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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Sep 15. 2015

눈꽃은 피었다.

책을 무척이나 읽고 싶다. 그런데 가끔은 눈이 아파서 글자를 쳐다보지 못할 때도 있다. 이럴 때는 나의 인생에서 눈에 얽힌 과거가 생각난다. 몸이 천냥이면 눈이 구백냥이라고 했던가? 나는 그 말에 무척이나 공감하는 편이다. 구백냥의 진가가 어느 정도인지 오래 전부터 알아 왔고, 그 구백냥의 가치가 제로로 되었을 경우에 대비하여 훗날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일을 생각하기도 했다. 최근에 대머리 방지를 위해 먹던 '프로페시아'를 끊었음에도 여전히 하나의 약을 꾸준히 복용 중이다. 눈 영양제가 그것이다. 영양제를 챙겨 줄 만큼 눈은 내 인생에서 눈물의 울타리를 오르 내렸던 존재였다. 그 시간 속으로 잠시 여행을 떠나 보고자 한다.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책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거실 한쪽 벽면에는 붙박이 책장을 설치 했고, 그것의 아랫 단에는 아이의 그림책을 가득 채워 주었다. 그리고 늘 나와 아내는 아이 앞에서 독서를 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을 보냈더니, 요즘 아이는 심심 할 때마다 책을 꺼내어 무엇인가를 보며 논다. 그 옆에서 나는 늘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돈 주고도 가르치지 못할 습관을 만들어 주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다가 간혹 책을 보는 아이의 주변이 어두워지면 얼른 전깃불을 켜준다. 왜냐하면 혹시나 아이의 눈이 안 좋아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눈이 단순히 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유년 시절처럼 청소년기의 방황으로 이어질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시력을 쟀던 것으로 기억된다. 별 생각 없이 시력 측정판의 숫자를 읽었고, 양쪽 모두 1.2 의 정상 판정을 받았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향후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에 나의 눈이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4학년이 지나고 5학년이 되었다. 3학년 때처럼 똑같이 시력 측정판의 숫자를 읽어야 하는데, 숫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비벼 보고 깜빡여 보아도 숫자가 흐릿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최종 결과는 0.5/0.7 이었는데, 일상 생활에 큰 불편함은 없고 멀리서 칠판 글씨를 보는 것이 약간 힘든 정도였다. 그래도 선생님의 권유로 안경이라는 것을 써 보기로 했다.


1991년 초등학교 5학년. 아버지의 손을 잡고 안과로 향했다. 그 당시에 나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돌아 보면 아버지의 심정이 대충 이해 되곤 한다. 큰 걱정은 아니었더라도 아들의 몸 어딘가가 안 좋아져서 병원에 데려 가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내가 아이를 걱정하는 것처럼... 그 당시 상식은 그랬다. 안경점에서 측정하는 시력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과에서 다시 한 번 시력을 정확하게 측정한 다음, 안경 도수 처방을 받아서 안경을 사야 했다. 안과에 도착하여 '굴절력' 측정 장치에 눈을 갖다 대었다. 윙~윙~ 하는 소리와 함께 초록색 배경의 사물의 초점이 흐려짐과 또렷함을 반복했다. 상당 시간 동안 이런 저런 검사를 몇 번 거친 후에 정확한 안경 도수 처방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을 들고 안경점으로 향했다. 안경점에 처방전을 제시하고 안경테를 선택했다. 곧바로 엥~하는 소리와 함께 렌즈를 가공하는 소리가 났고, 30분만에 내 인생 최초의 안경이 탄생 되었다. 눈이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었기에 안경테 안으로 쏙~ 들어가는 얇은 렌즈를 가지고 있었다. 안경을 써 보았다. 흐릿하게 보였던 사물이 또렷하게 보이는 것을 보니 안경을 착용하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경점에서 이야기 하기를...공부 할 때만 안경을 써도 된다고 했다. 그래서 늘 안경을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책을 볼 때만 착용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갔다. 안경을 공부할 때만 써라고 했기에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나의 눈은 6학년과 중학교 1학년을 거치면서 급격히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그나마 앞에서 세 번째 줄 정도에 앉으면 칠판 글씨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2학년이 되니 그마저도 불가능해졌다. 칠판에 판서된 내용을 받아 쓰려면 칠판 바로 앞까지 나가야 했다. 그 정도로 내 눈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을 만큼 심하게 안 좋아지고 있었다. 더 이상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3 년만에 안경점을 찾았고, 거기에서부터 내 인생의 기나긴 방황은 시작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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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시간이 9시로 늦춰지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생활 리듬도 한 시간 미뤄져 버렸다. 아침 7시에 회사 버스를 타던 시절에는 5시 반에 일어나서 동네 한 바퀴를 산책했다. 그리고 아침을 먹고 잠시 책을 보거나 글을 쓰고 출근을 했는데, 요즘에는 기상 시간이 아침 7시가 되어 버렸다. 최근에 특단의 조치를 내리기로 한 후, 새벽 운동을 다시 시작 했다. 집 주변 아파트 단지의 헬스장을 등록한 후 아침 5시 40분에 알람을 맞춰 두었다. 꿀잠을 자고 있을 무렵 울려 대는 벨소리가 너무 싫지만, 작심삼일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는 마음에 부서질 것 같은 뼈를 주워 담아서 헬스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4일이 흘렀다. 아침 운동을 하고 상쾌하게 회사에 출근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입술 주위에 수포가 생겨 버렸다. 내 몸이 무척이나 피곤하다는 증거이다. 겉보기와 다르게 내 몸은 좀 허약하다. 허약하다는 말을 다른 사람이 들으면 당혹스러워 하겠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늘 건강에 관심을 가지며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려고 한다. 이런 습관은 청소년기에 몸과 마음이 아팠던 기억에 의해 자연스럽게 체득된 것이다. "아프면 다 끝이다." 이 말에 나는 무척이나 공감하는 편이다. 


1994년. 중학교 2학년. 칠판 앞에 나가야 겨우 보일 만큼 나빠져 버린 눈은 나에게 방황의 시작을 알렸다. 안경점에 찾아 가서 시력을 재어 보니 0.1의 큰 글자마저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다. 이 정도의 눈으로 지금껏 일상 생활을 했다는 것이 신기했다. 시력을 재고 나니 어디선가 안경을 가공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잠시 후, 가공 되어 나온 안경에는 무척이나 두꺼운 렌즈가 끼어져 있었다. 이 괴상한 물체를 눈에 걸치고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참 부담스러웠다. 물론 나중에는 렌즈 기술이 발달하면서 얇고 세련된 렌즈가 나오긴 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약간만 눈이 좋지 않으면 두꺼운 렌즈가 기본이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기에 안경을 쓰긴 했다. 안경을 쓰면 예전처럼 칠판 앞에 나가서 판서를 해야 하는 불편함이 없어서 좋았다. 하지만 한창 성장기에 있던 터라 시력도 유동적으로 변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눈 가장 외면에는 각막이 있고, 내부에는 수정체가 있다. 이 수정체는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면서 빛을 얼마나 멀리 보낼 것인지 결정한다. 그런데 수정체의 성장 속도보다 눈의 전체 크기(수정체에서 망막까지 거리)의 성장 속도가 빨라지게 되면 시력이 순간적으로 더 나빠지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새로운 안경을 맞추고 몇 달만 지나면 눈이 약간 흐릿하게 보였던 것이다. 다시 안경을 맞추면 렌즈는 더 두꺼워졌는데, 늘 그것이 어린 마음에 너무 부담스러웠다. 외관상 부끄러운 것도 문제 였지만, 이러다가 눈이 영영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닌 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안경을 바꾸면 시력이 거기에 따라 간다는 낭설을 믿으며 흐린 눈을 비비며 기존 안경을 끼기도 했다. 눈에 좋다는 결명자차를 마셨고, 늘 밝은 환경에서 공부를 하려고 했다. 그래서 약간 흐린 날이면 가장 먼저 복도로 나가서 교실 불을 켜고 들어 왔다. 어두운 곳에 있으면 당장이라도 내 눈이 망가질 것 같은 부담감이 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관련 지식도 많이 알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잘못 알고 있는 지식이 있는데, 눈이 무척이나 나쁜 것을 일컫어..."저 마이너스에요!" 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시력에 '마이너스'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예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0'이라 정의하며, 실명된 상태가 아닌 이상 시력은 0.00001 이렇게 라도 표현된다. 그럼 사람들이 말하는 '마이너스'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일반적으로 렌즈의 굴절률을 이야기 할 때, '디옵터'라는 단위를 쓴다. 가까운 곳이 잘 보이고 멀리 있는 것이 잘 보이지 않을 때 쓰는 렌즈를 '마이너스 디옵터', 반대로 멀리 있는 것이 잘 보이고 가까이 있는 것이 잘 보이지 않을 때 쓰는 렌즈를 '플러스 디옵터' 로 정의 한다. 즉, 젊은 학생들이 많이 가지고 있는 '근시'를 교정하기 위해서는 '마이너스 디옵터' 렌즈를 사용하는데, 이 말이 잘못 와전 되면서 시력과 혼용되어 사용된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시력은 모두 '플러스'가 맞으며, 근시일 경우 '마이너스 디옵터 렌즈', 원시일 경우 '플러스 디옵터 렌즈'를 사용하는 것이다. 


건강 보조 식품이라는 것은 건강한 사람한테 많이 팔리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건강이 약간 악화 되어 가는 조짐이 있는 사람을 타겟으로 홍보 했을 때 최고의 효과를 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존재하는 약간의 불안감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내가 그랬다. 식품은 아니었지만, 신문 광고에서 '시력 교정 안경'을 본 것이다. 이 안경만 쓰면 시력이 몰라 보게 좋아진다는 말만 믿고, 부모님을 설득해서 그것을 구입했다. 장난감처럼 생긴 안경인데 '핀홀'이라 불리는 작은 구멍이 많이 뚫려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실제로 그것을 착용하면 주변의 물체가 조금 선명하게 보였다. 그것은 '핀홀효과' 때문인데, 시력을 향상 시키는 데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작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심정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눈이 조금 좋지 않았지만, 공부에 전념하다 보니 시간은 어떻게든 흘러가 버렸다. 고입 시험을 준비하느라 중3이 지났고, 고등학교에 들어 가서 또 다시 대입 준비를 하다 보니 2년의 시간이 금방 지나 버렸다. 눈이 성장해 감에 따라 안경을 바꿔 주는 것이 맞지만, 늘 나빠지는 방향으로만 진행하는 시력을 받아 들인다는 것이 더욱 고통인지라 우선 버텨보기로 했다. 의사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만 18세가 지나면 더 이상 시력이 나빠지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에 그 나이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렇게 버티며 고3이 되었다. 고3 때는 오로지 공부 이외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이 시기만 통과하면 대학에는 자유와 낭만이 있을 것이고, 나의 눈도 그 자유의 덕을 입고 금방이라도 좋아질 것 같았다. 그래서 예전처럼 눈에 관한 컴플렉스를 최대한 잊고 공부만 열심히 하려고 했다. 목표했던 대학과 학과에 반드시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하지도 않은 문제에 또 다시 부딪혀 버리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내 눈에 보이는 사물은 한 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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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한 구석이라도 아픈 날이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허리가 아프면 앉아 있기 어렵고, 머리가 아프면 아무 것도 생각하기 싫어진다. 이런 상황을 놓고 볼 때, 아무 곳도 아프지 않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것이다. 특별히 신경쓰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청소년 시기에 유난히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아팠던 것 같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니 건강하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 것 같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고 있다. 아파보면 안다.


예전에 한 번 자세히 글로 썼던 내용인데, 나는 고3때 뜻밖에 폐결핵이라는 중병에 걸렸다. 십수년 전이었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병이었지만, 그나마 약이 좋아져서 치료가 가능했다. 독한 결핵균을 죽이는 약인 만큼 약의 양도 많았다. 부작용은 아니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약의 독성 때문에 오줌마저 붉게 나온다는 사실이다. 꾸준한 약 복용을 통해 6개월만에 병은 거의 완치 되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시각 기능 쪽으로 부작용이 나타났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보는 모든 물체에 기다란 잔상이 붙어 있었고, 가끔씩 물체가 두 개로 보이기도 했다. 시력이 그렇게 좋지 않은데다 보이는 것마저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힘들다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 할 방법이 없었다. 순천과 광주를 오가면서 시력 관련 모든 검사를 했건만 특별한 이상을 찾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약물의 부작용이라기보다는 고3의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다. 공부는 해야 하는데, 몸은 아팠다. 야간 자율학습을 해도 모자랄 판에 초저녁에 홀로 짐을 싸서 집으로 향했다. 몸도 중요했지만 당시에 나에게 중요한 것은 공부였다. 별 생각 없이 목표하는 대학을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수능을 망쳤다. 재수를 할 수 없었기에 성적에 맞춰서 지방의 한 대학에 입학 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대학의 초반부를 달렸던 것 같다. 남자의 망신이라는 현역 3급 판정을 받고 군대에 입대 했는데, 눈은 늘 나를 괴롭혔다. 힘들게 훈련 받을 때마다 흘러 내려오는 안경, 총부리와 자꾸 부딪히는 안경...방독면 내에 쓰는 괴상한 안경까지...안경 쓴 눈이 쉽지 않았다.


군대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 와서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공부 뿐이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우연한 계기로 접하게 된 '시력 교정 수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 나면 세상이 뿌옇고, 라면을 먹을 때도 뿌옇고, 칠판을 선명하게 볼 수도 없었던 지난 날을 모두 지워 버리고 싶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요즘처럼 시력 교정 수술이 쉽고 간편하지 않았다. 가격도 대학 한 학기 등록금에 버금 갔고, 수술이 얼마나 안전한지 검증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무슨 용기가 솟아 났을까? 그냥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술 동의서에 싸인을 하고, 시력에서 시야 검사까지 아주 많은 검사를 마친 후에 나는 수술대에 오를 수 있었다. 시력 교정 수술이 두려운 것은 수술 직전까지 내 눈에 모든 장면이 실시간으로 보인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래도 이 순간만 넘기면 지난 10년간 힘들었던 시간들을 보상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두려웠지만 애써 참으려 했다. 그렇게 그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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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전도연'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래서 그녀가 나오는 영화는 빼놓지 않고 모두 보았다. 접속, 약속, 밀양 등등....그녀를 좋아하게 된 것은 영화 '접속'에서 그녀의 존재가 너무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1997년에 개봉한 영화 '접속'은 PC통신을 통해 만나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 중 수연(전도연)은 동현(한석규)와 통신의 채팅을 통해 만난다. 당시만 하더라도 만남이라는 것은 오로지 오프라인 만남 유일했다. 그 와중에 컴퓨터 통신을 통해 인연이 이어진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연과 동현은 몇 번의 엇갈림 끝에 결국 만나게 되고, 둘을 배경으로 'Lovers concerto' 라는 음악이 울려 퍼진다. 무엇인가 경쾌하면서 앞날을 축복하는 듯한 느낌의 이 음악이 좋아서 고등학교 내내 흥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영화 '접속'에서 전도연은 '눈물이 나지 않는 여자'로 출연한다. 그녀는 눈물이 나지 않아서 수시로 인공눈물을 넣어줘야 한다. 이런 전도연을 좋아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나도 '눈물이 나지 않은 사람'이 되어 보고 싶었다. 눈물이 없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무척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바램대로 몇 년 후 정말 나는 눈물이 나지 않는 남자가 되어 버렸다.


2004년 3월. 대전에 보따리를 싸고 올라온 지 6년째 되던 해였다. 누군가 대전 생활을 묻는다면 '만족'이라는 답을 줄 수밖에 없다. 물가도 비싸지 않고, 있을 것은 다 있고, 자연 재해가 많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해의 겨울 끝자락에 사상 최악의 폭설이 내렸다. 살면서 그렇게 많은 눈이 내린 것은 처음이었다. 눈이 많이 내려서 길은 폐쇄 되었고, 고속도로 위의 차량 운전자는 차를 버리고 대피하기 바빴다. 그런 폭설이 그득한 날. 나는 묘하게도 수술대에 올랐다. 눈을 수술한다는 것은 보통의 공포 수준이 아니었다. 모든 수술 장면이 곧이 곧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마취를 위해 눈을 향해 주사 바늘이 다가오는 장면부터, 각막이 잘려 나가는 장면, 순간 뿌옇게 보이는 시야에 뭔가 강하게 내리 쬐는 레이저 불빛까지...이 모든 것이 공포 그 자체였다. 수술 준비 시간을 제외하면 실제 수술 시간이 길지 않다. 그럼에도 몇 분의 수술은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미래처럼 길게 느껴졌다. 


수술을 끝내자마자 신기하게도 시야가 밝아졌다. 수술 후 검사를 위해 진료실을 찾아가는 내 눈 앞이 비교적 선명했다. 안경을 쓰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검사를 끝내고 친구의 부축을 받고 자취방으로 돌아 왔다. 중요한 수술이었지만, 홀로 수술대에 오른다는 것이 조금 외로웠다. 하지만 이미 나는 오랜 시간 홀로 대전에서 살아온지라 그런 삶에 익숙해져 있었다. 한 달여 동안 개구리 모양의 안경을 쓰고 잠을 자야 했다. 자면서 눈을 무의식적으로 긁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내 눈은 점점 선명해져 갔다. 안경을 벗고 다닌다는 것이 너무도 신기했다. 소문에 의하면, 시력 교정 수술은 훗날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부작용으로 걱정 받는 미래보다는 지금까지 고통 받아온 과거를 지워 버리고 싶었던 욕망이 컸던 것 같다. 그래서 수술을 했다는 것에 한치의 후회도 없었다. 


강의장의 뒷줄에 앉았는데도 칠판이 선명하게 보였다. 내 눈이 너무 신기했다. 잠을 자고 일어나서 안경을 찾지 않아도 천정이 선명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마냥 좋았고, 이제 앞으로 어떤 고통도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뜻하지 않게 또 다른 부작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눈은 낮 전용이었다. 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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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눈이 잘 보이고 밤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받은 라식수술은 눈의 각막을 깍아내는 수술이었다. 각막은 눈의 가장 바깥에서 눈을 보호하는 얇은 막인데, 이것이 인체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장기기증 뉴스를 보면, 기증 장기 중에 많이 끼어 있는 것이 '각막'이다. 이것이 잘못 되면 실명이 되는데, 그것을 새 것으로 이식 받으면 다시 빛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눈의 굴절률 변화를 위해 각막의 중앙을 중심으로 넓게 그것을 깍아 낸다. 그러면 눈으로 들어온 빛이 깍여진 각막에 의해 많은 굴절이 일어난다. 그래서 사물을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주위 환경이 밝은 낮에는 동공이 작게 열리는데, 열린 동공 전체가 깍여진 각막의 영역 내에 들어 와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밤이 되면 더 많은 빛을 받아 들이기 위해 동공이 커진다. 그렇게 되면 동공의 일부가 깍이지 않은 각막 부위로 노출 되게 되는데 그 곳을 통해 왜곡된 빛이 눈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 경우 또렷한 상 주위로 빛이 심하게 번진다. 밤에 바라 본 자동차 불빛은 아래 그림과 같았다.



수술을 하고 약 1년 정도 지났을 때, 취업을 했다. 생산라인에서 근무를 했는데, 즉각적인 문제 대응을 위해 차가 반드시 필요했다. 운전면허증은 있으나 도저히 차를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돈 때문이라기보다는 야간 시력이 좋지 않은 내 눈 때문이었다. 주위에서는 아직도 차를 구입하지 않았느냐고 핀잔을 자주 주었다. 하지만 야간 운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속 시원하게 이야기 할 수 없었다. 내 눈에 모든 자동차가 캡슐에 담긴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렇게 3년이 지났다. 수술 초기에 비해 빛 번짐은 좀 줄어 들었다.  더 이상 차 없이 생활하는 것이 어려워서 차를 구입했다. 어쩔 수 없이 야간 운전을 할 때는 실내등을 켜고 했다. 그래야 동공이 작아져서 빛번짐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디안렌즈'라는 야간 전용 안경을 구입하여 운전 할 때만 착용을 했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운전은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배우 전도연을 좋아해서 정말 나도 눈물이 안 나는 사람이 되어 보고 싶었는데, 수술로 인해 눈물의 씨가 말라 버렸다. 수술을 하면 각막에 분포한 신경이 손상 되어 눈물을 흘려 보내야 할 시점을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내 눈은 늘 건조하고 따갑다. 영화 속 전도연처럼 말이다. 겨울에 특히 심한 안구 건조증을 앓게 되는데, 그래서 늘 내 가방에는 '인공 눈물'이 구비 되어 있다. 내 스스로 '저는 눈물이 안 나요~'라는 전도연의 대사를 해 보고 싶었는데, 늘 그 대사를 입에 달고 다닌다. 그래서 일까? 아무리 슬픈 영화를 보더라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사실 말이다. 주변인들은 눈이 뻘개져라 펑펑 우는데,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눈에 한창 고민이 많을 때에는 최악의 경우를 자주 생각했었다. 혹여 눈이 아예 보이지 않게 될 경우, 어떤 직업에 종사하면서 삶을 영위할 것인지 따져 보기도 했다. 팝페라 가수 '안드레아 보첼리'는 초등학교 때 축구공에 눈을 맞아 실명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세계 최고의 성악가가 되었다. 늘 안드레아 보첼리를 떠올렸다. 그처럼 나도 무엇인가 열심히 준비한다면 또 다른 세계가 열릴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중 가장 많이 생각했던 것 중 하나가 '수필작가겸 컨설턴트'였다. 작은 커피숍을 운영하면서 글을 쓰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부자는 못 되겠지만,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의 한 구석이라도 아프지 않다는 것은 정말 복스러운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행운을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늘 우리는 다른 방향에존재하는 또 다른 욕심을 찾는다. 일단 아프지 않는 것이 최고 좋은 일이다. 유년 시절 참 많이 아파 본 사람으로서 늘 이 말에 공감한다. 그래서 오늘도 힘든 몸을 이끌고 헬스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40대에 아프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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