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사에서 대통령 사저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김영삼의 상도동, 김대중의 동교동은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는 일종의 투쟁 본부였다. 그들의 사저는 권력에 저항하는 이들이 모여 시대의 흐름을 바꾸던, 공간의 지배가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대통령 사저는 풍수와도 관련이 있어 호사가들의 가십거리가 되기도 했다. 사저의 풍수지리를 통해 대통령 당선 여부를 예측하거나 정치적 길흉화복의 소재가 되었던 것이다. 사저가 서사의 지배로도 작동한 것이다.
그런데 사저가 가압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집이 자본의 지배로 전락한 것이다. 사저가 공간과 서사의 영역에서 물질의 밑바닥으로 추락한 것 같아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구 달성군 사저가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가세연)에 가압류됐다고 한다. 가세연이 박 전 대통령이 달성군 사저를 매입할 때 25억원을 빌려줬는데 그 중 10억원을 돌려받지 못했다며 가압류를 건 것이다.
대통령 사저가 돈 문제로 시끄러웠던 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막내아들 홍걸씨는 민주화의 본산이었던 동교동 자택을 지난 2024년 100억원에 매각해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거액의 상속세를 이유로 들었지만 동교동계 인사들조차 사전에 알지 못했을 만큼 ‘민주주의 성지’의 마지막은 초라했다. 민주화의 투사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구축한 공간의 지배력과 서사의 위엄이 자식 세대에 이르러 고작 ‘커피숍 매물’로 전락한 것이다.
대통령 사저가 돈 문제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 것은 공교롭게도 모두 2세 정치인에 의해서였다. 김홍걸과 박근혜는 공통적으로 자신의 노력과 치열한 경쟁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증명한 인물이 아니다. 부친의 막강한 정치 자산을 손쉽게 물려받은 뒤 금배지를 달고 대통령이 됐다.
오로지 아버지의 공간과 서사의 자산을 밑천 삼아 정치적 영광을 누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 끝은 참담하다. 민주화의 상징을 매각해야만 했던 아들이거나 부친의 상속재산을 탄핵 등을 둘러싼 변호사비와 벌금, 추징금의 미납에 의한 경매 처리로 날려버린 것이다.
정치인은 허업의 장본인들이다. 그들은 그 어떤 물질적인 생산작업을 하거나 노동으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다. 지지자들의 후원금으로 평생을 살아가다가 정치의 명줄이 끊기면 비참한 말로를 겪기도 한다.
그래서 정치인은 스스로를 단련하지 않으면 끝의 인생이 더욱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부모의 이름을 물려받은 2세 정치인에게는 더 강한 자기 절제와 검소한 생활이 요구된다. 부모의 이름이 대신 싸워주지 않는 순간이 반드시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홍걸의 선택은 정치적 유산을 관리하는 대신 그것을 개인 재정 문제의 수단으로 전환하다가 국민들을 실망시켰다. 박근혜의 말년 역시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윤택한’ 삶의 규모를 줄이지 못한 채 결국 남의 돈에 노구를 의탁하는 현실로 귀결됐다.
이처럼 부모의 정치 유산이 무너지는 데에는 거창한 음모도, 외부의 공격도 필요 없다.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고 검소하지 못한 계승자 하나면 충분했다. 보호 속에서 자란 정치인은 위기의 순간에 자신을 지탱할 근육이 없다. 정치가 끝난 뒤의 삶까지 책임질 능력도, 감각도 갖추지 못한다. 결국 그 빈자리는 타인의 돈이 메우게 되고 정치의 품격은 자본 앞에서 무너진다.
이런 장면은 개인의 불운 때문에 나타나는 게 아니다. 한국 정치가 반복적으로 목격해온 구조적 실패다. 이름을 물려주는 데는 관대했지만 책임을 물려주는 데는 인색했던 세습 정치 문화의 씁쓸한 결과다. 하지만 이런 장면들은 비단 세습 정치인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작금의 정치 현실을 돌아보면 ‘남의’ 돈과 특권으로 호의호식하는 현역 정치인들 역시 이 질문에서 자유롭지 않다. 평생 노동으로 돈을 벌어본 적 없이 세비와 후원금에 의존해 살아온 전업 정치인들에게 돈이란 과연 무엇일까. 스스로 벌어본 적 없는 돈은 정치인의 윤택한 일상과 고달픈 서민들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까.
박근혜 사저의 가압류를 보면서, 돈의 무게를 체감하지 못하는 정치인들에게 공적인 책임감이나 서민의 삶에 공감하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공간은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74세가 되도록 집 문제 하나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어른이’에게 한때 나라 전체를 맡겼다고 생각하니, 아찔하고 허탈할 뿐이다.
*이 글은 투데이신문 2026년 2월 6일자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