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세포 깨우기, 익산
“익산에 올 일 있으면 우리 집에 한 번 놀러 와요”
15년 전 인품 좋다는 평을 듣던 직장 선배가 작별인사를 하며 건넨 말이다. 내려가 살려고 익산에 한옥을 지었고 곧 그 지역으로 떠난다고 했다. 일적으로 친밀하게 지낼 기회가 없어 몇 마디 나눠본 것이 전부라 자세히 묻진 않았으나 연고 없는 그곳이 좋아서 노후를 보내고 싶다고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분이 한 잔 따라주신 황차의 깊은 향은 가끔 생각났으나 익산이라는 지명은 내 머릿속에서 점차 잊혀갔다.
작년 여름 딸아이가 기차 타고 당일치기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고 나에게 장소 선택권을 줬다. 역사 시간에 탑이름 외우기가 머리 아프다는 딸의 말을 떠올리며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인 미륵사지석탑이 있는 익산을 목적지로 정했다. 사실 나의 학창 시절에도 역사과목은 현실과 괴리된 암기과목이었을 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역사책에 나온 장소를 데리고 다녔으면 딸아이가 역사를 재밌게 공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때늦은 후회를 하며 기차표를 예매했다.
폭염의 날씨여서 그런지 미륵사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늘에 앉아 탁 트인 잔디와 파란 하늘 그리고 거대한 탑과 마주했다. 1400여 년 전의 풍경을 마주한 듯 신비롭고 평온했다.
‘선화 공주님은
아무도 모르게
시집을 가서
맛둥(서동)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잔대요 ‘
미륵사지 창건 배경설화인 우리나라 최초의 향가 <서동요>이다.
고요히 앉아 신분을 초월한 서동과 선화공주의 스토리를 상상해 보았다. 백제에서 마를 팔던 소년 가장인 서동이 자신이 좋아하는 선화공주의 마음을 얻기 위해 거짓 소문을 퍼뜨리다니 지금으로 치면 스토커나 명예훼손쯤 되겠다. 다른 측면에서 상상해 보자면 아버지로부터 쫓겨난 선화공주가 서동과 사랑에 빠진 것은 훗날 무왕이 되는 서동의 잠재력을 알아본 것이 아닐까. 아님 서동이 아이돌급 외모를 지녔을 수도 있겠다. 그것도 아니면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지어달라고 하자 바로 실행에 옮기는 서동의 사랑꾼 면모에 반했을 수도.
아무튼 '사랑이란 두 사람이 함께 꿈꾸는 것이’라는 헬렌켈러의 말처럼 두 사람은 결국 미륵사라는 꿈을 실현하였다. 15년 전 익산으로 향한 그 선배도 옛사랑의 흔적이 서린 익산의 매력에 이끌린 것은 아닐까. 내 마음 안에 사랑세포가 무기력해질 때면 다시 익산행 기차표를 예매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