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일흔여덟

by 김가희





겸, 모든 것이 정리된 다음 날 아침은 생각보다 고요하더군. 사람들의 연락도, 검토해야 할 조항도 더는 급하지 않았네. 팽팽했던 긴장이 풀리자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지. 허전함이라기엔 단단하고, 만족이라기엔 가벼운 상태였네. 나는 그 공백을 피하지 않았네. 오래도록 밖을 향해 세상을 일구었으니, 이제는 비어 있는 안쪽을 들여다볼 차례라 여겼지. 충만 뒤의 결핍은 실패가 아니라, 다음 문이 열리기 전의 정적이라네.


그 서늘함 속에서 생각은 오히려 또렷해졌네. 지킬 것도, 책임질 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칼날처럼 분명해졌지. 끝맺음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완성이라는 것을 이미 알았지만, 이제야 몸으로 납득되더군. 더 붙들거나 증명할 이유는 없다네. 필연적으로 끝난 것에는 덧붙일 말이 없지. 나는 그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였네. 반복은 정확히 그 지점에서 멈춰야만 다음 장이 열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네.



그렇다고 모든 것이 흩어진 것은 아니었네. 나는 여전히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기록을 정리하고 몸을 단정히 가다듬었지. 태도는 변하지 않더군. 일을 놓았을 뿐, 나를 지탱해 온 리듬은 그대로였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실제로 쌓아 온 본질인지도 모르겠네. 성과가 아니라 습관, 명성이 아니라 지속성 말일세. 남는 것은 결국 하루를 견디는 성실한 걸음뿐이라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었네.


그런데도 마음 어딘가에선 미약한 열기가 피어오르더군. 의무가 아닌 선택으로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다는 감각이었네. 누구도 재촉하지 않는 자리에서 스스로 불을 붙이는 자유 말일세. 그것은 예전처럼 거창하거나 소란스럽지 않았네. 오히려 아이가 막대기로 땅을 긁으며 노는 단순한 흥미에 가까웠지. 나는 그 작은 불씨를 억누르지 않고 가만히 두었네. 끝은 늘 또 다른 시작의 씨앗을 품고 있는 법이니까.



다만 겸,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외부의 조건이 아니었네. 나를 묶어 두던 것이 타인의 기대가 아니라 스스로 만든 보이지 않는 틀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지. 책임을 내려놓고도 한동안 무언가를 짊어져야 할 것처럼 서성였네. 자유가 주어져도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습관 같은 것 말일세. 하지만 그 틀 역시 내가 만든 것이니, 풀 수 있는 이도 나뿐이겠지. 이제 서서히 걸어보려 하네. 누구에게 증명할 필요도 없는 길을 말일세.



겸, 물러선 자리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더군. 내가 남긴 것은 문서 몇 장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형성된 하나의 구조였네. 동행이 쌓여 만들어진 신뢰의 결이었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서로의 시간을 맡길 수 있는 단단함, 그것이 진짜 유산이었네. 나는 이제 그 중심에 없지만 질서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지. 보이지 않아도 공간을 지탱하는 기둥처럼 말일세. 떠났으나 무너지지 않는다면, 그로써 충분하지 않겠나.


그럼에도 한동안은 생각이 날카로워졌네. 혹여 허점이 있지는 않은지, 누군가 기준을 흐리지는 않을지 수없이 점검했지. 이미 손을 뗀 일인데도 검을 쥔 사람처럼 긴장을 늦추지 못하더군. 그러나 그것은 불신이 아니라 책임의 습관이었네. 오래 지켜온 사람만이 마지막까지 확인하는 법이지. 다만 이제 그 칼끝을 나 자신에게 겨누기로 했네. 아직 쥐고 있는 미련은 없는지, 정말로 물러섰는지 묻는 쪽으로 말일세.




며칠 전 젊은 대표와 다시 마주 앉았네. 계약이 아니라 안부를 묻는 자리였지. 각자의 역할을 넘어 사람으로서 웃고 침묵을 나누었네. 책임과 감정을 구분하니 오히려 편안하더군. 기대도 계산도 없는 대화는 맑았네. 나는 조언하지 않았고 그는 의지하려 들지 않았지. 동등한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풍경, 그 정도면 관계는 충분히 성숙한 셈이라네.



요즘은 햇빛이 유난히 밝게 느껴지네. 산책길의 공기가 명료하여 괜히 웃음이 나지. 로가 앞서 걷다 돌아보면 나는 걸음을 늦추어 그 모습을 지켜본다네. 해야 할 목록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이런 사소한 장면들이었네. 해방은 요란하지 않았지. 오랜 감정을 가라앉힌 뒤에야 올라오는 따스함이더군. 나는 지금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를 살고 있네.


물론 완전히 내려놓았다고 말하기엔 이를지도 모르겠네. 기준이 흐려지면 나는 다시 나설 것이고, 부당함 앞에서는 목소리를 높이겠지. 다만 이제는 중심을 뺏기지 않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지켜야 할 선을 분명히 하는 정도로 남겨두려 하네. 끝맺음은 무력해지는 일이 아니었네. 물러섰으되 흔들리지 않는 자리, 필요할 때만 서는 태도. 그 균형 위에 있으니 마음은 의외로 밝고 단단하더군.




겸, 요즘은 오래된 기억들이 불쑥 고개를 들곤 하네. 처음 일을 시작하던 설렘과 무모하게 뜨거웠던 밤들이 떠오르지. 그때의 나는 결과도 모른 채 달렸고, 넘어지며 일어나는 법을 배웠네. 미숙했으나 진심만은 또렷했지.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끝맺음도 가능한 것이라네. 어린 날의 나와 지금의 내가 악수하는 기분이 들더군. 지나온 시간은 사라진 게 아니라 다른 형태로 남아 있었네.


한편으론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하는 충동이 스며드네. 더 가볍고 빠르게 어디론가 달려가고 싶은 기류 말일세. 아무도 막지 않으니 더 멀리 가보고 싶은 욕망이 피어오르더군. 예전 같으면 그 기세를 밀어붙였겠지만, 이제는 그 열기를 멈춰 세우고 바라본다네. 뜨거움은 방향을 잃으면 금세 소모되니까.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미 배웠네.


돌아보면 모든 일에는 주기가 있었더군. 오르내림이 있었고 사람 사이에도 계절이 있었지. 이번 종결도 예외는 아니었네. 시작이 있었으니 끝이 있고, 끝이 나니 또 다른 시작이 밀려오는 법이지. 나는 그것을 억지로 붙들지 않기로 했네. 바퀴는 스스로 굴러가고 사람은 그 위에서 균형을 잡을 뿐이라네. 운을 통제하려 들수록 더 흔들린다는 사실을 여러 번 경험했지.



솔직히 말하자면 한동안은 익숙함에 대한 집착이 있었네. 오랜 시간 나를 정의해 온 역할과 이름을 내려놓는 게 간단치 않았지. 타인의 기대와 스스로 만든 기준들이 발목을 붙들더군. 자유를 말하면서도 과거의 나를 놓지 못하는 모순이었네. 나는 그 끈을 바라보며 자문했네. 이것이 나의 본질인가, 아니면 반복된 습관인가. 묶여 있음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풀 실마리가 보이더군.


이제는 알겠네. 어떤 종결은 선택이 아니라 변형이라는 것을. 이전의 내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른 형태로 옮겨가는 일이지. 낡은 옷을 벗고 이름을 내려놓듯 조용히 탈피하는 과정일 뿐이라네. 죽음처럼 보였던 순간이 실은 재편의 신호였음을 이제야 이해하네. 겸, 나는 무너진 게 아니라 바뀌고 있었네. 끝은 닫힘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열리는 문이었네.




겸, 모든 것이 지나고 나니 작은 인정들이 조용히 돌아오더군. 앞에 서 있지 않아도 사람들은 나의 이름을 불렀고, 내가 세운 기준을 자연스럽게 따르고 있었네. 요란한 승리는 아니었으나 묵직한 확신이 남았지. 내가 붙들지 않아도 흐름은 이어진다는 사실 말일세. 그 장면을 멀리서 보며 나는 비로소 웃었네. 이 정도면 충분히 잘 건너온 셈이지. 박수는 없었으나 마음은 단단히 채워졌네.



요즘은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 적어두곤 하네. 거창한 기획이 아니라 작고 선명한 문장 하나에서 시작하는 일들 말일세. 의무가 아니니 부담도 없더군. 마음이 움직일 때만 손을 뻗는 단순한 리듬이 생겼네. 처음 글을 쓰던 시절처럼 이유 없이 설레는 순간들이 찾아오지. 시작은 늘 사소한 데서 움튼다는 걸 잊고 살았던 듯하네. 나는 이 가벼움을 소중히 다루려 하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지키려 하네. 다시 무언가를 쌓더라도 그것에 매여 나를 가두지는 않겠다는 다짐 말일세. 소유는 늘 조용히 집착으로 변하더군. 내가 만든 것이라도 결국 흘려보낼 수 있어야 함을 이번에 배웠네. 그래서 나는 속도를 늦추고 필요 이상으로 붙들지 않기로 했지. 움켜쥔 손을 조금 더 펴 두려 하네.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으니 말이네.



가끔은 일부러 멈춰 서서 하루를 바라본다네. 해야 할 일 대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택하기도 하지. 예전이라면 초조했겠지만 지금은 그 정적 속에서 감각이 또렷해짐을 느끼네. 멈춤은 후퇴가 아니라 다른 각도에서 보는 일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네. 삶은 앞만 보고 달릴 때보다 거꾸로 볼 때 더 정확히 보이는 법이라네. 그래서 나는 서두르지 않으려 하네.


그리고 겸, 결국 다시 불씨는 살아나고 있네. 다만 이번에는 증명을 위한 불이 아니라 나를 밝히는 불이라네. 작고 단단한 열기 하나가 안쪽에서 피어오르지. 누구의 기대도 아닌, 나 자신의 선택으로 켜는 불 말일세. 나는 그것을 크게 키우려 조급해하지 않을 것이네. 그저 잘 마른 나뭇가지 하나씩 얹어가며 오래 태우려 하네. 끝을 지나온 사람만이 아는 시작의 온도, 나는 지금 그 온기 속에 서 있네.




안정은 비워진 자리를 지키는 힘이다.

멈춤은 본질을 보는 정진이다.

시작은 나를 밝히는 불꽃이다.


{동해} 빈자리 위의 충만을 붙잡는 아이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