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겨울 사이

흩날린 낙엽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시간

by KIRIMI
10월 말부터 정신을 차리고 밖을 바라보니, 세상이 온통 단풍빛으로 물들어있었다.

11월에 베를린 정부는 부분적인 록다운(Lockdown)을 시행하였고, 덩달아 딸아이의 유치원에서도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나왔다. 딸아이가 속해있는 반이 아이 었고, 딱히 1차적인 접촉은 없었지만, 그 반에 속한 다른 친구와 주중에 만나서 놀기도 했고 여러모로 걱정이 되어 당분간 유치원을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너무나 건강하고 아무 이상도 없는 아이 었지만, 일단 해당 반이 다시 정상적으로 운영을 할 때 까지는 집에서 두고 보자는 생각으로 딸과 24시간 함께하는 일주일이 예고도 없이 시작되었다.

역시나 나는 집안일을 하느라 연신 바빴고, 아이의 하루 세끼를 꼬박 챙겨주느라 부엌에서 살다시피 했다. 사실 내 몸뚱이 하나 챙길 때는 대충 끼니를 때우기 마련인데, 아이가 집에 있다 보니 방학 모드로 온(on)이 되면서 이것저것 만들어 먹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설거지까지 마치고 겨우 쉬려고 하면 아이는 내 몸을 비집고 들어오며 심심하다고 징징대곤 했다. 쌀쌀한 가을바람도 싫고 추위에 손 끝이 아린 것도 싫어서 집에만 있고 싶었지만, 집에만 있는 것이 더욱 곤욕이었던 터라 억지로라도 엉덩이를 들고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아이와 함께 집 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산책을 가기로 했다.

우리 집 근처에 위치한 샬롯텐궁전(Charlottenschloss, 샬롯텐슐로스)에는 큰 호수가 하나 있는데, 백조며 오리들이 꽤나 많이 모여있다. 그 호수로 가서 백조들과 오리들에게 식빵을 나누어주는 것이 아이와 함께 정한 미션이었다.

네 발 자전거를 탄 아이는 신나게 앞으로 달려 나가고, 뒤에서 따라가는 느린 걸음의 나는 여전히 큰 에코백 속에 돗자리며 간식, 물통을 챙겨서 총총걸음을 옮기기 바빴다. 아이의 친구가 물려준 네 발 자전거는 사실 조금 삐걱였고 꽤나 무거워서 앞서 달리던 아이의 속력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오르막길을 몇 번 경험하던 그녀는 더 이상 자전거 페달을 밟고 싶지 않다고 선언하면서 자전거 위에서 덜렁 내려버렸다. 들고 가기에도 무겁고 끌고 가기엔 허리가 아픈 아이의 자전거는 오롯이 나의 몫이 되어, 쫄랑쫄랑 뛰어가는 아이 뒤를 속절없이 - 이를 갈며- 제대로 들지도 끌지도 못한 채 그저 질질 밀고 갈 수밖에 없었다. 반 협박으로 자전거를 타게 했다가, 내가 다시 끌었다가를 세네 번 반복하고, 짧은 횡단보도를 5번 정도 건너서야 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평일 오후 12시의 공원은 다행히 한산했다. 사람들 간 거리 유지가 가능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마스크를 벗은 채, 시원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셔보았다. 베를린의 가을 답지 않게 햇살이 찬란히 내리쬐었다. 따스한 햇살 속에 눈을 잔뜩 찌푸릴 수 있다는 게 정말 행복했다. 높은 가로수는 단풍이 든 나뭇잎들이 그저 조화롭게 어우러졌고, 푸른 잔디밭과 산책로 위로는 어느새 낙엽들이 수북이 도 쌓여있었다.


아이는 이미 호숫가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중이었고, 나는 그놈의 자전거와 함께 정체 중인 자동차 마냥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그녀의 발걸음을 좇고 있었다. 마침내 정원 끝자락에 위치한 호수에 다다른 우리는 근처의 너른 계단 위에 돗자리를 펴고 자리를 잡았다. 햇살도 좋고 바람도 상쾌해서인지 그 날따라 백조와 오리들이 호수 곁 너른 공터로 나와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집에서 가져온 식빵을 가지고 당당히 백조에게 다가간 아이는 조금은 멀찍이 떨어진 채로 식빵 조각을 백조에게 던져주었다. 배가 고팠던 모양인지 백조, 오리 할 것 없이 -참새들까지 - 식빵 덩이를 던지는 족족 잘 받아먹었다. 우리 딸은 배시시 웃으며 오리에게 줄 식빵을 자기의 입으로 가져가기도 몇 번 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지만 엄마에게 들켜 민망해할 아이를 생각하며 애써 모르는 척했다.


빨간 비니를 눌러쓴 아가씨와 반려견


금세 구름이 몰려왔다.

그렇게 햇볕은 얄밉게도 구름 뒤로 쏙 숨어버렸다. 시려오는 손끝을 느끼며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마침 준비해 온 식빵도 동이 났고, 아이와 함께 발길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왼쪽 강가를 바라보았다. 멀리서 보아도 눈에 확 들어오는 빨간 비니를 눌러쓴 아가씨가 반려견으로 보이는 개와 함께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 까만 개의 털은 언뜻 보아도 광택이 났고 잘 정리된 듯 부드러워 보였다. 그렇게 그 둘의 걸음은 내 시선을 한 번에 빼앗아갔다. 조금은 무거운 공기와 짙푸른 강물, 나무 위를 혹은 잔디밭 위를 현란한 단풍으로 장식한 나뭇잎들은 그 둘과 그저 하나인 듯 자연스러웠다. 내가 평소에 상상하던 베를리너(Berliner, 베를린에 사는 사람)의 이미지와 닮아서였을까? 무심한 듯 시크하고 자유분방해 보이는 그 아가씨와 그녀의 반려견이 시야를 벗어날 때까지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정신을 문득 차리자, 나보다 한참 앞질러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그렇게 짧은 횡단보도 5번을 건너고, 자전거를 타다 끌다를 반복하며 겨우 집에 도착했다.

손을 깨끗이 씻고, 식탁에 앉아서 간식을 먹었다. 그런데 웬일로 아이의 눈이 초점 하나 없이 어딘가를 멍하게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 걸까?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물었다.


엄마는 춥다고 하고 힘들다고 하면서 왜 자꾸 밖에 나가자고 하는 걸까?
왜 그런지 한번 생각해봤어.


그 대답이 꽤나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또 힘들다느니 춥다느니 하는 불평 섞인 말을 아이 앞에서 한참을 했었나 보다. 엄마는 너와 함께 밖에 나가서 너무 즐거웠고 별로 힘들지 않았다고 뒤늦게 변명을 해봐도, "거짓말..." 하며 눈을 흘기는 딸을 보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집에 있기는 심심한데, 밖으로 나가니 쉽지가 않았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추위에 특히나 약한 탓인지, 체력은 바닥을 쳤다. 이 비루한 몸뚱이를 보니, 진짜 가을이 왔구나 싶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아이를 다시 유치원에 보내기 시작했다. 11월 둘째 주가 되자 이제는 그 화려했던 단풍도 다 떨어지고 진회색의 나무 가지들만 하늘 쪽으로 고개를 들고 서 있다. 질병과 경제난에 허덕이는 와중에도 여름은 갔고 가을은 왔다. 또 어느새 가을이 가고 곧 겨울이 오겠지. 우리네의 삶과 상관없이 자연은 그렇게 제 갈길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 그래서 야속하지만 그래서 올해의 가을이 더 소중했고 훨씬 아름답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우선 아이의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겨울이 오기 전에 체력을 좀 길러야겠다. 발걸음 가벼이 훌훌 산책하던 빨간 비니 쓴 아가씨처럼, 예쁜 털모자 툭 걸치고 밖으로 나가야겠다. 가을과 겨울의 사이, 얼마 남지 않은 올 해를 위하여 땅바닥에 뒹구는 낙엽들에게 심심한 인사를 건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