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상상력
Floating island -남한강의 상상력
최형욱(시각예술)
◼︎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의 남한강 내륙여행
구한말, 영국 왕립 지리학회 소속의 62세 영국 부인이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내륙을 여행하였다.
“한강은 강원도와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수많은 지류를 형성한 강으로 국경에 있는 압록강 다음으로 길다. 한강은 조선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 데 동쪽 발원지는 동해에서 25마일 정도 내륙으로 들어와 있으며 서쪽은 제물포에 이른다. 나는 동해에서 40마일 이내의 내륙까지 올라갔으므로 작은 배로 항해할 수 있는 한강의 길이는 170마일 정도라고 생각된다. 바닥에 흰모래가 훤히 들여다 보였고, 주로 화강암으로 된 황금빛의 자갈과 바위가 깔려 있었다. 강폭은 약 250야드로 항해하기 적당했다. 그러나 때때로 암벽으로 좁아지기도 하고 섬으로 나누어지기도 했다. 바닥은 자갈 투성이었고 잔물결이 상쾌하게 일고 있었다.
여울의 중심부는 넓고 조용하고 호수같이 깊은 녹색이고 20피트 깊이로 1-2마일 정도 지속된다. 분류점을 지나면 46개의 급류가 나타난다. 그들 중 대부분은 매우 위험해서 항해 하기가 불가능하다고까지 생각되었다. 강을 따라 이 지방의 중요한 특산물들이 서울로 운송되었고 거의 모든 생활필수품 소금 그리고 외래 물품들이 보부상을 통해서 항구로부터 운송되어 중요한 지점에 있는 내륙시장에 전달되었다. 내가 처음 여행한 10일 동안 보통 하루에 75대의 나룻배가 오르내렸고, 한강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강 전체를 여행하는 동안 단 1개의 다리도 없었지만 정부가 제공한 47개의 무료 나룻배를 통해 왕래하고 있었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1898-
그녀는 폭이 겨우 1.5미터밖에 안 되는 나룻배를 타고 사공과 통역자와 배 위에서 숙식하며 한강을 타고 내륙 여행을 하였다. 한강 나루터에서 출발하여 상류로 거슬러올라 영월까지 더 이상 나룻배가 들어갈 수 없는 지점까지 여행 하였고 다시 양수 두물머리로 내려와 북한강을 타고 춘천 화천을 지나 금강산까지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남한강을 타고 올라가면 영월 동해안 가까이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는 사실과 북한강을 타고 올라가면 금강산이 나온다는 사실은 내가 어릴 적 학교 지리시간에 배운적 없는 매우 낯선 개념이었다.
◼︎ 여울 : 탄 灘
“강이나 바다의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거나 하여, 물살이 세차게 흐르는 곳
뜻을 나타내는 水(물 수)와 음을 나타내는 難(어려울 난)이 합쳐진 형성자"
한강수계 곳곳에는 ‘탄’ 자가 붙은 지명이 많다. ‘탄’ 자는 여울을 의미한다. 그리고 좁은 길목 빠른속도로 흐르는 여울은 굵은 자갈과 반대편 유속이 느린 곳에는 넓은 모래사장을 동반한다.
대동여지도와 동여도에도 한강의 학여울(학탄) 양근(양평)의 큰 여울(대탄)이 주요 지명으로서 한강수계에 표시되어 있다. 그만큼 국가 입장에서 한강을 관리할 때 이 ‘여울’을 인지하는 것은 중요한 국정과제 중 하나였다는 의미이다
좀 더 세부적으로 양근군읍지(1899)등 지방 관할도를 살펴보면 현재 팔당댐 지역부터 병탄-월계탄-청탄-대탄-제탄-사탄-장탄-파내탄-세심탄으로 이어지는 여울들이 표기되어 있다. 한강 뱃길을 이용하는 모든 사람들이 유념해야 할 지명이었다.
여울은 사실 뱃사람에게 매우 위험한 곳이었다. 여울은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경고인 셈이다. 여울에는 좁고 세찬 물의 흐름이 있었고 바위 등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었다. 여울은 물자를 운송하고 사람을 태우고 이동하기에 거추장스러운 지형이었다. 당시 한강의 뱃사공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노를 젓고 물자를 운반하는 육체노동을 의미하지 않았다. 1970년대까지 현존했던 한강 뱃사공이 된다는 것은 물속의 지형, 여울과 보이지 않는 바위 자갈들, 급속한 흐름과 부드러운 흐름을 모두 이해하고 이 사이에서 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미끌어지는 종합직인 행위예술이었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로 거대한 바위 제거가 가능해졌고, 한강에 보와 댐이 놓이면서 여울은 이제 눈앞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여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여울이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여울은 나루터(진)와 상관관계를 맺는다.
자갈이 많고 물살이 급한 여울과 여울 사이에는 유속이 느리고 잔잔한 ‘진’이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물살이 빠른 여울은 무거운 자갈을 운반하고 상대적으로 유속이 느린 부분에는 가벼운 고운 모래가 쌓이게 된다. 즉 모래사장이 생기는 것이다. 금빛 모래사장과 반짝이고 찰랑이는 얕은 여울이 함께 있는 곳이 한강의 본래 모습이었다.
훗날 근대에 이르러서 물살이 빠른 여울은 배의 운송을 방해하는 요소로 보였고 남아도는 한강의 모래는 전국적인 콘크리트 토목 공사의 건설 자재로 재발견되었다.
비교적 구한말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었던 1973년 이전의 양강을 기억하고 계신 세대가 이제 아흔을 바라보고 계신다. 이분들의 기억을 마지막으로 '여울 : 탄' 자라는 글자는 우리의 기억 사전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역동적인 여울의 모습이 한강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하천은 ‘정비’라는 명목하게 원형을 잃어버렸다. 모래와 여울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다닌다. 좁게 굽이 치는 빠른 흐름의 여울은 주변에 모래톱을 수반한다. 하천 주변에 넓은 모래사장과 생태습지를 품고있고 그곳에는 동식물들의 보금자리가 된다. 우기에는 많은 강물을 흡수하고 건기에는 얕은 물이 흐른다. 한강은 본래 모습은 잔잔하게 고정된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 얕음과 깊음, 좁음과 넓음, 느림과 빠름이 공존하며 잔물결과 굽이치는 여울과 잔잔함이 어울어진 매우 역동적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강 주변으로 다양한 식생과 밀-보리농사, 주민들의 여가, 그리고 아이들의 놀이와 이야기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문명의 중심 환경이었다.
◼︎ 아낌없이 주는 한강 종합개발
김현옥 서울시장이 한강변을 따라 제1한강교에서 김포공항까지 자동차 전용도로를 개설하고 제방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지시한 것이 1966년이었다. 제방도로가 완성될 때쯤 그는 우연한 발견을 하였다. 제방 안쪽에 공유 수변에 꽤 넓은 땅이 발생한 것이다. 한강 종합개발계획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1967년 말부터 한강 여의도 건설이 시작되었다. 70년대 당시 서울시 도시개발국장을 역임한 고 손정목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잡초와 우거진 야산뿐이었던 강남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한강 개발이 먼저 이루어져야 했다. 그리고 한강 개발은 한강 상류의 다목적 댐(소양댐) 건설과 하나로 이어져 있는 사업이었다.
당시 서울시가 신문에 배포한 팸플릿에 한강 개발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한강의 종합적인 이용계획에 의하여
한강 치수의 완벽을 기하고
도시교통 완화에 기여하며
강변도시 및 도시개발의 참신한 기틀을 촉진하기 위하여
견고한 제방을 구축하여
고속화 강변도로를 건설하고
한강연안 및 여의도의 근대적 도시개발을 완수한다."
한강 제방공사로 발생한 택지들을 매각하는 것은 부수적인 이익이었다. 개발부지 매립사업에 건설부 장관을 통해 개발 면허를 받은 민간기업들이 참여하였다. 한강의 토사와 모래를 퍼올려 들여쌓은 제방 안쪽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업들이 개발한 부지에 아파트 건설 붐이 일기 시작했다. 즉 하천 공유지 매립공사는 정부와 기업들의 큰 이익 사업이 되었다.
“김현옥-양택식으로 이어지는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전반에 걸쳐 서울시 간부 중에는 수자원 전문가가 없었다. 따라서 서울시 간부중 소양강 다목적 댐이 생기면 한강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지는 가를 시장에게 상세히 보고하고 그에 대처한 치수계획 같은 것을 수립할 만한 인물이 없었던 것이다.”
“충분한 지형조사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물며 소양댐이 완성되면 강 넓이를 얼마나 좁힐 수 있다는 수리 모형실험을 한 단계도 아니었다. 조성될 택지의 넓이도 주먹구구식이었고 그 택지가 조성되자마자 팔린다는 확신이 섰던 것도 아니었다. 계획을 세우라는 명령에 따라 책상 위에서 간단한 길이 계산만 했을 뿐이었다. “
-손정목, 전 서울시 도시개발국장, 서울시립대 교수-
당시 서울의 리버 라인을 마음대로 변형할 수 있었던 집행자들은 서울의 미래와 모습에 대해 충분히 숙고할 시간이 있었을까? 당시 공직자들은 과도한 업무에 초인적인 힘으로 함몰되어 있었다. 또한 자신의 생각이라는 것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명령이 떨어지면 다음날 청와대에 차트 보고 하고 다음날 바로 언론에 터트리던 시대였다.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서 한강 제방도로를 만들었다는 표면적 이유도 근거가 빈약하다. 왜냐하면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래 한강 종합계획이 세워지던 66년까지 오랫동안 서울 한강 유역의 물난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서울시의 홍수는 소양강 댐이 한창 건설되어가던 72년에, 84년 충주댐이 준공되기 직전에 서울시에 대규모 물난리가 있었다. 정황적 의심뿐이지만 때 마침 동아시아 최대 댐이 준공을 바로 앞둔 시점에서 서울시에 물난리가 났다.
거대 다목적 댐이 완공 후에는 더욱더 홍수예방을 위한 하류의 수중 보는 거의 의미가 없다. 우리가 뉴스에서 접하는 팔당댐 방류 영상은 전력 생산용 댐인 팔당댐이 망가지지 않기 위해 방류하는 것이지 홍수 수위 조절은 이미 최상류의 소양강댐과 충주댐의 용량만으로 충분하다. 100년에 한 번 있을 대홍수에 대비되도록 만들어진 댐이기 때문이다.
만일 7-8월 강수가 집중되는 시기 직전에 다목적 댐을 충분히 비워 둔다면 하류 서울이 범람할 일이 없을 만큼 다목적 댐의 저장용량과 한강 고수부지의 제방 둑 높이는 충분히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90년대 이후에도 한 번씩 서울 마포구나 풍납동 등이 물난리가 나는 것은 한강의 제방과 상류의 댐이 역할을 못한 것이 아니라 지방하천의 지류 하수구 관리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댐과 한강은 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었다. 급격한 호우로 댐이 갑자기 방류를 해서 하류가 물에 잠긴 것이라면... 평소 전력생산과 용수공급 확보를 위해서 호우 직전 댐을 충분히 비워 놓지 않아서가 아닐까? 결국 자연재해가 아니라 시스템과 커뮤니케이션의 문제, 즉 인재라는 의미이다. 전력생산과 용수사용을 위해 물을 넉넉히 저장해 두겠다는 욕심으로 인해 댐을 충분히 비워두지 못했고 갑작스러운 호우로 인해 댐을 급하게 방류해야 했던 것은 아닐까?
2020년 발행된 국회 입법조사처의 보고서에 의하면 이러한 추론은 충분한 근거를 가진다. 기존의 댐을 증설하거나 댐의 높이를 높이는 방식의 구조적(하드웨어) 위주의 치수계획은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고 급변하는 기후위기 시대에 유연한 대처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추가로 댐을 높이 건설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펼치기보다 기존은 운영지침을 유연하고 합리적으로 운영하는 비구조적(소프트웨어) 대책으로도 홍수 대비를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논지이다.
◼︎깨끗한 물 아리수
18세기 기록에 의하면 서울의 청계천에 늘어가는 한양 인구로 인해 오물과 똥이 쌓여갔다. 당시 서울의 상수도는 깨끗한 우물물이었고 하수도는 따로 없었다. 청계천과 같은 지천이 하수도의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인구가 늘어가면서 우기에 똥물이 범람하였다. 그래서 영조 때 청계천에 누적된 슬러지를 퍼내는 대규모 치수공사가 있었다.
근세이후 점점 서울의 우물에서 맑은 물을 얻을 수 없게 되자 조금 더 먼 곳의 우물을 찾아 물동이를 이고 물을 옮기는 일이 노비와 여성과 아동의 일이 되었다. 물 긷는 일을 전업으로 하는 일군의 남자 운반 노동자 무리 속칭 '물장수'가 등장하였다. 물장수는 개항 후 외국인의 카메라에 자주 포착되었다.
근대식 상수도 사업은 한양에서 전차 사업을 하던 미국인 콜 브랜과 영국인 보스트윅이 고종으로부터 상수도 사업권을 얻어내면서 시작되었다. 1908년부터 하루 12,500톤의 물을 지금의 뚝도 취수구에서 끌어와 서울의 사대문과 용산 일대에 공급하기 시작하였다. 수도 부설 5년 만에 서울 가구의 1/3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수인성 전염병의 위험도가 그만큼 줄었다.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었다. 우물물은 노비나 하인 혹은 물장수가 길어다 주는 비용 외에는 공짜였지만 수도는 공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인이나 물장수가 길어다 줄 필요가 없을 만큼 개별 가정에 공급망을 갖춘 건 아니었다. 물 배달업은 여전히 필요했고 급수권 등 여러 사업의 권리가 거래 되었다.
1960년까지 서울의 상수도 보급률은 50%에 불과했다. 1970년에 85%로 늘어났다. 하지만 수돗물의 품질에 대한 의구심이 사라지진 않았다. 90년대까지도 수돗물의 안정성을 믿지 못한 시민들은 결명자나 보리차를 끓여마셨다. 하지만 그래도 물은 거의 공짜에 가깝다고 인식될 만큼 수돗세는 저렴했다. 가까운 미래에 물을 돈 주고 사 먹는 다는 말을 그 당시 아무도 믿지 않았다. 누가 물을 돈 주고 사 먹어? 하지만 지금은 당연히 물을 돈 주고 사 먹는 시대가 되었다. 1년에 1-20만 원의 정수기 관리 비용, 한 달에 4-5만 원의 정수 렌털사업, 좀 더 저렴한 방법으로 생수 드럼통을 배달시켜 먹거나 혹은 일반 가정집은 대형마트에서 1.5리터 12묶음을 사놓고 먹기도 한다. 없던 물관련 시장이 생겨났다.
1970년대까지 사실 한강 상수원의 수질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1970년대까지 정화시설은 기본적인 응집침전과 소량의 약품처리 후 상수원으로 공급하는 방식이었다. 이 정도만 해도 대부분의 세균은 제거되었다. 하지만 70년대 이후 고도 산업화되면서 산업폐기물과 화학물질이 섞인 하수는 더 이상 위와 같은 방식으로 정화할 수 없었다. 1980년대 이후 잠실보 하류의 취수장의 물은 더 이상 상수도로 사용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취수장은 잠실보 상류로 옮겨졌다.
팔당댐의 맑은물을 서울 1000만 시민에게 공급한다는 일반적인 믿음과 달리 실재로는 '풍납취수장'에서 영등포구의 물을, '강동 암사취수장'에서 강동구와 강남구의 물을, '뚝도 취수장'에서 중구, 용산구, 성동구 일대의 물을 그리고 덕소-삼패에 있는 '강북아리수정수센터'에서 노원구,은평구, 강북구의 물을 담당하고 있다. 실재 팔당댐의 '광암취수센터'의 물을 받아서 먹는 서울 시민은 송파구와 강동구 일부 지역뿐이다.
팔당댐 상류지역은 중복적으로 개발제한법, 상수원 보호법, 농업진흥구역제한, 신규 산업시설 건설 제한, 건폐율의 제한을 받고 있다. 즉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인근 비슷한 지방도시인 여주, 이천, 광주시에 비해 재산권 행사의 제약을 받고 있는 셈이다. 공공성 원리에 기반하여 서울 시민들은 수돗물 톤당 150원 정도의 물부담금을 더 내고 있다. 이 비용은 한강 상류지역의 고통을 분담한다는 목적으로 치수관리, 상수원 보호지구 환경관리, 교육복지 등 주민지원사업에 쓰이고 있다. 이 물 보조금을 매년 보조사업비 신청을 받아 분배를 한다. 도로포장, 주민 체육시설, 마을 농기계 구입, 꽃 심기 사업, 상류지역 지방학교 예술교육사업 등에 쓰이고 있다. 하지만 가장 기금 지출 비중이 제일 큰 것은 남한강 하천 인근의 땅을 매수하는 비용이다. 수변 1킬로 이내의 땅을 매물이 나오는 데로 수자원 공사에서 매입해서 녹지를 만드는 것이다. 결국 서울 시민을 위해 상류 지방을 청결하게 만드는 것이 정책의 주요한 목표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도-농 상생의 노력을 배반이라도하듯 대부분의 서울시민들은 팔당댐 아래에서 물을 길어 먹고 있다. 사실 팔당댐 아래로 하남, 남양주, 진접, 마석, 구리, 덕소에서 나오는 물들이 모두 합류되고 있다. 그리고 팔당댐이 현 2급수 유지를 위해서 팔당댐 근처 상류 지역만 행위 제한한다고 과연 한강의 오염이 막아질까? 경기도 광주시, 용인시로 부터오는 물들도 팔당댐으로 모인다. 양평의 남한강 물은 여주의 물과 같은 물이다. 여주에 많은 공장들에 팔당과 동일한 규제가 있던가? 더 상류로 올라가면 이천의 지류들도 여주 쪽으로 합류된다. 이천에는 유명 반도체 공장이 있지 않은가? 첨단 반도체의 감광액은 독극물이다. 잘 정화해서 흘려보내고 있으리라 믿고 사는 수밖에 없다. 남한강의 상류에는 충주댐이 있다. 충주는 사과의 도시이다. 농사철이 되면 사과 농약이 물안개를 이루는 도시이다. 과연 모든 행위를 철저하게 통제할수 있을까?
다시 말해 팔당댐이 천만 서울시민의 상수원이기 때문에 행위를 제한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말은 절반의 진실이다. 손으로 태양을 가리는 것이다. 천만 서울시민을 위해 팔당댐을 보호한다는 명분은 빈약한 논리 위에서 작동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한강의 수질이 악화된 것은 거슬러 올라가면 70년대 뉴딜 토목사업의 실험에 기인하였고, 댐 건설로 인해 느려진 유속과 쌓이는 토사, 그리고 한강 지천 관리의 문제, 서울 근교의 각종 산업시설 등 통제하기 어려운 종합적인 문제의 결과이다.
실재 서울 시민들은 여전히 팔당댐 이남에서 화학적 정화처리를 한 물을 먹고 있다. 대한민국의 발전은 공짜가 아니었다. 값을 스스로 치르고 있는 셈이다. 현재 안타깝게도 강동 암사와 자양 뚝도의 취수원도 오염도가 점점 심해지면서 전부 덕소-삼패 쪽으로 취수원을 병합하는 계획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문제는 비용이다. 서울과 거리가 점점 멀어질수록 상수도 공급 비용이 비싸질수 밖에 없다.
무엇을 위해 한강의 지형을 변화시켰는지 정확한 이유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만 현재 남아있다. 지금의 한강 지형을 만드신 분들은 대부분 작고 하셨거나 90대 이시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분들도 그 당시 자신들의 행위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잘 알지 못하고 열심히 실행하신 듯하다.
한강물을 깨끗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말은 겉보기에는 옳은 말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단지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는 부분이 서울에서 가까운 팔당댐이니까 팔당호 주변의 물만 2 급수를 유지하면 된다는 식인 것이다. 정치적 레토릭은 한 번 걸러서 숙고해서 들어야 한다. 정수기 필터는 수돗물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듣는 정보와 말에도 필터가 필요하다.
◼︎ 플로팅 아일랜드_떠돌아다니는 흙
양평의 양근섬 옆에는 높아진 수위로 인해 접근길이 막힌 작은 섬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남한강을 따라 충청도에서 흘러온 흙이 쌓여 섬이 되었다고 해서 떠드랑 섬이라고 전해진다. 설악의 울산바위 만큼이나 믿기 어려운 말이지만 전설과 신화는 문화적 상징으로서 일정부분 진실을 내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국전쟁 후 한강변의 복구 사업은 토목공사를 의미했다. 전쟁 직후 국가 재정의 58% 정도는 토목 건설비로 사용되었다. 토목건설 = 폐허 복구 =근대화 현대화라는 복구 - 개발 - 발전 프로세스의 경향성은 비교적 최근까지도 이어져 온다.
한강을 근대적으로 제어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대동아전쟁 수행을 위해 수력전기발전용 댐을 건설하면서부터이다. 한강수계에서는 대표적으로 화천댐(1944)과 청평댐(1944)이 수력발전용 댐으로 건설되었다. 그 외에도 수력 발전용 댐을 우리나라 곳곳에 건설하였는데 이는 일본 본토에서도 실험해 보지 못한 기술을 실험하는 플랫폼으로서 시도되었다. 식민지에서 검증된 기술을 거꾸로 일본 본토에 적용해보는 방식으로 이 시기 토목-건축-기술이 발전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식민지 정책에서 대부분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러일전쟁 직후 일본은 만주에 괴뢰국을 세우고 만주국에서 일본 본토 내에서 실험해 볼 수 없었던 여러 가지 기술들을 실험하였다. 철도, 항만, 도시건설, 토목 엔지니어링 등 수많은 근대화 실험을 진행하였고 검증된 기술들은 거꾸로 본토로 수입되었다. 이때 만주에서 근무했던 조선인 엔지니어와 군인들은 해방 후 우리나라로 돌아와서 주요 인사가 되었다. 그 군인 중 한 명이 고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사실 일제강점기 때만 하더라도 댐 건설기술이 우리나라 국토 지형에 큰 변화를 줄 정도는 아니었다. 60년대 후반 기획되어 74년에 완공된 소양댐은 3대 국책 사업 중 하나였다. 대통령이 직접 챙기는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다. 그 당시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사력댐(콘크리트 중력 댐이 아닌 돌과 모래로 쌓아서 만든)이었다. 이후 점진적으로 한강의 지형과 환경은 변화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토목 국책사업은 용수확보와 홍수조절이라는 표면적 목적 이외에 다른 목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산업화를 위해 기술력를 국산화하는 것이다. 일종의 뉴딜 기술 플랫폼으로서 기획된 사업이었다.
소양댐 건설 당시 우리나라에는 토목 건설 엔지니어링 기술이 없었으므로 최초 설계 시 프랑스나 일본의 전문가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공은 경험이 없었던 국내기업이 맡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없던 고가의 토목 기술 장비들을 최초로 들여와 사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증명된 기술력과 장비들은 국내 토목 건설사업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 신화의 중심에는 현대건설사가 있었다. 당시 현대 건설의 젊은 사장이 훗날 대통령이 되어서 4대강 치수사업을 기획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 시절 선진 기술력를 국산화하고 건설 개발을 통해 황무지 뿐인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변화하고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선한 일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국가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산업화 신화의 형성 과정에서 강과 관련된 주민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되었다. 이 신화는 그들(his)의 이야기(story)였다. 그리고 주인공의 무대는 서울이었다. 서울의 신화를 쓰기 위해 조연으로 소비된 한강 상류의 농촌지역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당시 아무도 없었다.
80년대 건설붐은 결과적으로 전국적인 건설 골재 난으로 이어졌다. 90년대 건설교통부는 남한강 양평-여주 구간의 골재를 채취하기 위한 대규모 연구용역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남한강의 자갈과 모래를 채취하였다. 90년대 남한강 일대에서는 거대한 관으로 모래들을 빨아들이는 공사를 하였다.
그 많던 남한강의 금빛 모래와 여울의 자갈들은 어디로 갔을까? 아마 80-90년대 건설된 신도시 아파트 콘크리트 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지 모르겠다.
2020년대, 현재 양평의 농지들은 대형 덤프트럭이 부지런히 오가며 흙이 메워지고 형질 변경을 기다리고 있다. 양평에 농지 주인들이 노령화되면서 더이상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농사를 지어 이윤을 창출하는 것보다 땅의 지가가 상승하는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이다. 형질 변경하여 판매하기 위해 농지를 메우고 있다. 그렇다면 그 많은 덤프트럭은 모두 어디서 오는 것일까? 가까운 남양주나 하남에는 대규모 신도시 건설이 한창 진행 중이다. 토목업자와 친분이 있는 한 어르신의 말씀에 의하면 남양주 하남 신도시에서 양평으로 들어온 흙차가 거의 600만 대 분량이라고 전한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겠지만 업자들 사이에서 그만큼 체감적으로 많은 분량의 덤프트럭이 양평의 농지를 메우는 데 사용되었다는 의미이다.
흙은 의외로 발이 달려있다. 시골과 도시 하천과 산을 오가며 뒤섞이고 버무리고 다져지고 있다. 지금도 양평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설을 위해 산을 깎고 있다. 현장에서 나온 질 좋은 흙은 토목 골재로서 옮겨지고 있다. 양평의 흙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닌다. 떠돌아다니는 흙은 양평과 같은 도시 개발의 신화를 위해 자신의 살을 내어주는 주변부 대지에 대한 비유적 진실이다.
◼︎ 오래된 한강의 상상력
어르신과 대화가 무르익던 중 댐이 생기기 전 양근-오빈리 일대의 얕은 물가와 여러 모양의 바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각 바위들은 모양에 따라 기능도 제 각각이었다. 넓은 바위는 아낙들의 빨래터여서 빨래 바위, 쏘가리가 많이 잡히는 바위는 쏘갈 바위, 아이들이 즐겨 놀던 바위는 배꼽 바위, 옹 바위 등 다양한 형태의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높아진 수위로 인해 모두 물 밑에 잠겨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옛날에 고기가 70년대 물개가 올라왔어. 쏘갈 바위 위에 올라왔었어. 경찰이 잡으려고 했는데 못 잡았어. 그때가 70년대쯤 될 거야. 또 내가 17, 18살 때 돌고래가 올라왔었어. 여울에서 걸린 거야. 산에서 보니까 큰 거 검은 게 있으니까. “
돌고래라고? 처음에는 과장이 심하다 싶었다. 그런데 문헌을 찾아보니 한 가지 흥미로운 발견을 하였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따르면 서해에는 ‘상광어’라는 피부가 빛나는 인어(사람의 얼굴을 닮은)가 있고 종종 한강을 타고 올라 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실제로 최근까지도 서해의 한강 하구의 보에 걸려 종종 사체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혹시 그 상광어가 70년대까지 ‘보’가 없었던 한강을 거슬러 온 돌고래가 아닐까?
한강이 서해로부터 내륙까지 이어져 있던 시절, 서해 바다의 생물이 한강을 거슬러 내륙으로 올라오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어쩌면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북한강 상류의 댐들도 없던 시절이라면 서해의 생물이 한강수계를 타고 금강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을까?
지금은 수중에 여려 개의 보와 댐이 세워져 있고, 수자원 보호법으로 강 주변에서 각종 행위가 금지되어 있다. 한강은 접근 가능한 곳이 아니라 멀리서 관망하는 사람이 없는 강이 되었다. 또한 전력자원 확보, 치수, 용수, 안보, 이데올로기로 인해 보이지 않는 금지선들이 한강수계 주변으로 그어져 있다. 서해 바다생물이 강을 타고 경계를 넘나들수 있다는 당연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지난 100년간 우리의 상상력은 제한받았다.
이번 연구과정에서 양평의 남한강 지역에 뿌리내리고 살았던 어르신들의 이야기들 통해 복원해 본 남한강의 모습은 매우 역동적이었다. 지금과 같이 잔잔한 강이 아니라 사계절의 변화가 극심한 강이었다. 투명한 물이 흐르고 물밑에는 자갈과 모래가 가득했다. 우기에는 잠기고 갈수기에는 물이 빠지는 하상계수 폭이 매우 큰 강이었다. 주민들에게 용수, 물놀이, 여가, 물고기, 등을 제공하는 아낌없이 주는 강이었다. 어린이들은 강폭이 좁은 곳은 수영을 해서 건너 마을로 건너 다녔다. 물살이 좁고 빠르게 흐르는 여울과 비교적 잔잔한 나루터가 반복적으로 위치해서 운송 및 교통 기능을 담당하였다. 주민들은 강변의 주인 없는 습지에는 밀과 보리농사를 지었다. 우기에 범람전에 수확할 수 있는 유일한 작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강변에서는 농한기에 천렵(마을 야유회)을 즐기며 한해의 고된 노동을 축제로 마무리하였다. 소들을 끌고 나와 꼴을 먹이는 일은 어린이들의 몫이었다. 겨울에는 강이 꽉 얼어서 육지 건너듯 강을 건너 다녔다. 어르신들은 노동으로 고된 삶이었지만 행복한 유년기였다고 하나같이 고백하신다. 73년 팔당댐이 완공되고 나서 어느 순간부터 수위가 점차 올라오더니 이제는 여울이 없는 탁한 강이 되었다.
“어르신! 댐 건설로 수위가 높아지고 나서 그래도 좋아진 점도 있지 않나요?”
“여기서 우리 마을에는 얻어진 것은 없지. 얻은 게 뭐가 있어? 우리가 어려서 놀던 머리 감고, 달팽이, 고기 잡고 이런 게 다 없어지고 지금은 강에 낚시도 못하게 하고 모든 걸 제제하잖아 양평은 제제받은 게 너무 많아 그러니까 할 게 없잖아.”
“저희 아버지하고 형제들이 물속에 들어가서 쏘가리를 잡으셔서 저한테 회를 떠주시곤 했었어요. 그렇게 살았던 어렸을 때 기억이 1년에 수십 번은 꿈으로 깹니다. 어려서 했던 그런 좋은 추억들이.. 아직까지도 그렇게 살고 싶죠.”
수위가 높아지면서 강에서 사라진 것은 비단 바위의 지명과 여울의 이름 뿐만이 아니었다.
한강연안의 근대적 도시 개발의 기틀을 마련한다던 한강 종합계획의 영향력은 나비효과처럼 퍼져나갔다.
서울의 공유수변을 매립하여 도시를 만들고 거기서 발생한 토지판매 비용으로 다시 제방과 도로를 확장한다.한강의 홍수를 제어하고 용수확보와 소량의, 전기 발전을 위해 곳곳에 수중보와 거대 댐을 짓는다. 수위는 점점 올라가고 유속이 느려지면서 토사가 쌓여간다. 오염은 점점 심해진다. 토사를 퍼내어서 건설 골재로 사용하고 다시 도시 인구는 증가하고 수질은 점점 더 나빠진다. 상수원 취수구를 점점 폐쇄하고 상류로 이동한다. 상류 한강 지역의 개발행위를 제한한다. 나룻배를 금지하고 낚시와 수영과 농사를 금지한다.
오늘날 잔잔하게 흐르는 남한강 뷰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기 위해 남한강변 6번국도에 차량이 길게 늘어서 있다. 남한강의 아름다움은 만지거나 몸으로 누릴수 없고 멀리서 관망해야 한다. 실재 가까이 가서 보면 부글대는 녹조와 부유물이 보일뿐이다. 남한강에서 퍼올렸던 모래 골재는 도시건설에 이용되었고 도시건설하며 퍼낸 흙은 다시 양평의 농지를 메우고 양평의 농지는 주택단지로 다시 바꿈한다.
이렇듯 한번 손대기 시작하면 멈출수 없듯이 한강의 지형은 댐이 댐을 부르고 오염이 약품을 부르고 상수원 보호와 제약은 더욱더 강화된다. 지금 영유아들은 마스크를 쓰고 사는게 원래 당연한 것으로 알고 다니듯 후손들은 원래 한강이 그러한 줄 알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한강은 언터쳐블, 즉 불가촉 하천이다.
그런데 서해의 토종 돌고래 상광어는 어째서 과거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자꾸 한강 하류보를 넘어와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는 것일까? 그 아이는 죽음을 통해 어떤 메세지를 우리에게 남기려 했던 것일까? 오래된 한강의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기 위함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