기술 혁신으로 인해  과도기적 초기에 있는 비트코인은 매우 급격하게 널뛰기를 합니다.  몇억 몇백억 차익을 보았다는 소문이 종종 들립니다.   절제력 부족으로 빠져나오지 못하는 중독성과 생활이 피폐해지는 문제는 둘째치고  적어도 복권처럼 몇 백만 원 잃어버려도 그만이라는 각오로 뛰어드는 주변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있습니다. 


어린이 청소년들의 게임과 어른들의 첨단 기술 자본주의 시장과의 유사성이 이제 보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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