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낀 샴푸모자

낯선 것이 어려운 I 형의 모험

by Kiri




극 I형의 사람의 대부분 그렇듯(아마도?),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만난 지 10분도 안 되는 사람과 마치 매일 보던 사람인양 대화를 나누고,

처음 가본 지역이 마치 제 동네인 양 탐험할 수 있는 E형의 인싸 기질이 언제나 부러운.


mbti와 같은 성향 검사를 할 때마다 나에게 걸린 태그는 항상 #내향적 #분석적 #차분 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때는 의외로 빠르게 찾아왔다.



*시점은 대학교 4학년 1학기 첫 1주일을 버리고 떠난 2010년 2월 베네치아



나는 날씨 운이 꽤나 없는 사람이다

다행히 비를 만나는 일은 많이 없지만 흐린 날은 굉장히 자주 만난다



항상 허탈해지는 건 꼭 떠나는 날에는 날씨가 기가 막히게 좋다는 것이다

'이 도시는 내가 마음에 안 들었나... 나 혼자만의 짝사랑이니?'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 정도로

좋은 날씨가 허락된 날이 희귀하다






밀라노를 떠나는 날도 그랬다

오후 기차여서 숙소에서 나와 카페에서 자리 잡고 있으면서 시간 보내면 곧 기차 시간 되겠지.. 하는 마음에 길을 나섰건만 날씨는 매정하게도 밀라노 도착 중 가장 멋진 햇볕을 선물했다

덕분에 주사위 같은 돌바닥에 캐리어가 망가지기 일보 직전까지 끌고 다닌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날씨도 잠시.


내가 자는 동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달리는 기차는 나를 목적지까지 배달해 줬고, 그렇게 도착한 베네치아는 안개 낀 을씨년스러운 수중 도시였다.


역을 나가자마자 훅 끼쳐오는 물냄새와 안개 기운.

너마저 나를.... 하는 마음으로 캐리어를 끌고 또다시 돌바닥(+베네치아의 수많은 다리들)을 걷게 되었다.


나중에 보니 예쁘지.. 현장은 귀신의 집


어느덧 주소가 있는 골목에 도착했는데, 사방이 벽으로 막혀버린 골목에 당황해 버렸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내가 걸어왔던 방향만 열려있을 뿐 그 외는 모두 벽과 창문만 있고 그 흔한 대문도 없던 골목, 가로등 하나만 흐릿한 안갯속을 비추고 있어, 이 상황에선 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에 기운이 쑥 빠져버렸다.


추워 추워!라고 속으로 수도 없이 외치면서 사방을 두리번두리번거리던 차에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으로 오세요~"


너무 추운 나머지 그 소리가 숙소 사장님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따라가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무슨 겁도 없는 행동이었을까.....

쫄래쫄래 그 소리를 따라가니 웬 언니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제 보니 그 언니 뒤 쪽으로 웬 문이 하나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언니를 따라 문을 열고 들어가니 또다시 복도가 나와, '타국에 와 이렇게 뒷골목으로 끌려가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쓸데없는 생각으로 조심스레 걸어가던 중 복도 안쪽에서 시끌시끌한 소리와 함께 웬 남자가 머리에 샴푸 밴드를 끼고 슬리퍼를 끈 채 나타나 어벙벙한 상태로 내 캐리어를 강탈(?)해 갔다.



'저 사람은 대체 뭐지? 사장님인가?'



캐리어를 빼앗긴 채 멍청한 얼굴로 뒤따라 들어간 그곳은 다행히도........ 숙소였다.

공용공간과 방이 두어 개 보이는 작은 집이었는데 이곳도 역시 밖에서의 눅눅함이 느껴졌다

(다음날 알게 되었는데 도시 전체에 습기 먹은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침대는 저기니까 가방 두고, 밖에 안 추워요? 그대로 입고도 안 추워? 그럼 벗지 말고 바로 나가면 되겠네. 여권만 들고 나와"

"네?"



숙소 도착 시간은 이미 10시가 다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씻고 바로 잠이 들고 싶었는데...

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모차르트 가발 쓰신 털보 아저씨(죄송해요 사장님)는 어떻게 여행 와서 잘 수 있냐며 나에게 다시 나갈 것을 권하셨다(끌고 갔다?)


어디로 가는지 목적지도 알 수 없지만 사장님이 사주신 젤라또 하나에 불만 없이 따라나섰다

잘 먹겠습니다>_<



우리의 목적지는 스칼렛 다리 건너편의 한 선착장.

9시면 웬만한 상점이 불이 꺼지는 이곳에서 10시가 넘은 시각, 대체 어디를 가고 있는 건지 아직도 감이 없는 주위를 둘러보니 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나뿐인 듯하다.

우리를 끌고 오신 사장님은 광장에서 만난 일본인과 노래 한 소절씩을 섞으시다 갑자기 노래를 하기 시작하셨다. 거기에 맞춰 아까 샴푸 모자 쓰신 분은 춤을 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상황은 대체 무엇일까.....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배가 찢어지도록 웃다가도 대체 이게 뭐 하는 걸까 고민하면서 갈팡질팡 하던 차에 갑자기 사장님은 선착장에 도착한 배를 타라고 했다.


여전히 목적지는 알 수 없지만... 난 그 배를 탔다


배에는 우리 말고 다른 손님들도 있었는데, 목적지가 대체 어디인지 모피코트를 입으신 멋쟁이 할머니께서 일행과 함께 계셨다

사장님이 이태리어로 뭐라 뭐라 말씀하시더니 갑분 성악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셨다

오는 길에 여러 번 들어서 이제 익숙해졌다 했더니 할머니께서 갑자기 듀엣으로 들어오셨고 두 분이 열창을 하셔 우리 모두 기립박수를 쳤다




첫인상은 귀신 나올 것 같던 우울한 안개의 도시였는데,

샴푸 모자로 당황시키더니 알 수 없는 음악으로 기분을 최상으로 승화시켜 주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은 어려워하는 나였는데....



이날의 기억으로 마피아에게 끌려가도 여한이 없었다




덧:)

내 짐을 들어준 샴푸 모자는 나보다 하루 먼저 도착한 손님이었고,

모차르트 가발의 털보 사장님은 이태리에서 투잡 뛰고 계신 성악 가수이셨으며








이 날의 최종 목적지는


카지노였다







매거진의 이전글빠르게 뛰고 최대한 찌그러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