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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와이이 횬쌤 Aug 03. 2020

검정 비닐 봉투 하나~

일본 가고시마에서 홈스테이 했던 추억~

‘검정 비닐 봉투 하나’  

“오카상 쿠로 부쿠로 쿠다사이~”

일본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고 돌아오던 날.
일본 어머니께 내가 머물던 방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검정 비닐 봉투 하나 주세요.)

방학 동안 홈스테이 집의 일본 부모님께 마지막 감사의 인사를 하고 떠나기 전,
내가 머물던 방을 치우면서 일본 어머니께 검정색 봉투하나를 달라고 부탁을 드렸었다.
그 이유는 방과 화장실의 쓰레기를 치우기 위해서.

정확히 올해로부터 25년 전.
나는 일본의 가고시마로 홈스테이를 떠났었다.
일본어가 능숙하지 않았던 대학 시절인 탓에 말이 서투르고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과연 그곳에서 적응을 잘 하고 지낼 수 있을지, 한국의 부모님과 떨어져서도 과연 잘 해낼 수 있을지 등등. 정말 간절히도 많은 고민을 하며 일본 가고시마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한국인 한 명 없는 곳의 온통 낯선 일본인들만 있는 곳에서 유창하게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란 20살이던 내게 정말 많은 용기가 많이 필요했다.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눈치만 실컷 보다가 제대로 해야 할 일을 못하는 일도 많았고 간혹 오해를 사기도 했으며 내가 필요한 것을 정확히 말로 표현을 못해 대강 대강 끝나버리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그 당시 어린 마음에도 많이 속상했던 기억이 있다.

홈스테이를 했던 일본 집은 일본의 남쪽, 큐슈의 가고시마현에 위치해있다. 이곳은 지방의 소도시라 집의 규모도 좀 큰 편이고 방의 여유가 있어 매년 일본의 부모님께서는 집에 유학생을 초대해 방학기간 동안 같이 지내는 홈스테이 자원 봉사를 하고 계신다.
지금도 환갑을 넘기신 나이심에도 불구하고 국제 교류가 중요하다고 하시며 예전보다 머무는 유학생의 숫자는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홈스테이로 일본에서 공부하는 외국인 학생들을 돌보시고 있다.

홈스테이란 것이 자신의 사생활의 부분까지도 다 노출이 되어져 버리기 때문에 참 하기가 힘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홈스테이로 가고시마 집을 다녀오기 전까지는 나도 그런 생각이 강했다. 하지만 내가 머물렀던 가고시마의 부모님은 그동안 갖고 있던 나의 생각의 좁은 편견을 말끔히 씻어주신 분들이시기도 하다.

 일본 부모님의 사랑과 배려 덕분으로 나는 첫 홈스테이의 시간동안 일본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같이 공부도하고 같이 생활하며, 일본의 일반 생활들을 속속히 경험할 수가 있었다.
25년 전의 가고시마에는 정말 한국인이 보기 드물어 나를 신기한 듯이 보는 아이들도 많았고 동네 어른들도 자신의 나라 말을 하는 외국인을 보며 많이 신기하게 생각 했었다.

일본에서 모든 방학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지막으로 방 정리를 하고 있는데 한국에 계시는 엄마의 잔소리가 귀를 스쳤다. “어느 곳을 가든 돌아올 때는 반드시 들어 갈 때 보다 나올 때 더 깨끗이 해라”라는 엄마의 잔소리가.
정말 신기했다. 평소 집에서는 매번 들리는 엄마의 잔소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었는데 막상 엄마가 안 계시는 타지의 일본에서는 마치 엄마가 내 뒤에서 생생히 잔소리를 하고 계신 듯이 느껴진 것이다. 엄마 잔소리의 주 레파토리인 “모두 다 너를 위해서, 너를 생각해서 잘 하라고 하는 거야.” 라는 말이 귓가를 맴돈 것이다.

홈스테이 기간 동안에는 방을 대강 치우긴 했지만 돌아오는 날만큼은 있었던 때보다는 깔끔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 해 돌아오기 이틀 전부터 곳곳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화장실 청소도 하게 되었고 여기 저기 지저분한 것들은 모두 검은 봉투에 넣어 버릴 요량으로 검정 비닐 한 장을 일본 어머니께 달라고 부탁 드린 것이다.
한국 엄마의 잔소리로 단단히 익혀진 나에게 너무나도 당연히 여겨진 화장실 청소는 지금까지 일본 어머니와의 인연을 지속해준 가장 큰 나의 이미지였다고 하면 다들 믿으실런지.
일본 어머니는 그 수많은 유학생 중에 자기가 쓴 화장실의 청소까지 하고 귀국을 한 학생이 지금까지도 나밖에 없다 하시며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신다.

그 검정 봉투 사건(?)을 덕분으로 대학 때 갔던 그 집, 그곳에 매년 휴가 때 돌아가 일본 부모님과 같이 이곳 저곳을 여행하기도 하고 방학을 매년 같이 지내고 있다.
방도 제대로 치우지 않고 제 몸치장만 할 줄 안다며 딸의 뒤를 쫓아다니시며 매일 잔소리를 하시던 우리 엄마의 잔소리 노고가 그렇게 빛을 발하게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엄마의 잔소리의 덕분으로 홈 스테이 시간 동안 항상 주변을 살피게 되었고 그 행동이 몸에 익은 덕분으로 이렇게 일본에서도 깊은 인연이 가능해져 그 덕분으로 좋은 사람들과 마음이 풍요로운 시간들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나 신기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게 대학 시절 연을 맺을 것을 계기로 25년 동안 일본 부모님은 4번 정도 한국을 방문하셨다. 한국 부모님은 일본어를 하나도 하지 못하셨지만 일본 부모님을 집으로 초대하셔서 김치 담그는 법도 보여주셨고 비빔밥, 불고기도 손수 다 만들어 극진히 대접을 해 드렸다. 부족한 딸을 잘 보살펴 준 고마움의 표시로 무언가를 일본 부모님께 해드리고 싶었던 부모님의 마음이 담겨 있던 것 같았다.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마음이 통하면 통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한국의 부모님과 일본 가고시마 부모님의 만남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두 부모님의 첫 만남의 시간으로부터 짐짓 20년이 지났어도 그때 느낀 그 따뜻한 감정은 지워지지가 않는다. 지금도 늘 전화를 드리면 양쪽 부모님들은 여전히 서로의 안부를 물어보는 것을 본다.

양국 부모님들 사이에서 느꼈던 감동은 여전히 내게 생생히 남아있다.
어학을 업으로 지금까지 이어온 20년 이상을 이 때의 감동은 나에게 사람들에 대한 기본 마음과 태도가 되어 왔다.

마음이 통한다는 것.
양국 부모님의 만남은 ‘말은 말을 뛰어넘어 마음이 통해서야 만이 더 깊은 우정을 쌓을 수 있게 된다.’ 는 인생의 귀한 자세를 배우게 되었다.

국경을 뛰어넘어 나이를 뛰어넘어. 이런 소중한 인연이 가능하다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재산인지 모르겠다. 사람과의 진지한 마음과의 교류는 나를 더욱 열심히 살게 하는 힘이 되었고 더 마음 따뜻하게 다른 사람들을 대하게 되는 자세들을 지닐 수 있었다.
사람의 마음과 마음의 교류만이 척박하고 힘든 하루하루의 생활에 촉촉이 마음의 풍요를 가져다 주는 ‘쉼’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 같다.
한 시간도 한 사람도 소홀히 하지 않음. 그리고 상대를 진심으로 아끼고 상대와 같이 호흡해 가며 동고하는 마음.
그 마음의 중요성을 몸소 체험한 그 홈 스테이의 시간은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내 마음의 근간을 이루는 마음의 대지로 단단히 뿌리 내려 갈 것이다.
사람을 소중히 하는 법의 가치를 몸소 알게 된 나의 소중한 25년의 추억이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평생 남을 소중한 내 안의 추억이다.
이 소중한 진심의 마음과 마음의 교류를 앞으로도 만날 학생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다. 그리고 나의 두 양국의 부모님을 더 소중히 해가며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나를 돌보아주신 두 분의 노고에 꼭 보답해가는 내가 되어가야겠다.

두 분의 마음에 꼭 보답할 수 있는 내가 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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