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에도 좋은 점이 있구나...
오랫동안 축 가라앉아있던 감정으로 살던 우울증에 걸린 나에겐
서러움, 속상함, 분노, 무기력, 후회됨, 안쓰러움, 슬픔.... 대략 이런 감정들만 있었다.
딱히 즐거울 일도 없고, 억지로 나를 몰아 느껴졌던 즐거움도 그 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로 가라앉았다.
당연히 설레는 일도 행복한 감정도 없었다.
정신과에서 처방해 준 우울증 치료약을 먹고나서부터 조금씩 즐거운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언젠가의 나처럼 무언가 일을 할 때 흥얼거리기 시작한 거다.
이렇게 빨리??
잠을 잘 자서 그런지 기분 좋은 노래나 소식을 들으면 기분이 좋다.
이 당연한 걸 지금껏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조차 나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얘기를 들어도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이런 기분이었던 내가..
필요해서 구입한 거긴 하지만 쇼핑을 하고 그걸 기다리고 택배가 도착 마자마자 뜯어봤다.
그리고 입어보기까지 했다.
너무나 당연한 거지만 무기력증에 지배당했던 우울증 걸린 나는
필요한 게 생기면 버티고 버텨 마지노선에서 겨우 구입을 하고
택배가 오면 한참을 뜯어보지 않고 뜯어봐도 입어보기는 커녕 방에 던져두고 나서 딱 입어야 할 때 뜯어서 입어봤다.
사실 이게 우울증 때문인지 지독한 게으름 때문인지 몰랐는데
약을 먹기 시작하고 2주 차에 안 그러는 걸 보면 우울증에서 비롯한 게으름이었던 것 같다.
검색을 하고 주문하고 택배가 오면 바로 뜯어보고 입어볼 것은 입어보고 교환도 하고 환불도 하고 입어야 하는 옷들을 모아서 빠르게 빨래도 하고 건조하고 예쁘게 걸어놨다.
이게 참......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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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떨리는 기분이란 걸 느꼈다.
오늘 하루가 그랬다.
며칠 전부터 항공사에 전화해서 반려동물 규정에 대해 문의하고 답변받고 항공사 최저가 검색해서 반려동물이 가능한 기종인지 확인하고 그렇게 며칠을 고민하고 비교한 끝에
어제, 항공권 예약 전 반려동물 규정을 한 번 더 확인 후 최저가 항공권으로 예약을 했다.
해외여행사의 항공권이라 예약확정이 하루정도 걸린다고 했다.
오늘 오전 항공권 확정이 되고 바로 항공사에 전화해서 반려동물 예약을 했다.
그런데, 그동안 그렇게 문의할 땐 문제가 없었는데 항공권 확정되고 나니 공항의 반려동물 무개제한이 32kg이라는 거다.
뭐?
항공권 예약을 이미 했는데?
동물병원에 예약이 되어있어 출발해야 하는 시간이라 일단 반려동물 위탁 서비스를 예약하고 고민에 빠져들었다.
마지막으로 체크한 몸무게가 37kg 6개월간 다이어트를 해서 허리가 잘록해졌으니 아마도 30kg 초반이 아닐까? 그럼 조금 더 다이어트를 하고 케이지 무게가 줄어들면 가능하지 않을까?
심난해하고 있을 때 문자가 띠링 왔다.
뜬금없는 비상구좌석 배정문자!
이건 또.. 뭐지?
미안해서 비상구좌석으로 배정해 줬나?
기분이 슬슬 좋아지고, 세상에....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몇 년 만에 느끼는 설레는 기분...
심난하기도 하지만 뭔가 출발이 좋은데? 하는 기분이 들었다.
반려동물 규정도 왠지 다 통과될 것 같았다.
동물병원에 도착해서 몸무게를 확인하니
35kg
많이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근육이 늘었다.
한참을 고민했다.
케이지 무게를 쟤보고 얌전하게 잠들어있는 소중한 존재 얼굴 한번 보고
불가능하다 로 결론지었다.
다시 검색을 하고 항공사에 전화를 해서 반려동물 규정이 가능한 다른 도시를 알아봤다.
차량으로 6~7시간 정도 떨어진 도시에 반려동물 규정이 45Kg인 공항으로 출발하는 항공사와 항공권 가격을 정신없이 알아보고 항공스케줄과 반려견 가능여부를 확답받은 뒤
해외여행사에 문의를 했다.
항공권 여정변경이 가능하니?
NO
켄슬 해야 하니?
Yes
수수료 있니?
Yes
얼마니?
160,000 won
하아...
켄슬 해주세요.......
항공사 상담원이 여러 번 체크해 준 항공권으로 바로 예약하고
다시 항공사에 전화를 했다.
반려동물 예약을 하려는데요
고객님 그 항공편은 반려동물 위탁 이 안 되는 항공편입니다.
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그때부터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고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렇지만 난 오랫동안 축 가라앉아 있던 감정의 소유자 우울증 환자가 아닌가?
화는 내지 않았다.
침착하게 상담받은 내용과 확답받은 내용을 말하니
상담원이 크게 당황했다. 그전 상담전화 기록을 확인하더니 여러 번 사과를 하고 바로 켄슬 하면 수수료는 없을 거라며 켄슬 규정을 같이 살펴줬다.
바로 취소는 특별한 수수료가 없는듯한 내용에 바로 켄슬.
국내 여행사의 항공권을 이용해서 인지 바로 환불이 됐다.
그리고 다시 예약을 하고 다시 전화를 해서 반려동물 예약까지 완료했다.
다 끝난 줄 알았는데
국내여행사 발권 수수료 1만 원이 빠져나가고
한숨 돌리고 저녁을 먹는 나에게 항공사에선 출발 2~3일 전에 항공기 스케줄이 바뀌면 반려동물이 못 탈 수도 있어요. 꼭 확인하세요.
라는 무책임한 건지, 만약을 위한 안내인건지..... 를 전해줬다.
마지막까지 참 기가 막히네...
오늘의 이 감정들
얼마 만에 느끼는 요란스러운 감정기복인지
그전엔 우울하다 울적하다 슬프다 격하게 서럽다 이런 정도의 감정기복만 있었고 무서운 기분도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하는 기분도 없었다. 그냥 모든 것이 그려려니, 내가 그렇지 뭐.. 정도로 정리됐거나 서러워서 눈물 나는 정도였는데..
오늘은 설레다가 즐거웠다가 떨렸다가 기운 이 빠졌다가 불안했다가 안심했다가 해냈다는 기분까지 다양했다.
그리고 또
그래... 나는 원래 여러 감정을 잘 느끼고 잘 표현하던 사람이었지?
설레고 기다려지는 감정을 잘 느끼던 사람이었지?
다시금 나를 찾아간다.
다만
원래의 나였다면 몇 번을 확인한 사항이 잘못된 안내임을 깨달았을 땐
화를 냈었을 것이다.
컴플레인도 걸었을 건데..
가라앉은 기분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시간이 길었던 지라
침착하게 잘 대응했다.
단 한 번의 큰 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조금 기운 빠진 목소리로 모든 일을 해결했다.
우울증의 유일한 장점이 작용한 것 같다.
바로바로 반응하지 않는 감정.
아니면 하루사이에 너무 많은 변화가 일어나서
해탈한 것일까?
이제 남은 준비만 찬찬히 해내면 된다.
그리고 어제부터 운동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