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8일 윤석열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단순히 ‘상남자의 눈물겨운 아내 사랑’ 정도로 본다면 큰 오산이다. 기자들 질문의 대부분이 선출되지 않은 권력 김건희 여사의 ‘국정 개입’ 의혹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런 ‘거대한’ 질문에 대답하는 윤 대통령의 답변은 ‘휴대폰 전화번호를 이제라도 바꾸겠다’는 수준이었다.
대한민국 국민 중 75% 정도가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분노’한 것에 대해 윤 대통령이 내놓은 ‘변명’이 고작 휴대폰 때문이라니... 허무하다 못해 헛웃음이 나온다. 국민들이 지금까지 김건희 여사가 밤새도록 남편 휴대폰을 붙잡고 일일이 답장을 하는 그 뜨거운 ‘지지층 사랑’ 이야기나 듣자고 김건희 특검이나 공천개입 의혹 규명을 그토록 요구했던가.
그렇다. 지금 김건희 여사의 ‘국정 농단’ 의혹에 대해 국민들이나 야당이 느끼는 것과 윤 대통령의 현실인식은 한여름과 한겨울 차이만큼 그 온도차가 크다. 하지만, 과연 윤 대통령이 집권 이래 최악의 지지율 나락으로 떨어진 현재의 위기정국을 모르겠는가. 자신과 아내에게 서서히 닥쳐오는 탄핵과 특검의 공포를 모를 리 있을까.
윤 대통령이 정치를 잘 모르거나 김 여사를 유난히 사랑하기 때문에 국민들이 느끼는 분노에 대한 현실인식이 전혀 없다는 식의 해석은 하나마나한 이야기다. 우리는 아직도 ‘윤석열’이라는 정치인을 잘 모르거나, 아니면 그의 ‘능구렁이 전술’을 까발리고 격파할 만한 적당한 무기를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윤 대통령은 공개 기자회견 때마다 ‘윤석열-김건희 공동정권’ 독주에 대해 ‘박절하지 못하다’거나 ‘순진하다’는 등의 ‘어리숙한’ 단어를 사용하며 구렁이 담을 여유 있게 넘어가고 있다. 이번에도 그가 대변인에게 공개석상에서 반말을 하거나 외신기자의 한국어 질문에 ‘말귀를 못 알아듣겠다’며 공개무안을 주는 정도의 무례는 서울대 출신 엘리트 검찰총장 출신 정도라면 당연한 품격인데 우리는 그런 ‘수준 낮은’ 대통령의 태도에만 몰입돼 비판하며 어물쩍 넘어가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번 기자회견에서 어리숙하고 순진해보이려는(목이 아프다며 질문을 더 받지 말라고 한 것도 동정심 유발의 특효약이라고 생각했음 직하다) ‘연기’를 위기 정국 탈출의 최대 동력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그런 위기탈출 ‘묘책’이 어느 정도 통했다는 것은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의 반응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한동훈 대표는 윤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고 하루 동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며 무척 뜸을 들였다. 그 사이에 김종혁 최고위원 등 일부 ‘친한계’ 인사들은 대통령 회견에 대해 “국민 눈높이에 미치지 못했다”며 강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한 대표도 그런 수준의 비판 정도는 할 것이라는 예상도 많았다.
하지만 한 대표는 대통령 회견에 대해 노골적으로 ‘꼬리’를 내려버렸다. 그는 “윤 대통령이 현 상황에 대해 사과하고 인적 쇄신, 김건희 여사 활동 중단, 특별감찰관의 조건 없는 임명에 대해 국민들께 약속했다”며 “우선 당은 즉시 대통령이 말했던 특별감찰관 임명 절차를 추진하겠다. 필요한 절차 준비를 지시했다”며 딴 소리를 했다. 평소 좀 알만한 내용이 나오면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국민 눈높이를 유독 사랑하는 한 대표이지만 윤 대통령 기자회견에 대해 ‘평가’ 자체를 유보한 것은 의외였다.
필자도 의표를 찔렸다. 그가 차기 대권에 욕심이 있다면 전 국민의 시선이 집중된 이번 ‘기자회견 전투’에서 대통령에게 멋지게 한방 날려 ‘미래’ 교두보를 탄탄하게 구축할 수도 있다는 예상을 했지만, 한 대표는 그런 기대를 단숨에 차버렸다. 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칼집에서 칼을 아예 꺼내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역시 국민들이나 민주당이나 필자는 어리석은 정치 초보에 불과할 뿐이다. 대통령의 태도 변화나 국정 쇄신, 김건희 여사 ‘유배’같은 어줍잖은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 말았어야 했다. 윤 대통령이 정치 초보이고 한 대표가 정무 감각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이번에 ‘검찰 이익공동체’가 얼마나 강고한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윤석열 엎드리기-한동훈 절 받기’의 주고받기 찰떡 궁합 연기는 역대 최악의 대통령을 위기에서 절묘하게 구출하고 있다. 윤 대통령의 ‘어리숙한 사과’와 한 대표의 노골적인 한발 빼기로 보수층은 일단 탄핵의 공포에서 어느 정도 해방되고 오히려 지지세를 결집하는 계기로 삼고 있다. 야당에서는 ‘김건희 유학이나 유배’ 그리고 거국내각에 준하는 인적 쇄신 등을 요구했지만 윤 대통령은 제1부속실 설치와 일부 대통령실 출신(강훈 전 정책홍보비서관의 한국관광공사 사장 내정 철회)의 낙하산 인사 중단 등의 꼬리자르기로 유유히 위기정국을 빠져나가고 있다.
명태균씨가 검찰 이틀째 출석을 마치고 나오면서 일부 기자들에게 ‘고소하겠다’며 호통을 치는 적반하장 식의 대응을 하는 것도 대통령실과 ‘딜’이 끝났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이렇게 윤 대통령 기자회견 ‘전투’는 유야무야 막을 내릴 전망이다. 오히려 매주 장외투쟁에 나서는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가 ‘대통령이 사과했는데 왜 바깥으로 도느냐’는 따가운 시선에 부담을 느낄 정도가 됐다.
사실 한동훈 대표는 윤 대통령 기자회견에 대해 애초부터 강하게 치고나갈 명분이나 배짱이 없었다. 한 대표측은 먼저 ‘박근혜 탄핵 학습효과’로 윤 대통령의 탄핵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 어차피 임기를 다 채울 가능성이 있는 윤 대통령과 완전히 척을 질 필요가 없다는 계산이 나온다.
또한 현재권력인 윤 대통령과 ‘친윤계’의 암묵적 동의 없이는 차기 대권 당내 ‘예선’도 쉽지 않다는 걸 현실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일부 열혈 보수층에서 한 대표를 ‘제 2의 유승민’이라며 배신자 프레임으로 몰아가고 압박하는 것도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아직은 보수층이 윤 대통령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박근혜의 탄핵은 보수주류들이 그것을 용인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는 확신 때문에 윤 대통령과 같은 배를 탈 수밖에 없다는 상황논리도 작용하고 있다.
윤 대통령과 한 대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은 그들이 ‘검찰 이익공동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이다. 검찰 이익공동체라는 새로운 정치권력은 한국 정치사에서 일찍이 그 전례가 없었던 새로운 현상이다. 윤 대통령과 한 대표는 자신들이 전통적인 정치 주류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우리끼리’라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작은 이슈나 사안에 대해서는 자존심 싸움을 하는 척하며 으르렁거리지만 결정적 순간이 오면 ‘검찰이 남이가’ 모드로 재빠르게 변신한다.
이는 그들이 수많은 정치권력 수사를 해오며 배운 정치인들의 본능적인 생존방식이 그대로 체화돼 있다는 방증이다. 또한 수많은 ‘권력 수사 케이스’를 습득하며 얻은 정치에 대한 남다른 검찰의 후각이기도 하다. 지금 민주당에선 윤 대통령 탄핵이냐 아니면 임기단축 개헌이냐를 놓고 ‘김칫국’을 진하게 마시고 있다. 국민들이 분노하면 대충 ‘박근혜 탄핵 모델’로 가지 않겠느냐는 안일하고도 순진한 몽상에 빠져 있다.
검찰 이익공동체의 토대가 그토록 허술할까. 검찰 이익공동체라고 해서 단순히 윤석열, 한동훈과 그의 검찰 인맥이라고 봐선 안 된다. 현재의 검찰 이익공동체 주변에는 그들의 ‘피’를 빨아먹고 살아가는 국민의힘 ‘기생충 권력’도 광범위하게 포진돼 있다. 보수의 수치이긴 하지만 편안하게 앉아서 권력재창출과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기생충 권력은 검찰 이익공동체가 자동으로 굴러가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국민들과 민주당이 ‘심각하게’ 생각하는 김건희 여사 국정 농단 의혹을 ‘밤샘 문자 답변’과 같은 가벼운 에피소드를 동원해 ‘장난’으로 유야무야 넘겨버렸다. 이런 ‘허허실실 작전’은 그가 정치 초보이기 때문에, 아니면 공감 능력이 떨어져서 그렇게 대답했다며 그의 ‘무지함’을 통렬하게 비판하며 자기위안을 삼는 민주당의 미숙한 현실인식을 낳고 말았다.
검찰 이익공동체는 한번 잡은 권력을 절대 쉽게 넘겨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윤석열과 한동훈은 그들이 정치에 입문해 권력을 행사해 나가는 과정에서 얻은 그 달콤함과 국민의힘 기생충 권력을 보면서 ‘한번 더 해도 되겠다’며 대권을 밀약했을 가능성이 탄핵이나 특검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다.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은 그것을 모르는지, 알면서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건지 답답하다.
결국 윤석열-한동훈 검찰 이익공동체를 먹여 살리는 것은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이다. 이번에야말로 야당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검찰 이익공동체의 20년 장기집권도 우스갯소리가 아닌 날이 올지도 모른다. 야당이 못하면 국민들이라도 눈을 부릅뜨고 권력을 사유화하는 검찰 이익공동체를 비판하고 깨부숴야 한다. 권력을 한번 맛본 자는 결코 그 맛을 잊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