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하는 이 순간마저도 아까워

짜증낼 시간에 무작정 달려보기

by Kiri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예상치 못한 일로 일정이 틀어지거나 계획이 어긋나는 일은 꼭 일어나기 마련이다.


버스가 밀려 공연 시간에 늦는다거나

친구의 야근으로 약속이 미뤄진다거나

아침에 예약해 놓은 PT시간을 늦잠으로 날려버린다거나......



그 상황이 되었을 때 먼저 짜증이 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짜증을 내면 이 순간의 내 억울함이라던가 답답함이 가시는건 물론이거니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이 빈 공백을 알차게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짜증을 몇시간 동안 내고 있기에는 내 이성세포(무빙건님 천재)가 이미 짜증세포를 슬슬 옆으로 밀어내고 있는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 다음은 어떻게 할 꺼야?

이성이가 이렇게 질문을 던졌을 때는 이미 대답도 함께 떠 있다.


지금 내가 가장 빠르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지

그게 가까운 카페에 앉아 아아를 들이키는 것이던, 다음 목적지로 냅다 뛰는 것이던.




베네치아에 도착한 첫 날부터 역시나 날은 흐렸다

도착한 순간 짙게 드리워진 안개부터 떠나려는 날 구슬비까지, 파란 하늘과 어우러지는 곤돌라의 우아한 모습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도시였다.

(전날 오전에 보트도 탔는데.. 그 날도 안개가 자욱해 부딛히지 않게 운행하는게 겨우였다)




이렇게 저렇게 한숨쉬다 맞이한 마지막 날.

저녁 6시에 떠나려는 기차 시간표를 목전에 둔 그 시간도, 역시나 날씨는 우중충하다.

마치 떠나는 아쉬움에 빠져 있는 내 마음처럼.




DSC06597.JPG '흐림요정' 타이틀을 가진 여행자가 바라본 리알토 다리





첫인상이 한껏 습기 먹은 귀신의 집이었지만, 역시 베네치아는 매력있는 도시이다

평평한 곳보다 언덕이 더 많으며, 골목이 아닌 작은 다리로 섬과 섬이 연결되는 곳.

그 다리 밑으로 지나가는 물줄기. 도시 전체가 물 내음을 머금고 있는 수중도시.

정말 세계 어딜 가도 이런 도시의 모습은 찾기 힘들 것이다


(MB가 이 도시에 감명받아 한국의 베네치아를 만들겠다며 대운하를 건설하고자 했다는데....

꿈을 너무 크게 꾼 듯 하다.)




파란 하늘 아래에서 보면 더 멋진 곳일텐데..

난 한번도 보지 못하고 떠나는구나 싶었다






이런 아쉬움이 계속 남아서인건지 관광을 핑계로 짐을 가지러 숙소로 가는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베네치아는 섬이 물고기 모양이어서 한바퀴를 돌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 때문에, 절반 왔다면 절반만 가면 당연히 도착할 것이라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초행길에서의 나의 감을 믿은 착각


구글맵도 아니고 종이 지도를 손에 들고 유럽 골목, 그것도 베네치아를 다니면서 예정된 시각에 딱 맞춰 도착할 수 있을 꺼라는 건 나를 너무 믿은 잘못이었다 (실제로 베네치아는 구글맵이랑 잘 맞지도 않는다)


또는 베네치아의 돌바닥과 다리를 캐리어를 끌면서 역까지 10분만에 질주할 수 있을거란 나의 과욕




하지만 기적적이게도 난 분명히 역에 6시 전에 도착했다

역 입구에서 5시 55분, 플랫폼으로 들어갈 때 시계는 분명 5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왜?

기차가 떠나버린 것일까?




눈 앞의 기차는 이미 출발을 해버려 덜컹덜컹거리며 잘도 역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니 왜?

정시도 아니고 늦게 출발하는 것도 아니고,

일찍 출발하는건 왜지?




유럽의 알 수 없는 시간 관념에 허허... 하며 허탈하게 웃고 있다가,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정신을 차리고는 매표소로 달려갔다. 다음 열차의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그러나 없었다. 마지막 열차였던 것이다.




Last train??!!!!?



지금 생각하면 이 때의 내 모습이 조금 창피하다.

매표소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마지막이라고 평화롭게 말하는 직원 앞에서 정말 마지막이냐며 큰 소리를 낸 내 모습이 좀 부끄럽다. 하지만 이때는 정말 절실했으니 어쩔 수 없지.


오죽 불쌍해 보였으면 그 매표소 직원이 잘 곳이 없으면 자기 집에 가서 하룻밤 묵어 가라고 했을까...

TMI) 나이 지긋하셨던 직원 할아버지는 와이프랑 둘이 사는데 오늘 딸 부부가 저녁을 먹으러 온단다. 자기 사위가 일본인인데 너랑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를 위로해 주셨다. 아마 내가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신 듯.



머리속으로는 숙소에 다시 돌아가 하룻밤만 더 지낼 수 있는지를 물어보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말에 눈물날 만큼 고마웠고 90도로 몇번을 감사하다고 인사했는지 모른다.



여행이 끝나고 이따금씩 생각이 든다


이 때 간다고 했으면 어땟을까? 내가 영어를 조금만 더 잘했다면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더 즐거운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금 가라고 해도 무서워서 선뜻 가지 못할 쫄보......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발걸음이 무거웠다

일정이 어긋나서 화가 나기도 하고 짜증나기도 하고.


왜 기차는 예정보다 일찍 떠나버려 나를 곤란하게 만든 걸까.

예정대로라면 내일 아침부터 로마를 돌아다닐 생각이었는데.

볼 것 많다는 로마를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었는데!



속으로 투덜투덜 짜증짜증 내다 고개를 들었는데, 먹구름으로 쌓인 내 기분과 다르게 점점 하늘이 맑아지는게 보였다. 아직 해가 다 지지 않은 탓에 구름 사이로 불긋불긋 노을도 비치기 시작했다.




캐리어를 끌고 터덜터덜 걸어가던 발거음이 어느덧 달리기 시작했다.

아마 아까 달려가던 빠르기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끌고 가던 캐리어도 어느 새 손잡이를 부여잡고 들고 뛰기 시작했다.


사장님이 숙소 문을 닫고 카지노에 가지 않으셨길 바라며!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요란스레 돌아온 내 모습에 사장님은 왜 아직 안갔냐며 걱정하셨지만, 내 머리속에는 떠나간 기차는 이미 버려진지 오래였다.

짐덩어리였던 캐리어를 숙소에 내팽개치고는, 로마숙소 1박을 여기서 지낸걸로 바꿔달라며 사장님과 빠른 딜을 쳤다.


어차피 오늘 묵기로 한 로마 숙소도 사장님 숙소이니 여기서 지내는 것으로 해주세요!


Call!!!!


사장님의 시원한 OK!


난 다시 밖으로 내달렸다.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힌 하늘에 벌써 달이 밝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DSC07344.JPG

이 도시에 온 이래로 가장 마음이 두근거린 때가 아닌가 싶다


DSC07493.JPG 없을 뻔 했던 시간에 최고로 좋아하는 사진을 찍었다




마침 이 날은 아쿠아알타였다.

하나 둘 길 위에 발판이 세워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물이 차올라 높은 곳은 무릎까지 올라올 정도로 물이 찼다.

너무도 익숙하다는 듯이 장화를 신은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우왕자왕하며 이리저리 물을 피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사람들의 움직임은 점점 좊은 발판으로 모여졌고, 다들 차례로 줄을 서 정해진 곳으로만 걸어다니게 되는 재밋는 풍경도 만들어 졌다.





DSC07455.JPG 추워서 초점 다 날린 산마르코 광장



이 순간을 아쉽게도 카메라가 아닌 눈과 기억에 담을 수 밖에 없었지만, 내가 본 가장 멋진 광경 중 하나가 되었다.

이 모습을 보고 난 후 난 베네치아는 꼭 겨울에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되었다




만약 정시에 떠날 수 있었다면, 밤 늦게 로마에 도착해 숙소에서 쉬고 있을 시간이다. 아마 피곤하다며 잠을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기차를 놓친 뒤 망연자실 해 베네치아 숙소에 콕 박혀 있었다 해도 비슷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숙소를 탈출했고, 이 날 최고의 순간을 눈에 담았다.

잠깐의 지각으로 놓친 기차가 그 후 단 3시간동안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시간을 만들어 준 것이다




가끔 고민보다는 단순하게 행동하는 쪽이 해답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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