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기억될 오늘.
특별한 날은 아니다.
단지 오랜만에 휴일이다.
소란스러운 아침시간이 지나고 조금 한가해지는 시간에 눈을 뜬다.
어제 받은 마사지가 얼마나 알찼는지,
어깨부터 등, 허리까지 묵직하게 통증이 앉았다.
오늘이 휴일이라 어제의 하루는 조금 더 알찼다.
출근하기 전 루틴은 매일 같다.
눈을 뜨고 침대를 한번 털고, 발코니 창을 열고,
꼬리만 살살 흔들고 있는 환타와 아침인사를 하고, 환타밥을 챙겨준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해 라디오를 켠다. 2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베트남이라 '이현우의 음악앨범'과 함께 출근준비를 한다.
동주전자에 물을 올려놓고 타이머를 4분에 맞춘다.
원두를 갈아놓고 드리퍼를 올려놓고는, 화장실로 향한다.
한참을 앉아서 '오늘의 운세'도 살펴보고, 잠자는 동안 바뀐 세상 뉴스도 체크한다.
그렇게 20분 잠을 깨 본다.
후다닥 세수를 마치고, 커피를 내리고, 호로록호로록 마시면서 얼굴을 단장한다.
신경 쓴 모습이 보이게, 출근하기 좋게, 다소 진하게 아이라인을 그리고 마스카라도 꼼꼼히 칠한다.
출근하면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한 시간 텀을 지키며 열심히 커피를 팔고,
손님들이 구입할 때까지 조르듯이 열심히 떠든다.
캐리어를 하나 들고나갈 때마다 기분이 좋다.
다음 예약을 곧바로 물어보면 '나 오늘 잘했구나.' 싶다.
어제저녁엔 중요한 약속이 있었는데
몸이 너무 피곤했다. 스케줄이 시작되기도 전에 몸이 삐걱삐걱거렸다.
바닥에 딱 붙어버린 컨디션을 한층 높은 목소리와 수다로 겨우 끌어올렸다.
안 되겠다. 마사지를 예약했다.
달랏에서 즐기지 못한 마사지를 1년 만에 받기로 한다.
붕붕이를 타고 초행길을 열심히 달렸다.
공사장이 점점 늘어나는 달랏이라, 흙길도 자갈길도 벗겨진 아스팔트 구멍들도 요리조리 피해 잘 달렸다.
마사지는 그냥 그랬다. 어깨와 머리를 마사지할 때는 찌르르하면서 개운했는데,
90분을 엎드려서 받는 스타일이라 가슴도 묵직해지고, 코는 막혀서 숨쉬기가 곤란했다.
릴랙스 되려던 몸이 다시 뭉치는 기분이었다.
마사지하는 언니는 압이 좋고 기술도 좋았는데, 나는 엎드려서 받는 마사지는 별로다.
그래서 얼굴이 퉁퉁 부었다. 집에 와서 거울을 보니 오일이 번들거리는 빵떡이 있네?
근질근질 오일이 몸에 맞지 않는다. 내 몸은 모든 오일을 거부하는 피부를 가졌다.
데일만큼 뜨거운 물로 이른 샤워를 했다.
서둘러 머리를 말리고 환타와 산책을 하고 나니 어느덧 약속시간이다.
크리스마스 전부터 기다렸던 내 아들들과의 만남이다.
달랏의 한 성당에는 부모가 있지만 부모가 없는 25명의 아들들이 살고 있다.
신부님만 계시는 성당이라 온통 사내아이들이다.
여섯 살부터 열네 살까지, 장난기 가득한 막내 쌍둥이들을 시작으로 제법 어른티가나는 아이들까지, 아들들은 모두 맑고 착하다.
초롱하고 궁금한 눈빛으로 날 본다.
베트남말을 잘 못하는 탓에 태민 씨와 동행했다. 태민 씨는 예전부터 아들들을 만나러 갈 때 도움을 준다고 했다.
태민 씨는 한국에서 지원받았다며 아이들의 구충제와 연고등등을 두 박스나 챙겨 왔다.
돈을 많이 벌어서 아이들 하나하나의 축구 유니폼을 맞춰주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사건사고가 많아서 생각만큼 많이 벌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 때문에 돈을 좀 모아야 했다. 그런 핑계로, 나는 소박하게, 아이들 각각의 개인텀블러와 신부님의 텀블러, 그리고 잘 못 사 먹을 것 같은 빵집의 세 가지 맛 슈크림 10박스, 롤케이크와 꾸덕한 바나나 롤케이크 같은 빵들을 12박스 주문해 놨다. 달콤함도 든든함도 주고 싶었다.
제법 무겁게 태민 씨 차 트렁크를 채웠다.
주소도 제대로 알려주지 못해 태민 씨는 한번 멀리 돌아가야 했다.
어리바리한 나는, 내비게이션의 단어하나를 잘못선택해서 저 멀리 웅장한 성당에 들렀다가 오게 만들었다.
여전한 장난꾸러기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내 손을 본다.
저 한국여자가 뭘 가져왔을까? 온통 관심이 내 손에 쏠려있다.
나도 어렸을 땐 그랬다. 부모님의 손님이 우리 집에 방문하면 온통 손에 들려있는 종합과자선물세트에 관심이 있었다.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한 손님이 무안하게, 과자 어디 있냐고 따져 물어서 부모님을 난처하게 만든 적도 있었다.
아들들은 그런 당돌했던 나와는 다르다. 그저 내 손을 도와 박스를 들고 나른다. 박스 안에 포장된 그것이 궁금한 눈치인데, 잘 참는다. 어린 시절에 나보다 인내심이 많은 아들들이다.
태민 씨는 신부님과 인사를 하고, 궁금했던 것을 묻는데
아들들을 바라보는 내게 신부님이 저녁을 함께 하자고 했다.
가정식 분보훼를 큰 그릇 가득하게 챙겨주고 새해에 마시는 와인도 따라주신다.
예전에 보았던 젊은 신부님보다 영어를 잘하시는 분이라 제법 말이 통한다.
아들들은 저녁식사를 하기 전, 크게 나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태민 씨가 통역도 해줬다.
스폰서라고 하시는 어르신과 한 테이블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나이대에 맞게 모여서 조잘거리며 밥을 먹는 아들들이 너무 예뻐다.
그 모습을 계속 쳐다보다가, 식사를 마치고 선물을 지금 전달해도 좋냐고 물으니 신부님이 허락해 주신다.
식사 중인 아이들에게 하나씩 텀블러를 건넸다. 색깔이 랜덤이라 어린 아들들은 싸울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레고를 주었을 때보다 반응은 적었지만 아이들이 제법 좋아한다.
역시나 돌아다니며 다른 색깔이 무엇인지 비교도 한다.
후식으로 슈크림을 전달하니 아들들 입에 하나 가득 슈크림 들어찬다.
맛있다고 나에게 눈웃음 쏘아주는 막내들 덕에 자꾸만 내입이 찢어진다.
"땡큐! 땡큐!" 하면서 익살스러운 몸짓을 하는 것이 딱 그 나이 남자애다.
마음 좋은 태민 씨는 아이들이 너무 예쁘다면서 신부님께 연락처를 물어, 다음부턴 자기도 방문하겠다고 했다.
태민 씨는 천주교 보단 불교에 더 가까운 사람인데, 아들들의 매력은 종교를 넘어섰다.
밥 먹고 텀블러 한번 만지고, 입에 가득 슈크림을 먹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집으로 오는 길엔
살짝 눈물이 났다.
같은 나이가 되었을 쑥쑥이가 애틋해서 아들들을 보고 나면 사무친다.
그래도 잘 참았다. 주책없이 눈에 가둬두려 한 눈물방울이 또록 떨어졌지만 그래도 잘 참았다.
시간이 지나도 괜찮아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이 마음일 거다.
집 앞에 오니 '당' 에게 연락이 온다.
요즘 '당'은 개인투어를 하고 있는데 한국 여행객과 함께하고 싶어 나에게 이것저것 조언을 구했었다.
깨끗한 캠핑 장비, 프라이빗한 투어스폿 등등의 조언을 당은 바로바로 받아들여
비디오만 봐도 끝내주는 투어를 만들어냈다.
태민 씨는 개인여행사를 운영한다.
태민 씨와 만나고 싶어 해서 옥상 Bar에서 미팅을 주선했다.
맥주도 마시면서 투어에 대해 대화했다
태민 씨와 당 모두에게 윈윈이 될 것 같다. 둘 다 아이디어가 굉장했다.
피곤한 태민 씨가 미팅을 마치고 돌아간 뒤에 우린 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만약 베트남을 떠난다면 추억할 것들 중에 단연 1등은 이 가족들과의 식사와 대화일 거다.
그렇게 늦게 잠들었지만
오늘은 휴일.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무시하고 다시 잤다.
10시에 일어나서 브런치 카페에 왔는데, 명절 전이라 식사가 불가능하단다.
환타를 맡겨두고 단골 쌀국숫집으로 향한다.
늘 담백하고 맛있는 소고기쌀국숫집에 가니 온통 아는 사람들이다.
일 년이라는 기간 동안 이 동네에서 아침저녁으로 눈에 띄는 큰 개와 산책하는 한국인여자는 어느덧 정답게 눈인사를 나누는 이웃들이 많아졌다. 어느 집에 누군지를 다 알게 됐다.
눈인사 열심히 하고 자리에 앉으면 주문하지 않아도 내 쌀국수 한 그릇은 딱 내 취향대로 나온다.
익힌 숙주와 양파슬라이스, 그리고 소스를 담을 작은 종지가 앞에 놓인다.
후루룩 잽싸게 한 그릇하고 카페에 돌아오니 환타는 난리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배를 까고 발라당 누워서 행복하게 손길을 받아들이더니
나를 보자마자 마치, 나만 기다렸는데 어딜 갔다 왔냐는 듯 히잉히잉 울면서 달려든다.
환타를 진정시키고 책을 읽는다.
다정함이 가득하고, 추억이 눈물방울을 만드는 김보리 작가님의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를 읽는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다가 주책맞게 눈물 흘리기도 하고, 책을 읽다가 자꾸만 환타를 쳐다보게 된다.
김보리 작가님과 대화를 나누는 듯한 독서다. 아껴두길 잘했다. 오늘 읽기를 잘했다.
푸른 정원에 바람은 살랑살랑,
하늘은 온통 빛이다.
한적하고 조용한 시간이다.
이 동네는 지금 시간이 가장 좋은데, 나는 이 시간에 늘 일이 바쁘다.
한참을 냄새 맡고 사람들에게 이쁨 받더니, 내 옆에 딱 붙어서 나른함에 잠을 자는 환타가 사랑스럽다.
바람이 살랑대고, 틀어놓은 음악이 적당하다.
엉덩이가 아프다니 챙겨준, 낡고 푹신한 방석이 정스럽다.
내일부터는 모두 고향에 간다며 인사를 하는 카페 스텝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중뭉 남머이"로 배웅한다.
명절 때 나는 이곳을 지킨다며 저녁에 놀라오라고 하는 스텝과도 이야기를 나눈다.
따사로운 햇볕에 몸을 뒹굴거리는 수다쟁이 고양이가 귀엽다.
발받침에 턱을 올리고 내 옆에 딱 붙어 잠든 환타가 사랑스럽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작가님이 얼굴과 말투가 생각나는 책이 좋다.
읽고 나니 글을 쓰고 싶어 지니, 얼마나 생산적인 책인가.
이렇게 두 시간 오늘은 사치를 부리련다.
커피에 얼음이 다 녹아 미적지근할 때까지
호로록호로록 시간을 즐겨본다.
먼 훗날에 달랏을 기억할 때,
머릿속에서 가장 평화롭게 기억될 이 장소와, 시간, 그리고 고양이들과 환타, 바람과 해, 푸름과 오토바이의 우르르릉 소리까지. 오늘도 가득가득 담아본다.
오늘의 달랏은 나른하고,
오늘은 나는 평화롭다.
지금이 달랏에서 가장 풍족한 시간이다.
배는 부르고, 감성이 풍족하다.
혼자서 보내는 이 시간이 너무 좋다. 환타가 곁에 있어주어 외롭지도 않다. 베트남 사람들의 억센 대화가 두런두런 배경이 되어준다. 나는 지금 행복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