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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윤 Jan 13. 2022

세상은 결심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아

카이지:인간 경마 편


카이지는 빚을 탕감하기 위해 올랐던 희망의 배 에스포와르호에서 무사히 내릴 수 있었다. 선행을 베푼 탓에 오히려 빚 630만 엔을 짊어진 채 사회로 돌아왔다. 위험천만했던 경험을 통해 한층 정신이 성숙해졌는지 카이지는 니트 생활을 멈추고 편의점 알바를 시작했다.


카이지는 일을 하는 내내 언제 검은 정장들이 돈을 갚으라고 들이닥칠지 몰라 불안해했다. 빚이 얼마나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는지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런 카이지에게 불만이 많았던 사장은 돈을 훔친 도둑으로 의심했다. 심지어 가방을 열어 소지품 검사를 하려고 했다. 노동법상 엄연한 불법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도 아직 근절되지 않아 씁쓸하다. 카이지는 자신이 도둑이 아니라면 돈을 달라는 배짱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집에 가는 길 같은 알바생인 사하라가 뒤따라와서는 카이지의 가방에서 돈 봉투를 꺼냈다. 당황해하는 카이지에게 사하라는 괜찮다며 어차피 사장이 시급에서 빼돌린 돈이라고 했다.


이렇게 편의점을 그만두게 된 카이지는 또다시 테이아이 그룹의 도박에 참가하기로 했다. 사하라도 큰돈을 만지고 싶다며 카이지의 만류에도 따라왔다. 이번 게임 장소는 스타사이드 호텔이다. 지난 에스포와르호에 마찬가지로 경재적 어려움 탓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심지어 지난번 카이지가 돈을 포기하고 구출해준 이시다도 있었다. 경험을 통해 도박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돌아왔다는 점이 답답하고, 한편으로는 이해됐다.


검은 정장은 참가자들을 관 크기의 방에 들여보냈다. 사람들이 전부 들어가자 방은 굉음소리와 함께 위로 상승했다. 밖으로 나온 사람들을 맞이한 것은 4개의 철골이었다.  게임의 이름은 브래이드맨 로드, 일명 용자의 길이다. 하지만 이름과 달리 실상은 인간 경마였다. 12명의 참가자들에겐 경주마처럼 대문짝만 한 번호표가 붙어있었다. 카이지는 10번 말이었다.



  철골 아래로는 한창 졸부들이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 경마를 즐기려는 듯 몇 번 말이 일등하는지 돈을 걸었다. 가느다란 철골을 가다간 한 번 발이 미끄러지면 아래로 추락해버린다. 매트가 깔려있긴 하지만 큰 부상을 입을 게 뻔했다. 이 풍경 속에서 단 한 번의 실수만 해도 거의 회생하기 힘든 막장 사회가 보였다.


  혼란스러운 카이지의 내면은 술렁… 술렁…으로 가득 찼다. 비록 떨어져도 산다고 해도 심각한 부상을 입을 게 뻔했다. 절박함은 또 다른 기회를 만드는 듯 카이지는 한 발을 내디뎠다. 이런데 아뿔싸, 이미 다른 참가자가 먼저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먼저 도착한 1, 2등에게만 에게만 2천만 엔, 1천만 엔 상금을 주는 만큼 스피드가 중요했던 것이다. 남들이 모두 철골에 오르는 모습을 보곤 처음엔 참여를 거부했던 참가자도 결국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광기의 인간 경마는 시작되었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여간 중심잡기가 쉽지 않았다. 발 이외에는 절대 사용 불가이며, 앉아서 손을 이용해 꾸물거리며 가거나 떨어지기 전에 손으로 매달리는 행위는 일절 금지였다. 남보다 뒤처졌다는 생각은 더욱 참가자들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때 발 밑에서 졸부들이 뭔가 외치기 시작했다. 그 말은 “밀어라!”였다. 자신들의 즐거움을 충족시키고, 서로가 서로를 떨어뜨리는 아비규환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인간인척 하는 괴물이었다. 부자들의 술수에 놀아나듯 같은 처지의 참가자들은 싸우다가 함께 추락했다. 게다가 제일 뒤늦게 철골에 올랐던 참가자가 카이지를 밀기 위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은 가장 뒤늦게 출발한 참가자가 유리한 게임이었던 것이다.


카이지의 앞에도 참가자가 있는 상황, 그는 남을 미는 것을 거부했다. 이렇게 도박으로 돈을 딸지언정 양심은 지키겠다는 아이러니함이 카이지를 더욱 입체적인 캐릭터로 만들었다. 뒤따라오던 참가자에게 밀쳐졌지만 철골에 매달려 버텼다. 실격당하면서 소득은 없었지만 사하라와 이시다가 1, 2등을 차지했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나 싶었지만 잔인한 테이아이 그룹은 사람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룹의 중간보스 토네가와는 방금 전에 했던 인간 경마는 예선이고 본선전은 따로 있다며 우승자들에게 상금 교환권을 지급했다. 이를 교환하기 위해선 교환소까지 가야 한다며 옥상으로 데려갔다.


예선은 일개 졸부들의 경마였다면, 이번엔 평범한 것들은 시시해하는 졸부들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이다. 졸부들은 교환소가 있는 건너편 건물에서 사람들이 떨어져 죽는 모습을 즐겁게 관람하려고 대기 중이다. 본선에선 서로를 밀어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지만 제한시간 안에 전기가 통하는 철골을 걸어야 했다.  물론 까마득하게 아래인 바닥엔 참가자들을 구해줄 그물망, 에어쿠션 따윈 없었다. 참가자들은 본선이 있었다는 말은 없냐며 따졌다.


돈이라는 건 목숨보다 소중하다

이에 토네가와는 분노하며 “돈이라는 건 목숨보다 소중하다”고 외치고 직장인, 공무원 등 누구나 목숨을 걸며 돈을 번다면서 연설을 늘어놓았다. 연설과 함께 화면에선 그림이 띄어졌다. 그림 속 청년은 학창 시절 때 성적 경쟁을 해서 기껏 좋은 대학에 합격하지만 또다시 학점 경쟁을 했다. 무사히 졸업하지만 쉴 틈도 없이 살벌한 취업 전쟁터로 뛰어들었다. 그동안의 노력이 빛을 발해 가까스로 대기업에 취업하지만, 높은 연봉과 워라밸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그 청년은 상사의 온갖 잔소리와 과중한 업무 속에서 십여 년을 버텨 30대가 되고, 40대 정도는 겨우 돼야 2천만 엔을 모았다.


토네가와는 연설을 통해 2천만 엔이 얼마나 큰 거금인지 외쳤다. 그에 비해 참가자들은 타인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평생 빈둥빈둥 게으르게 살아온 주제에 십 분만의 여흥으로 따갈 수 있겠냐고 비난했다. 인간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들을 거짓이라고 치부하며 살다가 죽기 직전에서야 진실이었단 것을 깨닫는다는 대목에선 나도 뜨끔했다.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혔을 때 영화 매트릭스처럼 사실 다 가상세계가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작품이 인간의 내면을 얼마나 잘 꿰뚫었는지 알 수 있었다. 올해는 이랬지만 내년엔 잘 살아야겠다의 반복과 진짜 목숨을 걸기 전에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삶을 멈추고 하루하루를 잘 활용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이 생겼다.


목숨이 걸린 게임에서 빨리 하라고 바로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말에 토네가와는 언제까지 꾸물거릴 거냐고, 세상은 너희 같은 쓰레기들을 기다려주는 엄마가 아니라고 또다시 폭언을 했다. 예선에선 실격이지만 카이지는 부상을 안 입었기에 참가하기로 했다. 사람들도 돈을 따서 새 출발을 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서로를 다독이곤 철골에 발을 내딛었다.


  사람들은 각자 혼자만의 길을 걸으며 외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이를 보며 토네가와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함께 하는 것처럼 보여도 이어지지 않는 각자만의 길을 걷는다고 말했다. 즉, 인간 경마는 66억 인간의 고독한 외길인생을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아무리 함께하는 것 같아도 사람 간의 길은 결코 이어질 수 없었다. 오로지 소통으로만 신호를 교류할 뿐, 그마저도 제대로 닿지 않거나 잘못 와전되었다. 아예 소통이 단절되어가는 요즘 사회를 생각하면 철골 위에서 서로를 응원하는 참가자들에겐 인간애가 남아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용기 있었던 순간도 잠시 참가자들은 하나둘 씩 떨어졌다. 남은 사람들은 패닉 상태에 빠져 강풍이 분다는 착각에 빠졌다. 서서히 서슬퍼런 낫을 들고는 목숨을 앗아가는 사신이 다가왔다. 개죽음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강행할 순 없었다. 결국 카이지는 토네가와에게 전류를 끊으라고 외쳤다. 하지만 토네가와는 진검승부에서 항복은 없다고 거부했다. 패닉 상태에 빠진 참가자는 돌아가겠다며 철골을 붙잡았다. 끝내 감전의 고통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추락했다.


이제 철골 위엔 카이지, 사하라, 이시다뿐이었다. 이시다는 자신이 얻었던 1천만 엔 쿠폰을 건네며 자신 대신 환급해서 아내에게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카이지는 살아서 직접 전해달라고 했지만 받았다. 이후 뒤를 돌아보니 이시다는 온데간데없었다.


사실 두 사람에게 공포심을 주지 않기 위해 그동안 무능력하고 유약했던 이시다가 입을 틀어막고 떨어진 것이었다.  엄청난 성장을 한 그에게 놀라워하며 카이지는 꼭 약속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은 철골이 휘어져 보이기도 하고 떨어져 죽었던 사람들의 환각도 이겨내며 거의 다 다 달랐다. 사하라는 막판에 흥분해서 철골을 내달렸고 먼저 문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사막에서 물이 보였을 때 그것이 오아시스인지, 독사가 빠진 물인지 확인도 안 한 탓일까. 문을 있는 힘껏 잡아당기자 버틸 수 없는 돌풍이 뿜어져 나와 사하라를 떨어뜨렸다.


충격도 잠시 카이지는 문 너머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타인의 죽음을 웃음거리로 삼으며 술을 마시는 진짜 악마들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카이지는 다시 머리를 굴렸다. 위급 상황에선 재능을 발휘하는 그는 진짜 간헐적 천재이다.


분명 살 수 있는 길이 있는데 멍청한 죽는 사람을 비웃는 웃음이라고 해석한 카이지는 가짜 문 위에 진짜 문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곳에선 홀로 카이지를 구경하는 회장 효도가 있었다. 그러자 절대 못 찾을 것 같았던 유리 계단이 눈에 보였다. 그렇게 카이지는 계단을 건너고 문을 열어 용사의 길을 통과했다. 하지만 함께한 동료들을 모두 잃었는데 뒤늦게 전기도 끊겨서 상금도 못 받는 상황에 놓였다.


이제 기회는 없다는 뻔뻔함의 끝판왕 토네가와를 만류하고 진짜 빌런, 테이아이 그룹의 회장 효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전기를 늦게 끊은 것은 토네가와의 잘못이니 한 번 기회를 주자고 했다. 언뜻 보기로는 배려하는 것 같지만 카이지의 죽음을 즐기려는 듯한 표정이다. 이대로 물러설 수 없는 카이지와 회장을 만족시켜야 하는 토네가와는 E카드를 시작했다.


작품을 보는 내내 부당함을 느끼면서도 토네가와의 말에 찔리는 점들이 많았다. 작품 내 세상처럼 요즘 세상도 열심히 살아도 제대로 된 보상을 안 주고, 공정함도 사라져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러나 모든 것을 세상 탓으로 여기고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작품은 말한다. ‘코로나 때문에’란 말을 자주 달고 사는데 핑계 대지 말고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것처럼 사소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도전해봐야겠다. 다음 글에선 동료들의 복수를 하고 돈을 쓸어가져 오려는 카이지의 E카드 편을 이야기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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