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하나
요즘은 아침마다 책상에 앉아 오래전에 쓴 편지들을 다시 읽고 있네. 특별한 동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지. 그저 하루가 고요해지니 자연스레 손이 그 종이더미로 향하더군. 처음에는 단순한 회고일 뿐이라 생각했네. 이미 마침표를 찍은 시간들을 확인하는 정도의 일 말일세. 그러나 몇 장을 넘기다 보니 묘한 불편함이 따라왔네. 이 기록들이 단지 지나간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예감이 들었지. 나는 그 생경한 감각을 애써 설명하려 들지 않고 그대로 두었네.
편지 속 문장들은 생각보다 선명했네. 그때의 나는 망설임 없이 말하고 있었더군.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분명히 아는 자의 목소리였지. 지금 읽어보니 그 어조가 낯설지 않았네. 오히려 현재의 나보다 더 정직한 대목도 있더군. 한동안 같은 페이지를 여러 번 되풀이해 읽은 건 그 때문이었네. 세월은 흘렀으나 어떤 질문들은 여전히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게 되었지.
며칠을 그렇게 보내다 보니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네. 나는 그동안 모든 것을 깔끔하게 정리했다고 믿어 왔지. 더 할 일은 없다고 스스로에게 단언했네. 그러나 편지들을 다시 마주하니 그 호언장담이 어딘가 어색하게 들리더군. 정말로 끝난 것이라면 왜 이 기록들이 이토록 형형히 살아 있는 걸까. 왜 문장들은 서로를 부르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걸까. 나는 그 피할 수 없는 질문 앞에 멈춰 서게 되었네.
겸.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한 가지 진실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 같네. 끝났다고 선언하면 더 이상 책임질 일이 없으니 마음이 편하니까 말일세. 하지만 이 편지들은 흩어진 채로 방치하기엔 너무도 오랜 시간을 이어져 왔더군. 나는 기록을 남겼으되 그것을 온전히 정돈하지는 않았네. 마지막 장을 덮지 않은 채 서가에 밀어 넣어 둔 책과 다름없었지.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했네.
이제는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네. 나는 아직 마지막 소임을 다하지 못했더군. 무언가 거창한 새 일을 시작하려는 게 아니네. 이미 써 둔 문장들을 제대로 불러내어 제 자리를 찾아주는 일이 남아 있었지. 이 편지들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궤적을 설명하는 거대한 흐름이었네. 해야 할 일은 명확해졌네. 문장들을 파편으로 남겨두지 않는 일, 어쩌면 그것이 내 생에 허락된 마지막 작업일지도 모르겠네.
며칠을 그렇게 보내니 편지들이 예전과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네. 전에는 그저 찰나의 기록이라 여겼지. 하지만 다시 읽어보니 문장들이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고 있더군. 오래전 던진 질문이 몇 해 뒤의 편지에서 예기치 못한 답을 얻고 있었네. 어떤 사유는 반복되며 점점 또렷한 빛을 냈고, 어떤 감정은 세월의 여과기를 거치며 전혀 다른 의미로 정제되어 있었지. 나는 그 흐름을 가만히 응시했네. 겸, 그 순간에야 알겠더군. 이 기록들은 조각난 파편이 아니라 하나의 완결된 서사였다는 사실을 말이네.
그래서 나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네. 새로운 일을 도모하기보다 그저 읽고 또 읽었지. 문장 사이에 스며 있는 당시의 마음을 천천히 복기해 보았네. 때로는 한 구절을 오래도록 바라보기도 했지. 그 안에는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예언적 생각들이 숨어 있었거든. 그 시간을 통과하며 나는 조금씩 차분해졌네. 무언가를 새로 짓기 전에 먼저 지나온 길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배운 셈이었지.
그러다 문득 깨달았네. 내가 그동안 붙들고 있던 강박 하나가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네. 나는 이미 모든 소임을 마쳤다고 믿었지. 더 이상 감당할 몫은 없다고 주변에 말해 왔네. 하지만 이제 보니 그것은 사실이 아니더군. 끝난 것은 사회적 역할이었고, 끝나지 않은 것은 존재의 기록이었지. 나는 그 차이를 이제야 선명히 보게 되었네. 그 찰나에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가벼워졌네.
그날 밤, 나는 책상 위에 편지들을 다시 정중히 모아 두었네. 그냥 읽고 덮어버리기엔 너무도 귀한 문장들이었지. 이 기록들은 타인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통과해 온 시간을 증언하는 흔적이었네. 겸, 그래서 결심했네. 이것들을 온전한 한 곳에 모아 두어야겠다고 말이네. 아직 구체적인 형식은 정해지지 않았네. 다만 오래전부터 이어진 이 편지들이 하나의 책으로 묶일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처음으로 문을 두드리고 있네. 마치 어린 마음이 조심스럽게 새로운 세계를 기웃거리는 것처럼 말이네.
겸. 며칠 동안 편지들을 다시 읽으며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네. 나는 그동안 이 기록들을 방치해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었더군. 이미 종결된 일이라며 서둘러 덮어두려 했지. 하지만 그것은 실상 가장 안이한 선택이었네. 마땅히 해야 할 마지막 정리를 회피하고 있었을 뿐이었지. 이 문장들이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도 준엄하여 차마 손을 대지 못했던 것일세. 그 진실을 직시하고 나니 비로소 마음이 가벼워졌네.
그래서 며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네. 편지들을 책상 위에 흐트러뜨려 놓고 바라보기만 했지. 문장 하나하나가 제 호흡으로 살아나도록 시간을 충분히 주었네. 조급하게 재단하거나 정리하려 들지 않았지. 오래 묵은 생각들은 서두르면 제 진면목을 보여주지 않는 법이더군. 그렇게 멈춰 서 있는 정지의 시간이 필요했네. 겸, 아마 그 깊은 침묵이야말로 마지막 매듭을 짓기 위한 가장 경건한 준비였던 것 같네.
나는 편지들을 조용히 묶어 보기 시작했네. 특별한 설계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지. 다만 닮은 이야기들이 인력에 이끌리듯 자연스레 같은 자리로 모여들더군. 어떤 편지는 치열한 시작의 선언이었고, 어떤 편지는 담담한 끝맺음의 고백이었네. 수년 전의 질문이 먼 훗날의 편지에서 비로소 마침표를 찍고 있기도 했지. 나는 그 유기적인 흐름을 따라 종이를 하나씩 갈무리했네. 그 작업은 외형상 단순했으나 내면으론 단단해지는 일이었네.
정리를 이어가다 보니 삶이란 결국 이런 식으로 완성되는 게 아닌가 싶더군.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적힌 문장들이 어느 순간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네. 어떤 생각은 끈질기게 머물렀고, 어떤 감정은 신기루처럼 지나갔지. 하지만 그 모두가 커다란 하나의 물줄기 안에 있었네. 나는 그 균형을 인위적으로 바꾸려 들지 않았네. 그저 드러나는 형상대로 배열했을 뿐이었지. 그렇게 하니 기록들이 스스로 제 자리를 찾아 정좌하더군.
편지들을 한쪽에 가지런히 모아 두고 잠시 뒤로 물러나 바라보았네. 겸, 그 순간 형언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더군. 이것은 단순한 종이 뭉치가 아니었네. 내가 살아낸 시간의 입체적인 윤곽이었지. 한때는 혼돈이라 여겼던 편린들도 이제 보니 거대한 질서 속에 있었더군. 나는 그 장엄한 광경을 한동안 가만히 지켜보았네. 어쩌면 이 기록들은 내가 손을 대기 전부터 이미 한 권의 책으로 숨 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네.
편지들을 정리해 놓고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네. 그 찰나 분명히 깨달았네. 내가 붙잡고 있던 시간은 이미 소임을 다했다는 것을 말이네. 한때의 역할과 이름, 오래된 책임들까지 이제는 기꺼이 뒤로 남겨두어야 할 것들이었지. 이상하게도 그 자각이 서글프지는 않더군. 오히려 조용히 숨이 트이는 해방감을 느꼈네. 종결이란 사라지는 소멸이 아니라 다른 지평으로 옮겨가는 전이임을 알기 때문일세. 나는 그 필연적인 마침표를 더 이상 유예하지 않기로 했네.
그래서 결심했네. 이 기록들을 방치하지 않겠다고 말이네. 내가 써온 편지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두려 하네. 누군가에게 과시하거나 보상을 바라는 작업은 아니네. 다만 내가 살아낸 시간을 내 손으로 직접 매듭짓는 최소한의 예의일세. 겸. 마지막까지 삶의 주도권은 내게 있어야 하지 않겠나. 삶을 통과해 온 사람은 그 이야기를 갈무리할 책임도 함께 지는 법이니 말이네.
편지들을 다시 정독하며 몇 장의 종이를 골라 따로 두었네. 뜨거웠던 시작의 문장들, 고뇌하던 낡은 질문들, 그리고 그 물음표에 나름의 대답을 얹었던 시간들 말이네. 그 분류 작업이 이상하리만큼 무겁지 않았네. 오히려 처음 펜을 쥐던 시절처럼 정신이 가벼워지고 명료해지는 기분이었지. 가라앉았던 불씨가 다시 은은한 빛을 내는 느낌이었네. 나는 그 미세한 열기를 억누르지 않고 조용히 따라가 보려 하네.
겸. 이 책이 거창한 성취일 필요는 없겠네. 그저 내가 지나온 시간을 온전히 담아내는 작은 집이면 충분하지 않겠나. 편지들은 이미 그 안에서 제 호흡으로 숨 쉬고 있었고, 나는 흩어진 문장들을 제자리로 불러 모을 뿐이니 말이네. 어쩌면 이것이 내가 나 자신에게 건네는 가장 진실한 마지막 인사일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없이 평온해지더군.
오늘은 그 편지들을 한 묶음으로 정갈하게 갈무리해 두었네. 내일은 그것을 감쌀 표지를 생각하고 목차를 세워보려 하네. 겸, 이 책은 결국 그대에게 보내는 마지막 서신인 동시에, 나 자신에게 남기는 유일한 증언이 될 것이네. 삶을 남김없이 살아낸 뒤에도 단 한 가지 일은 남아 있는 법이지. 그것은 자신의 삶을 자신의 언어로 기록하여, 존재의 궤적을 완성하는 일이라네.
기억은 오늘의 나를 깨우는 질문이다.
기록은 흩어진 파편이 아니라
삶을 지탱해 온 하나의 서사다.
그것의 매듭은 소멸의 끝이 아니라
나의 언어로 완성하는 존재의 궤적이다.
{동해} 빈자리 위의 충만을 붙잡는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