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게

여든넷

by 김가희





겸. 며칠 전 마침내 원고를 한 권의 묶음으로 정리해 두었네. 책등을 세워 책상 위에 올려두니 잠시 마음이 가벼워지더군. 오래 이어진문장들이 이제 하나의 몸을 얻은 셈이니 말일세. 그러나 그 순간에도 기쁨 뒤편에서 묵직한 무게가 여전히 어깨를 누르고 있었지. 이 책이 단순히 종이로 엮인 결과물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일 것이야. 그 안에는 수십 년의 질문과 고집이 함께 묶여 있었네. 나는 잠시 그 책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거두었네. 이제야 시작된 일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지.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네. 해야 할 일들이 생각보다 많더군. 목차를 다시 점검하고, 문장 사이의 미세한 균열을 메우고, 남은 종이들을 갈무리해야 했지.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몇 장의 기록이 새로이 정돈되곤 하네. 문장들은 마치 제자리를 찾아 달려가듯 서로를 간절히 부르고 있었지. 나는 그 흐름을 막지 않고 조용히 따라가 보았네. 오래된 기록들이 마지막으로 숨을 고르는 시간이라 여겼기 때문일세. 그렇게 하루하루가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네.



그러다 보니 책상 위에 새로운 종이들이 하나둘 늘어나더군. 교정할 목록, 남겨 둘 사본, 짧은 주석 같은 것들 말일세. 사소한 작업이지만 그 안에는 묘한 긴장이 깃들어 있었네. 문장 하나를 고칠 때마다 마치 처음 펜을 쥐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지. '그때의 나는 무엇을 말하려 했던가'를 끊임없이 다시 묻게 되더군. 그 질문을 추적하다 보니 아직도 배우는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모든 답을 쥐고 있는 건 아니더군. 오히려 마지막 순간까지 배우며 고쳐 가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지.


하지만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네. 몇 시간만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어깨가 쉽게 굳어 버리더군. 눈도 금세 피로해져 문장을 오래 응시하기가 어려웠지. 어떤 날은 한 장의 종이조차 끝내 정리하지 못한 채 밤을 맞기도 했네. 그럴 때면 잠시 펜을 내려놓고 깊은 숨을 고르곤 했지. 겸. 이 작업이 단순한 소일거리가 아니라 생의 마지막 책임이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되더군. 그래서 조금 더 천천히, 그러나 끝까지 이어가기로 했네.


그럼에도 이 모든 일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고 느끼지는 않네. 문장들 사이에는 이상한 온기가 흐르고 있었거든. 오래전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이들의 목소리, 그 찬란했던 시간들이 고요히 이 기록 안에 남아 있었지. 나는 그 흔적들을 반추하며 잠시 미소를 짓곤 하네. 결국 이 책은 나 혼자의 기록이 아니라 수많은 만남이 남긴 지극한 잔향이었으니까 말일세.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다시 책상에 앉아 종이 한 장을 넘겼네. 아직 남은 일들이 있지만, 그 무게를 이제는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네.




며칠째 책상 앞에 앉아 있노라니 이제는 단순히 정리만 해서는 안 되겠더군. 앞서 모아 둔 편지들은 제법 한 권의 모양을 갖추었으나, 아직은 흐름이 느슨하고 기강이 서지 않은 상태였지. 그래서 오늘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처음부터 끝까지 서사의 순서를 다시 잡아 보았네. 어떤 글은 앞에 두고, 어떤 글은 뒤로 물리고, 어떤 제목은 아예 지워 버렸지. 애틋하다는 이유만으로 함량 미달의 것을 남겨 둘 수는 없더군. 한 권의 책이 되려면 그 안에도 엄격한 질서가 있어야 하니까 말일세. 그제야 알았네. 마지막 정리란 단순한 수습이 아니라, 끝내 삶의 기준을 세우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네.


순서를 바로잡고 나니 문장들이 전과는 다르게 읽히더군. 예전에는 각각의 편지가 저마다의 계절 속에 갇혀 있었다면, 이제는 서로의 마음을 건네받으며 하나의 길을 만들고 있었네. 어떤 문장은 여전히 사람을 향해 뜨거웠고, 어떤 대목은 오래된 다정함을 그대로 품고 있었지. 나는 그 온기를 무심히 다루고 싶지 않았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 시절의 숨결이 다시 손끝에 닿는 듯했거든. 그래서 몇몇 문장을 오래 붙들고 곱씹었지. 기록을 정리한다는 건 결국 지나온 나를 다시 한번 예의 바르게 맞아들이는 환대의 일이기도 하더군.



그러나 오래 머뭇거릴 수만도 없었네. 온기를 느끼는 것과 책을 완성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지. 나는 다시 펜을 들고 목차를 치밀하게 손보았네. 전에는 각기 따로 숨 쉬던 조각들이 그런 수정을 거치자 비로소 한 사람의 생애처럼 이어지기 시작하더군. 그때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맑아졌네. 내가 새로 무엇을 창조한다기보다, 이미 존재하던 흐름을 정확히 불러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일세. 아마 마지막 작업의 기쁨이란 이런 식으로 오는 모양이네. 요란하지 않되 분명한 빛을 머금은 채 말일세.


흐름이 잡히자 이번에는 일에 속도가 붙었네. 미루어 두었던 확인 사항들을 한꺼번에 점검하고, 쪽수와 이름을 대조하며, 남겨 둘 사본과 발송할 묶음까지 연달아 손을 댔지. 오전이 채 가기도 전에 책상 위 종이들의 위치가 여러 번 바뀌었네. 몸은 이미 피곤한데 의욕만 자꾸 앞질러 갔지. 당장이라도 끝낼 수 있을 것 같고, 오늘 더 밀어붙이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것 같은 조급함이 생기더군. 그런 때일수록 사람은 제 속도를 과신하게 되는 법이지. 나는 몇 번이고 숨을 고르려 했으나, 손은 자꾸 다음 장을 향해 먼저 달려 나가고 있었네.


그러다 문득 깨달았네. 내가 이 작업을 완수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끝내 손에서 놓지 않으려는 것인지 스스로도 모호해졌다는 것을 말이네. 문장을 더 고치고 싶고, 순서를 다시 뒤집고 싶고, 이미 충분한 대목마저 한 번 더 매만지고 싶더군. 책을 완성해 두고도 자꾸만 그 안으로 다시 침잠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 어쩌면 그것은 성실함만은 아니었을 게야. 끝을 유예하고 싶은 집착, 혹은 이 마지막 무게를 내려놓지 않으려는 묘한 미련도 섞여 있었겠지. 그래서 오늘은 한참 만에야 펜을 내려놓았네. 끝까지 책임지는 일과 끝내 놓지 못하는 일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이제는 분별해야 할 때가 온 듯하였으니 말일세.




그렇게 오늘은 일부러 종이들을 멀찍이 두고 관조하기만 했지. 놀랍게도 그렇게 거리를 두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흐름이 비로소 드러나더군. 한 편의 편지가 다른 편지의 끝을 자연스레 이어 주고 있었고, 오래된 질문이 뒤늦게 다른 자리에서 답을 얻고 있었네. 그 순간 나는 알았네. 이 책은 내가 지금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서서히 완성되어 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네. 나는 그저 그 길을 조금 앞서서 확인하고 있었을 뿐이었지.


글을 정리하는 방식도 조금 달라졌네. 서둘러 고치기보다 문장들이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자리를 먼저 살폈지. 나는 마치 집안의 가구를 옮기듯 종이들의 위치를 조심스레 재배치해 보았네. 어떤 편지는 서두에 두어야 자연스럽고, 어떤 글은 끝에 남겨 두어야 잔향이 오래 남더군. 이상하게도 그 작업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지. 이제 이 기록들이 내 손을 떠나도 스스로 자생적인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한 권의 책도 결국 하나의 집과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 안에 놓인 것들이 서로를 편안하게 받쳐 줄 때 비로소 사람이 그 안에서 머무를 수 있는 법이니까 말일세.



그러나 그렇게 자리를 잡아가는 기록들 사이에서 몇몇 편지는 끝내 마음을 무겁게 하였어. 그 속에는 지나간 시간의 상실이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었지. 이미 멀어진 이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순간들, 그때는 미처 몰랐던 뼈아픈 후회 같은 것들 말일세. 나는 그 문장들을 오래 응시하다가 한 번씩 깊은 탄식을 내뱉곤 했네. 나이가 들어도 인간의 마음은 여전히 연약한 자리에 머물러 있더군.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모든 감정이 깨끗이 소거되는 것은 아니었지. 다만 우리는 그 감정들과 조용히 나란히 앉아 있을 줄 알게 될 뿐이더군.


그래도 멈추지는 않았네. 오늘은 다시 원고를 독회하며 작은 수정을 몇 군데 더했지. 어떤 문장은 지나치게 길어 숨이 막혀 있었고, 어떤 단어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낡아 있었더군. 나는 그것들을 조심스레 덜어 내거나 새롭게 다듬어 보았네. 묘하게도 그런 단순한 반복이 마음을 평온하게 하더군. 거창한 결심보다 이런 성실한 되풀이가 오히려 일을 끝까지 견인하는 법이지. 종이 위에 작은 교정 부호들이 늘어날수록 책의 형체도 조금씩 명료해지고 있었네.



다시 한 걸음 물러나 서 보았네. 책상 위에 놓인 종이들은 이제 더 이상 파편화된 얼룩처럼 보이지 않더군. 서로 다른 시공간에 적힌 문장들이 묘한 균형을 이루며 하나의 거대한 물결을 만들어 내고 있었지. 그 광경을 바라보며 마음속에 잔잔한 평온이 스며들었네. 아직 해야 할 일은 조금 남아 있지만, 이제는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확신이 들었거든. 모든 것은 제 속도로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네. 어쩌면 마지막 작업이란 바로 이런 균형의 순간을 끝까지 지켜보는 일인지도 모르겠네.


그동안 이어 온 정리가 어느새 긴 여정의 끝을 향해 와 있더군. 종이들을 한 장씩 넘기다 보니 처음 편지를 꺼내 들던 날의 그 막막함이 문득 떠올랐지. 그때는 이 파편적인 기록들이 과연 한 권의 책으로 일어설 수 있을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했네. 그런데 이제는 다르더군. 문장들은 서로의 어깨를 받치며 당당히 직립해 있었지. 그것은 요란한 성취가 아니라, 고독한 길을 끝까지 완주한 이에게 허락되는 작은 인정 같은 것이었네.




순간 나는 이 책이 단지 나만의 사적인 기록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통감했네. 이 안에는 수많은 얼굴이 함께 숨 쉬고 있었지. 함께 웃고, 함께 번민하고, 때로는 나를 일으켜 세워 준 이들의 흔적이 문장들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네. 그래서 책장을 넘길 때마다 묘한 온기가 손길을 따라왔지. 겸, 인간이 남기는 기록이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잉태되는 것이더군. 혼자서 쓴 문장이라 해도 그 여백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겹겹이 층을 이루고 있기 마련이니 말일세.


그래도 마지막 점검에 소홀할 수는 없었네. 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남은 부분을 정밀하게 확인했지. 빠뜨린 문장은 없는지, 호흡이 어긋난 대목은 없는지 고요히 살펴보았네. 이 작업이 예상보다 오래 걸리더군. 몇 번이나 같은 페이지를 되읽으며 손끝으로 작은 흔적을 남겼지. 겸, 성급히 마무리지으려 하기보다 끝까지 책임지는 태도가 마음을 더 평안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알고 있네. 마지막 몇 장을 매만지는 동안 나는 오히려 내면이 더 맑아지는 것을 느꼈지.




해가 서쪽 지평선으로 기울 무렵, 나는 펜을 내려놓고 잠시 창밖을 조망했네. 오랜 시간 붙들고 씨름하던 작업이 이제 정말 끝을 고하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지. 이상하게도 허전함보다는 텅 빈 고요함이 먼저 찾아왔네. 겸. 인간은 결국 이런 명징한 순간을 향해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더군. 무엇을 성취했다는 사실보다, 그 일을 끝까지 지켜 냈다는 존엄한 평온이 더 크게 남았지. 그래서 나는 서둘러 다음 과업을 찾지 않기로 했네. 오늘만큼은 이 조용한 마침표의 여운을 충분히 대면하고 싶었기 때문일세.


원고를 한 묶음으로 정리해 조심스럽게 덮어 두었네. 아직 세상에 내놓을 생각은 없었지. 다만 이 기록이 어디에서 발원하여 어떤 구절양장을 지나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그 유장한 흐름을 오래도록 응시하고 싶었네. 겸. 어쩌면 이 책은 내 삶의 최종적인 답안이라기보다, 또 하나의 근원적인 질문일지도 모르겠네. 누군가가 훗날 이 문장들을 펼쳐 들 때, 그 안에서 제 삶의 잃어버린 조각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래서 나는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이렇게 생각했네. 기록이란 결국 끝을 남기는 행위가 아니라, 다음 사람의 사유를 고요히 흔들어 깨우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네.





기록으로 지나온 생을 끝까지 책임진다.

정리는 흩어진 파편 속에서 삶의 질서를 찾아

나를 환대하며 동시에

타인의 사유를 깨우는 새로운 시작이다.


{동해} 빈자리 위의 충만을 붙잡는 아이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