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포터와 지팡이

상상과 기억 사이에서

by 키루
서양호랑가시나무와 불사조 깃털에, 11인치, 그리고 나긋나긋하고 유연한 것으로 말야.

소설에 나오는 해리포터의 지팡이에 대한 설명이다.

평범한 문장이지만 어린 나에게 저 문장은 뜻밖의 상상을 불러왔다.


내가 해리포터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당시 담임선생님이 반아이들에게 읽어보라며 얘기해 줬던 기억이 난다. 그날 알림장에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라고 잘 적어서 집으로 가져갔다.(어렸을 때 나는 선생님말씀을 참 잘 들었다)

며칠 뒤 손에 든 책은 아마 내가 처음 펼쳐본 활자위주의 책이었을 거다. 이 책은 각 장의 처음 자그만 삽화 말고는 몽땅 글자였다.


그래도 해리포터니까 술술 읽혔냐고?

전혀 아니다. 고역이었다.

'마법사라며 왜 마법 안 나와..' 초반부를 읽던 나의 참을성은 길지 않았다.

사달라고 해놓고 하루 이틀 만에 내팽개칠 수는 없으니 꾸역꾸역 읽어나갔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아이템은 지팡이였다. 재밌는 건 그때 당시 내가 생각한 지팡이는 'wand'가 아니라 'staff'였다는 거다.

그 시절 나에게 지팡이는 '노인들이 쓰는 보행보조도구'였다. '해리포터 - 영국 - 영국신사 - 지팡이'라는 어디서 본 영국적인 이미지의 영향도 컸다.

게다가 애석하게도 내가 읽은 구 판본은 길이 단위가 '인치'였다. 초등학교 3학년에게 '11인치'라는 길이는 알바 아니었다.

결국 내 상상 속 해리포터는 어쩌다 보니 할아버지 지팡이를 휘두르고 다녔다.


영화가 개봉한 뒤, 내가 상상하고 만들어냈던 세계는 영화의 세계로 덧씌워져 버렸다. 나만의 호그와트, 나만의 덤블도어는 다 지워졌다.

나만의 상상이 사라진 건 분명 아쉬운 일이다.

그래도 지팡이는 남았다.

다른 기억은 다 사라지고 지팡이에 대한 기억만은 남은 건, 내가 그렸던 해리포터 세계에서 가장 강렬한 오해였기 때문일 거다.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간달프처럼 지팡이에 기대어 서있는 해리포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