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영훈 Jun 11. 2020

자취도 비건도 어렵습니다.

비건적 삶의 기록 #3

 작년과 올해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변화가 두 가지 있다면, 하나는 자취를 시작한 것이고 하나는 비건을 지향하게 된 것이다. 졸업 준비와 창업을 병행하며 매일 서울과 경기도를 오가는 3시간의 강행군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공식적인 이유와 애인과 가까운 곳에 살며 친구들을 집에 불러 맛난 음식을 해 먹고 나만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가겠다는 비공식적 이유가 맞물려 처음으로 서울에 혼자 살 집을 구하게 된 것이다. 비건 라이프는 동물과 자연에게 덜 해를 끼치고 싶다는 위선적인 이유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닮아가고 멋있어지고 싶다는 이기적인 이유가 맞닿아 시작하게 되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자취와 비건 생활의 만남은 내게 수많은 새로움을 하루하루 안겨주고 있다.     


자취 로망이 하나하나 들어가 있는 우리 집


여름이 성큼 다가오면서 엊그제 처음으로 내 집에서 모기를 발견했다. 자다가 귀가 윙윙거리고 팔이 간지러워 잠에서 깼는데 이곳저곳 나를 물어버린 모기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자취와 비건을 시작하기 전의 나였다면 어땠을까. 아마 집에 있는 에프킬라나 전기채로 모기를 죽이고, 엄마에게 버물리의 행방을 물어본 뒤 버물리를 바르고 다시 아무렇지 않게 잠을 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의 나는 달랐다. 윙윙거리는 소리에 화가 치밀어 대낮에도 키지 않는 백열등을 켰고 졸린 눈을 부라렸지만, 동시에 집에 예전만큼 모기에 대한 방역 체계가 갖춰져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자취 후 첫여름이었기에, 방충망도 완벽하게 벌레를 차단하지 못했고 모기를 잡을 도구도 버물리도 없었다. 물론 모기는 손으로 잡으면 그만이지만 보여야 손으로 잡지. 정말 어릴 땐 엄마 아빠가 졸린 나를 대신해 모기를 잡아주었는데 이제 그럴 사람은 없다. 다행히도 자취를 시작할 때 집에서 챙겼던 모기향이 서랍 속 깊은 곳에 있음을 떠올리고는 모기향을 피우기 시작했다. 나선형의 끝자락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향을 맡으니 자취를 처음 시작했던 날이 떠올랐다. 그 날 역시 자다가 이상한 기운에 깨고야 말았는데 그때 벽에 붙어있는 그리마를 처음 보았다. 처음엔 그게 돈벌레인 줄도 몰랐다. 다리가 셀 수 없이 많았으니 지네이겠거니 생각했다. 고무장갑을 끼고 온갖 호들갑을 떨며 벌레를 잡아 변기통에 내리며 자취를 괜히 시작했다는 후회를 했었다. 그날 밤 또 다른 벌레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던 기억이 난다. 윙윙. 그 날을 떠올리는데 다시 모기가 내 귀를 맴돌았다. 고개를 휙-돌려 모기를 잡으려는데 또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그렇게 밀당을 몇 번이나 했을까. 짜증이 어느샌가 의문으로 바뀌었다. 모기는 모기의 삶에 참 충실하고 있구나. 나는 하루를 권태로워하다 헛헛한 마음으로 잠들었는데 너는 뭐 그리도 열심히 내 피를 빨려고 하는 걸까. 


그러던 찰나 눈 앞 바닥에 앉아있는 모기 녀석을 발견했다. 정확히 내 반경 안에 있었고 바닥을 손바닥으로 세게 치면 모기는 찌그러지며 내 피를 토할 것이다. 그런데 쉽사리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망설여졌다. 내가 모기 따위를 죽여도 되는 걸까. 모기의 삶을 끝낼 권한 같은 것이 나에게 있는 걸까. 갑자기 수많은 돼지나 소, 닭들이 눈이 스쳐 지나갔다. 눈과 얼굴이 있는 존재들을 함부로 먹을 수 있는 건가에 대해 의문을 품으며 시작한 비건 라이프다. 검색창에 '모기 눈'을 검색했다. 모기에게 물려 부은 사람 눈 사진이 잔뜩 올라왔다. 모기도 눈이 있는 건가를 보고 싶었는데 인터넷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공간이다. 모기의 사진을 확대해보니 모기도 얼굴과 눈이 있다. 사전을 찾아보니 모기들도 짝짓기를 하고 사랑의 신호를 보낸다고 한다. 모기를 서슴없이 죽이는 비건은 그렇담 끔찍한 혼종인 것인가. 내 생각에 피곤함을 느낀다. 동시에 피곤함을 느끼는 것에 부끄러움도 느낀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지나치게 눈부신 하얀 조명 아래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비건을 지향했으면 좋겠는데 이런 글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비건이 피곤한 것이라 여길 것이다. 


실제로 비건 생활은 피곤하기도 하다. 예전엔 정육점에서 삼겹살을 사 와 쌈 싸 먹으면 간편하고도 훌륭한 한 끼였는데 채식을 하자니 매일이 냉장고의 야채를 적정하게 비우고 새로운 요리를 터득해가는 미션인 것만 같다. 배달의 민족으로 치킨도 먹고 아침에는 달걀 프라이와 프렌치토스트로 우아한 브런치를 먹는 게 자취의 로망이었건만 닭과 달걀의 진실을 안 후에는 그것들을 먹는 것도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육체적 정신적 피곤함이 그렇게 나를 짓누를 때쯤 결국 나는 모기를 잡고야 말았다. 모기는 예상대로 내 피를 토해냈다. 내 손바닥에 묻은 잔해들을 보며 아무렇지 않게 손을 씻으러 갔다. 손을 씻는데 찝찝한 마음은 씻겨 내려가지 않았다. 내일의 나는 모기를 잡기 위한 에프킬라를 구비해야 할 것인가. 그냥 버물리만 사야 할 것인가. 모기가 나를 뜯도록 내버려 둘 만큼 관대하거나 돈벌레와 함께 살아갈 깜냥은 되지 못하는데. 


내 맘대로 비건 식사 & 제로웨이스트 실천하기


아침이 밝았다. 일어나자마자 바나나와 사과, 케일을 갈아 그린스무디를 먹는다. 그리고 두유로 만든 요거트에 각종 과일과 견과류를 넣고 우적우적 씹어먹는다. 요즘의 아침 식사는 이렇게 간편하면서도 덜 해를 끼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세수를 한 뒤 비건 로션을 바르며 예전과 달리 트러블이 잘 나지 않는 피부를 만족스럽게 톡톡 두드려본다. 다음엔 냉장고에 남은 음식과 장 볼 식재료들을 떠올리며 오늘 저녁에는 어떤 채식 요리를 해먹을지 궁리해본다. 일주일에 하나의 채식 요리만 터득해도 1년이면 50개 이상의 멋진 비건 푸드를 만드는 내가 될 것이다. 이번엔 집을 나서기에 앞서 옷장 앞에서 어떤 가방을 들지 고민한다. 오늘의 옷에는 검은 가죽 가방이 어울리건만 동물의 가죽이 들어간 제품을 사용하는 것은 이제 지양하고 싶어 다른 가방을 든다. 멋은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언젠가 취향도 가치도 챙기는 가방을 만날 날을 상상하며 조금 설렌다. 비건이 꼭 건강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기왕 하는 것 건강해지고 싶은 나는 홈트를 하고 단백질 섭취를 위해 닭가슴살 대신 템페(*콩을 발효시켜 만든 인도네시아의 대표적 음식)를 구워 먹는다. 요즘 제일 맛있는 음식은 템페고 앞으로도 쉽게 질리지 않을 것 같아 먹을 때마다 감사한 마음이 든다. 아빠에게 전화가 온다. 이번 주말에 집에 오냐고. 아마 집에 가면 가족들과 외식을 할 것이고 고기를 좋아하는 가족들은 내 눈치를 보거나 보지 않으며 고깃집을 가지고 할 것이다. 나는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고기를 먹은 뒤 자기 전 우연히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영상을 보며 다음엔 먹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했던 그 날을 상기시킨다. 이상한 마음을 달래려 빨래를 한다. 이번 세제를 다 쓰고 나면 제로 웨이스트를 위해 천연 세제 소프넛을 사야지 생각한다. 이렇듯 자취를 하는 초보 비건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 순간 먹고 입고 살아가는 모든 선택을 재정비하는 일인 듯하다. 


자취를 시작한 뒤로 아주 사소한 일까지도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결정하는 경험을 해왔다. 거기에 비건을 지향하기 시작하면서 그 모든 일에 대한 선택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있다. 모든 집안일과 선택한 행동에는 나의 취향, 습관, 가치관이 스며들어 있다. 그것들의 총체를 우리는 라이프스타일이라 부르기도 한다. 초록과 자연을 좋아하는 마음, 당연한 것에 의문을 품으며 건강한 삶을 위해 노력하는 습관, 삶을 외면하지 않고 모든 존재와 더불어 살고 싶다는 태도가 모여 나의 비건 라이프스타일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마도 셜록 홈즈가 갑자기 쳐들어와 쓰윽 내 원룸을 들여다본다면 이러한 것들은 물론이고 자취와 비건을 하는 나의 갖가지 이유들까지 금세 탄로 나고야 말 것이다. 탄로 나기 전에 글에 실토했으니 조금은 마음의 짐을 덜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앞으로도 나는 비건인으로서 자취를 하며 수많은 모순을 맞닥뜨리고 나의 선택을 점검하며 피곤해할 것이다. 그럼에도 자취를 하고 비건을 지향하는 삶은 계속될 것이다. 무언가를 확신하는 것이 매우 힘든 나지만 이 2가지만큼은 평생 지속할 것만 같은 마음이 든다. 자취도 비건도 시작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그것을 경험했을 때만 알 수 있는 기쁨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 내리는 것은 어렵지만 오롯한 나를 발견하는 마음, 수많은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주는 생동함이라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원래 이 글은 제목은 '자취도 비건도 처음이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글을 끝에 오니 나의 언어 선택에 의문을 품게 된다. 언젠가 ‘부모님도 부모님이 처음이라는 이유로 저지른 폭력이 용인될 수는 없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그런 내가 죽어가는 동물들 앞에서 비건도 처음이니 귀엽게 봐줘라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어긋나는 태도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글의 제목은 바뀌어야 할 것이다. '자취도 비건도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자취하고 비건하겠습니다'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