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대 국회가 9월 2일 개원했지만 이 날을 기점으로 한국 정치는 사실상 ‘사멸’했다. 22대 국회는 1987년 직선제 도입 이후 가장 늦게 개원식을 열었고, 윤석열 대통령도 1987년 체제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이 국회 개원식에 불참하는 ‘신기록’을 수립, 정치 종언의 화룡정점을 찍었다.
특히 윤 대통령의 국회 개원식 불참은 그동안 아슬아슬하게 지켜오던 여야의 마지막 정치 관행마저 무너진 사상초유의 사변으로 받아들여진다. 2024년 9월 2일은 입법부의 출범에 행정부 수장인 대통령이 참석해 축사를 하던 ‘아름다운 삼권분립 전통’이 완전히 붕괴된 날로 기록될 것이다.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것일까. 오늘의 정치 파행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022년 3월 대선에 승리한 직후 멀쩡하게 있던 청와대를 용산 국방부 청사로 이전한다고 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역술인이 용산 대통령 관저 땅을 보러 다녔다는 주술정치 소문이 횡행하면서 이미 한국 정치는 그 어느 때보다 기이하고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예측불가능한 일들로 점철돼 왔다.
이번 윤 대통령의 국회 개원식 불참도 설마설마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버렸다. 오죽했으면 정치권 일각에서 “윤 대통령이 여의도(국회) 모래밭에 가면 신상에 탈이 날 수도 있다”는 무속적 지시나 조언을 받았다는 소문이 횡행하고 있을까. ‘바닥이 단단하지 않은 곳에 가면 정권이 붕괴될 수도 있다’는 희한한 ‘역술’도 그 소문을 거들고 있다.
또한 일부 야당인사들은 윤 대통령의 국회 개원식 불참에 대해 비상식적이고 기이한, 어딘가 주술의 망령에 휘감겨 나온 예측 불가능의 ‘정치 붕괴 참사’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윤 대통령의 개원식 불참 사실을 알고 그의 참석을 위해 개원까지 연기해가며 그동안 지켜져 왔던 정치적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았다. 윤 대통령이 아무리 여야 ‘저질 정치’에 혐오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1987년 이후 역대 대통령들이 소중하게 지켜온 개원식 참석마저 발로 차버릴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특히 윤 대통령이 검찰 출신이라 정치를 모른다고 해도 국회의원 5선 출신인 정진석 비서실장을 비롯해 재선을 지낸 홍철호 정무수석까지 곁에서 ‘정무적 수발’을 들고 있다면 국회 개원식 참석이라는 삼권분립과 여야 협치의 상징마저 끊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용산과 여의도 사이에 놓인 마지막 다리마저 불살라버렸다. 이제 한국 정치는 정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초암흑의 길을 손으로 더듬으며 가야하게 생겼다.
윤 대통령의 국회 개원식 불참은 대통령실의 정무 기능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정진석 비서실장이나 홍철호 정무수석의 경우 보수성향은 뚜렷하지만 비교적 합리적이고 ‘비둘기파’에 속하는 인사들이다. 윤 대통령은 총선 참패 뒤 그동안의 독단에서 벗어났다는 진정성을 보여주고 여야 협치를 위해 정무라인을 그나마 합리적이고 온건한 인사로 채웠다는 해석도 나왔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총선 참패 뒤에도 어찌된 영문인지 더 우클릭 되고 강경 일변도로 치닫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번 개원식 불참 사태도 극단적이지도 않고 강경일변도도 아닌 투톱의 정무 보좌진을 둔 윤 대통령이 국회 개원 불참이라는 희대의 ‘정치 깽판’을 벌이도록 내버려두었거나 옆에서 조장했던 그룹들이 분명히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야당에서는 ‘오래 전부터 정치 분야는 김건희 여사의 베개밑송사가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또 일각에서는 역술인이나 보수 유튜버 ‘비선 라인’이 윤 대통령과 ‘직통’하면서 민감한 사안에 대해 상당히 극단적이고 기상천외한 정무적 조언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 지 오래됐다.
분명히 대통령의 개원식 불참에 대해 대통령실에서는 부정적 입장도 있었을 것이고 이에 대한 난상토론이 치열하게 오갔을 것이다. ‘여의도’ 출신 일부 온건성향 정무라인들은 일방적으로 국회 개원 불참과 정치 파행을 종용하지는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 공식 정무라인의 기능은 완전히 무력화되었을 수 있다. 지금까지 국회를 존중하고 타협과 협치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내던 인사들은 이번 윤 대통령 국회 개원 불참을 계기로 완전히 설 자리가 없어져버렸다. 정진석 홍철호 여의도 라인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 이상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정무 기능을 하기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윤 대통령의 개원식 불참에 진한 아쉬움을 표하는 의원들이 많다. 이제 국회는 ‘대통령도 국회 개원식에 오지 않는데 우리가 더 이상 지킬 예의나 금도가 뭐가 있겠느냐’며 난장판 속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집권여당 국민의힘은 윤 대통령에게 개원식 불참을 요구해 그것을 관철시켰고 이제 여야 정치에서 타협과 협치의 의미는 사실상 소멸돼버렸다.
이재명 대표와 한동훈 대표는 차기 대선을 위해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서로 만나서 협의하고 대화하는 척만 할 뿐 진심으로 마주앉지는 않는다. 서로를 대권가도 ‘점프업’에 이용하는 ‘미끼’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솔직한 대화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의 ‘대좌’는 일방독주하는 윤 대통령에게 협치와 대화를 압박하는 ‘오월동주’의 측면도 있었다.
이에 더 고립감에 빠진 윤 대통령은 결국 정치판에서 완전히 자신의 존재를 이탈시켜 버렸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실이 윤 대통령 국회 개원 불참에 대해 내놓은 ‘변명’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분노가 뒤섞인 일종의 저주로 읽힌다.
대통령실 관계자가 윤 대통령 국회 개원 불참의 첫째 이유로 내건 것은 전현희 민주당 의원의 ‘살인자’ 발언이었다. 박찬대 원내대표가 ‘간접 사과’를 했지만 전 의원 본인이 직접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문제 삼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안 자체가 시간이 좀 지난 데다 중진의원의 발언 하나 때문에 대통령이 국회 개원식 참석 보이코트까지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비상식적이고 오버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여기에는 김건희 여사에 대한 참모들의 충성경쟁이 더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통령실에서 ‘언터처블’인 김건희 여사에 대한 모욕이라는 점에서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일부 참모들이 윤 대통령에게 국회 개원 불참이라는 초유의 저항카드를 실행케 해 그들의 절대 충성심을 보여주고 싶었을 개연성이 있다. 윤 대통령도 국회 개원 불참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부인 사랑’을 드러낸 것이라면 김 여사로부터 점수를 좀 땄을 수도 있겠다.
두 번째 이유는 특검과 탄핵을 남발하는 국회를 정상화해야 윤 대통령도 개원식에 참석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대통령을 불러 그냥 망신주기 하는 것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대통령실은 지난 대선 이후 민주당이 윤 대통령을 국가최고원수로 인정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탄핵을 들먹이는 것에 대한 노골적인 불쾌감과 분노에 방점을 찍고 있다.
윤 대통령은 자신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 야당에 감정이 완전히 틀어져 있고 그런 태도를 대선 불복의 연장선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민주당이 190여석을 점하고 있는 국회에 가봐야 망신만 당할 게 뻔하다’는 ‘유치한’ 계산을 하지 않았을까. 대통령 망신당하는 것이 1987년 이후 여야가 그토록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도 어렵게 지켜온 전통을 한순간에 짓밟아버리는 것만큼 더 소중한지는 알 수 없다.
대통령실이 택한 이 ‘망신’이라는 단어 속에는 오로지 국정운영 논란을 야당 탓으로만 돌리려는 피해의식과, 대화와 타협의 노력은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기분 나쁜 것만 먼저 챙기는 ‘검사’의 ‘우쭐의식’이 오롯이 함축돼 있다. 정치 도전 한번만에 대통령선거 승리를 거머쥔 윤석열에게 국회의원들쯤은 발톱 아래 뭐 정도로 보이지 않을까. 국회 개원식에 불참하면서 속으로 ‘하찮은 의원들 버르장머리를 이번에 단단히 고쳐놓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국회의원은 국민을 대표하는 헌법기관이다. 윤 대통령 국회 개원식 불참은 곧 국민들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윤 대통령이 정치를 공적 사명감과 헌신, 인내로 대하지 않고 오로지 윤석열 개인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는 것에만 계산기를 빠르게 돌리는 이상 앞으로 국회 개원식 불참 이상의 더 어마무시한 일도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이래저래 대통령의 기이하고도 비정상적인 국정운영에 국민들은 정신이 없다. 그냥 ‘꽉 붙잡고’ 각자도생하기만 바랄 뿐이다. 윤 대통령은 국회 개원식에 불참한 2일 발표된 한 여론조사에서 취임 후 두 번째로 낮은 지지율(29.6%)을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