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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Sep 10. 2015

바보 그리고 외로움

내 아들이 5살이고, 요즘 아빠와 이불로 집 짓는 놀이에 푹 빠져 있는데 나중에 이런 사실을 기억할까? 아무리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해보려 해도 6살 정도가 고작이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건데, 앞으로  이야기할 사건이 정확히 6살 때인지 확실치 않으나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많은 시간을 바보로 살아왔던 것 같다.


동네 어귀에 쇠파이프가 잔뜩 쌓여 있었다. 수도관 개량 공사를 위하여 준비된 굵은 파이프였다. 동네 아이들과 놀다가 그 파이프 뭉치가 마냥 신기했나 보다. 아이들은 그 파이프 뭉치에서 어슬렁 거렸다. 순간 무슨 영웅 심리가 발동된 것인지 나는 파이프 뭉치 위에서 바닥으로 뛰어내리는 묘기를 보여주려고 했다. 멋지게 착지하여 아이들의 함성을 한 몸에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뛰어 내리다가 발이 파이프에 걸렸는지 착지가 아닌 추락을 했다. 그대로 내 머리는 콘크리트 바닥에 정면 충돌했고, 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피가 줄줄 흐르는 순간에 가장 먼저 생각났던 것은 외숙모네에 있던 '반창고'였다. 당시 반창고는 굉장히 귀한 물건이었다. 우리집에 없던 물건이 외숙모네에 있다는 것이 늘 신기했기에 아픈 그 순간에도 그것만 붙이면 괜찮을 줄 알았다.


나의 피와 울음 소리로 인해 동네에 비상이 걸렸다. 동네에 원단으로 면장갑을 만드는 집이 있었는데, 우선 하얀 장갑 원단을 포개어 내 이마에서 콸콸 쏟아지는 피를 막아 주었다. 당시 부모님은 모두 일을 나가셨기 때문에 나의 부상 소식을 듣고 외숙모가 달려 왔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어서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장갑으로 이마를 누른 채, 외숙모와 함께 걸어서 병원을 가는 동안 온 동네 아이들이 세발 자전거를 몰고 내 뒤를 호위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팠지만 그래서 추억은 재밌는 것이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수술대 위로  눕혀졌고, 내 팔과 다리는 밴드로 꽁꽁 묶여 버렸다. 얼굴에는 하얀 천이 가려졌고, 급하게 봉합 치료가  시작되었다. 기억하건데 천정에는 밝게 빛나는 무영등이 있었고, 내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한 상황에서 비명만 질렀던 것 같다. 세 바늘 정도를 꿰매고 이마에 혹이 난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다. 일터에서 돌아온 부모님이 아시면 혼이 날 지 모른다는 생각에 숨어 있다가 바로 걸렸다. 요즘 어쩌다가 병원 응급실에 가면 아이들이 어디를 다쳐서 꿰매는 장면을 종종 보곤 하는데, 어른의 시각에서 보면 간단한 시술일지 모르나, 어린 아이 입장에서는 대수술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비명을 지르며 우는 아이의 마음이 이해된다. 


상처는 금방 아물었다. 실밥을 뽑으러 병원에 가는 것이 정상인데, 이발소가 아저씨가 대신 실밥을 뽑아 주겠다고 나섰다. 이발소 아저씨의 어설픈 의료 행위 덕분에 내 이마에는 아직도 큰 흉터가 남아 있고, 이 흉터는 학창시절 나의 최대 콤플렉스가 되었다. 왜냐하면 머리를 짧게 잘라야 했기 때문이다. 외상은 치료되었지만, 콘크리트 바닥에 헤딩을 하면서 머리가 충격을 받은 것일까? 그 때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나의 영구 인생이  시작되었다. 물론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극적으로 지능을 회복하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그 시절은 정말 충격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요즘 어린이들은 한글을 모두 유치원에서 익힌 상태로 학교에 입학한다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한글은 1학년 때 배우는 정규 과목이었다. 그 당시에도 유치원은 있었지만, 가정 형편상 유치원은 내가 갈 곳이 아니었다. 한글을 배우고 '받아쓰기' 시험을 보았는데, 늘 10점, 잘하면 30점이 최고였다. 많은 친구들이 100점 가까이 맞던 상황에서 겨우 30점이라니... 그런데 선생님은 늘 나를 칭찬해 주셨다. 30점 이하 친구들을 칠판 앞으로 불러 놓고, 하위 그룹에서 가장 잘했다고 박수를 쳐주었다. 부끄러웠다. 부끄러운 이유가 공부를 못해서라기보다는 칭찬을 받는 것이 어색했기 때문이다.


그런 암흑의 세월을 보낼 때쯤 부모님이 나를 가르쳐 보고자 '공부방'이라는 곳에 보냈다. 요즘 말로 하면 사교육인데, 공부방 선생님이 무서워서 공부를 했던 기억 뿐이다. 그와 동시에 나의 지능은 콘크리트 헤딩의 충격에서 벗어나 점점 회복되어 가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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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학교, 학원, 과외 선생님도 학생 체벌을 마음대로 못하는 판국이지만, 당시에는 공부방 선생님에게 체벌이 용납되었다. 받아쓰기는 물론 산수 문제에 있어서도 시험을 보았고, 그 결과에 대해 플라스틱 자로 손바닥을 맞는 것으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하여간 어린 나이에 그것이 무서워서 공부했다. 다행인 것은 나의 지능이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는 점도 긍정적인 요소였다. 공부방에 1달 출석한 이후로 늘 받아쓰기는 100점을 맞았던 것 같다. 정말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 후, 공부방에 두어 달 더 다녔고 이후로 학원이라는 곳은 주산학원 빼고 다녀 본 기억이 없다. 요즘은 계산기와 컴퓨터에 밀려서 주판을 찾아볼 수 없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그것은 은행에 가면 은행원이 사용하던 훌륭한 계산 도구였다. 주판의 원리를 생각하면 아들에게 이것을 사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1학년 말을 지나면서 그럭저럭 공부를 했던 것 같다. 늘 학교에서 내어준 숙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해 놓고 잠을 자야 마음이 편했다. 그 때부터 나의 몸에 '성실함'이 베어 들어온 것 같다. 성실함이라는 가르침을 누가 준 것은 아니었다. 단지, 부모님이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그것을 배워 왔던 기억 뿐이다.


어린 시절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바로 '우유 나눠  먹기'였다. 요즘도 고향에 가면 부모님이 늘 그 때를 생각하며 자식들에게 미안하다고  이야기하시는 대목인데, 집안이 넉넉하지 못하다 보니 집에 우유를 200ml 하나밖에 들이지 못했다. 부모님은 아침에 우유가 오면 자고 있는 누나, 형, 나를 깨웠다. 그리고 소주잔에 우유를 한 컵씩 따라서 나눠 먹게 했다. 할당량이 너무 적었기에 맛만 보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그렇게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님이 있었기에 아직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은 아닐까...


요즘의 아이들처럼 학원에 내몰리지 않았기 때문에 숙제만 다하면 그 후로는 자유 시간이었다. '딱지치기'에 열을 올리던 때가 있었다. 좀 더 강한 딱지를 만들어 보기 위해 많은 연구를 했지만, 늘 딱지 치기에 가서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왔다. 그 때 나의 딱지는 돈보다 소중한 자산이었다. 참고서 표지 같은 빳빳한 종이로 만든 딱지가 늘 '보카'라는 이름으로 대권을 잡고 있었기에 일반 종이로 만든 딱지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실제 돈만 아니었을 뿐, 당시 딱지치기는 어른들의 도박판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전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혐오스럽지만, 당시 즐겨 먹었던 간식은 '잠자리 꼬리  구이'였다. 정말 잠자리한테 미안한데, 들에 널리고 널린 것이 잠자리였기 때문에 그것을 음식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기원을 알 수 없지만, 잠자리를 잡으면 머리 몸통 부분을 제외하고 꼬리를 통째로 잘라서 연탄불 위에 올렸다. 그럼 금방 잠자리 꼬리가 오그라 들면서 야들야들한 꼬리 구이가 되었는데, 꼬리를 잃은 잠자리의 파닥거림은 관심 밖이었다. 지금 다시 먹어라고 하면 도저히 못 먹겠지만, 그 때는 그것이 그렇게 맛있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 덧 2학년이 되었다. 선생님은 특이하게 아침마다 한자(漢字)를 하나씩 칠판에 써서 알려 주었다. 그 때에 배운 것이 60 갑자였다. 요즘에 갑을 관계니 하면서 자주 우리 입에 오르내리는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라는 말과 함께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라는 동물 띠를 배웠다. 그래서 둘을 합치며 순환을 시키면 정확히 60 쌍이 되는데, 태어나서 60 년만에 자신의 갑자를 찾게 되면 '환갑'이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배웠다. 


2학년이 되니 IQ 검사라는 것을 했다. 이미 나의 지능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기에 별 뜻 없이 이 검사에 임했는데, 나중에 받은 결과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IQ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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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Q라는 지능 측정법이 얼마나 신뢰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9살 때 처음 알게 된 나의 IQ는 충격적이었다. 우연히 선생님 책상에 기웃거렸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라 학생들 성적이나 신상정보는 보통 수첩에 적혀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날 따라 내 눈에 들어온 것은 IQ 테스트 결과였다. 나의 이름을 찾아 보니, 그 옆에 정확히  '68'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는 것이다. 혹시 내가 '168'을 잘못 본 것은 아닐까 하여 다시  살펴보았지만,  틀림없었다. 돌고래도 IQ가 90이 넘는다는데, 소 돼지만도 못한 지능 지수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암담했다. 특히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렇다. 그 당시에 '진주반'이라는 부진아 학급이 따로 있었다. 방과 후에 별도로 부진아를 모아서 교육을 시키는 곳인데, 내 옆에 앉은 아이가 그 소속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의 IQ는 무려 150에 가까웠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부진아는 바로 나였던 것이다. 당장이라도 그 학급에 잡혀  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IQ 시험을 볼 때, 우산 모양을 고르라는 질문에 우산을 골랐을 뿐인데, 왜 나만  두 자릿수 그것도 소 돼지와 친구할 수 있는 지능을 가졌는 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그렇게 알게 된 나의 지능지수는 중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나의 콤플렉스로 작용했다. 왜냐하면 중3이 되도록 IQ 테스트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3이 되었을 때 다시 IQ 테스트가 있었다.  수년간 나의 콤플렉스를 벗어 던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결과가 나왔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120 ~ 130 정도였다. 우선 돌고래보다 똑똑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내가 천재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늘 노력하는 사람이고 싶었지만, 무엇을 이루려거든 반드시 노력이 따라 붙어야 했다. 누구보다 나는 내 머리가 그렇게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도 늘 남들이 쉽게 해내는 일을 어렵사리 통과했던 기억이 많다. 소위 말해 순간적인 채치가 부족한 것인데, 늘 나는 그 부족한 재치를 노력으로 보충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담임 선생님은 서예에 조예가 깊으신 여자 선생님이었다. 방과 후에 학생들 몇 명을 뽑아서 서예를 가르쳤다. 나도 물론 그 반열에 오르고 싶었지만, 나는 그 때까지도 평범한 학생이라 결국 서예를 배우지 못했다. 그 때에 배우지 못한 아쉬움 때문일까? 최근 악필 교정을 위해 찾은 학원이 서예 학원인데, 악필 교정을 끝내면 반드시 서예 수강을 위해 다시 찾아 뵙겠다고 원장님께 약속을 했다. 하루는 담임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손에 메모지 하나와 500원을 쥐어 주며 '약방'에 가서 이것을 보여 주면 무슨 물건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심부름을 하는 과정에서도 나의 융통성 없는 IQ는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선생님이 '약방'이라고 했기에 나는 무조건 약방에 가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약국'과 '약방'은 다른 곳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학교 부근에 '서울약국'이 있었고, 우리집 부근에 '서울약방'이 있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우리집 방향으로 달렸다. 뛰어도 20분이 넘게 걸리는 먼 거리였다. 땀을 뻘뻘 흘리며 뛰었다. 빨리 다녀와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약방에 거의 다다를  때쯤에 시장에 가던 엄마를 만났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가는 아들을 보고 엄마는 나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선생님이 약방에 다녀오라고 하던데..."   온몸이 젖은 상태로 약방에 도착했고, 메모를 전달하니 검은 봉지에 무엇인가를 싸서 주었다. 내가 물건을 사 왔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것은 '여성 생리용품'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왜 나에게 그런 심부름을 시켰는 지 25년이 지난 시점에 생각해 봐도 웃음만 나온다. 


어떻게 보면 나는 참 순진한 아이였던 것 같다. 그래서 약방과 약국은 다른 곳이니 선생님이 갔다 오라는 약방을 향해 전력 질주를 했는지도 모른다. 학급 내에서 핵심적인 아이는 아니었지만, 숙제만큼은 반드시 해 가려고 했다. 하루는 선생님이 내 준 숙제를 적어오지 못한 일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이 숙제였는지 기억 나지 않았다. 분명히 칠판에 적어둔 것 같은데... 도통 그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숙제는 해야겠고, 방법이 없었다. 다시 학교로 걸어 갔다. 30분 만에 학교에 도착했고, 교실 복도에서 창문 너머로 칠판을 바라 보았다. 숙제가 무엇이었다는 사실을 바로 머리에 담을 수 있었다. 교실에는 학급 내에서 핵심에 속해 있던 '서예 멤버'들이 글씨를 배우고 있었다. 10살의 나이에 숙제를 알아채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 지금 그 시절을 떠올려 보면, 무엇인가  소외되었다는 외로움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숙제밖에 없었다. 


학급 내에서 핵심은 아니었지만, 묵묵히 내 할 일을 다하면서 평범하게 학교 생활을 하던, 1989년 초등학교 3학년 어느 날이었다. 내 앞에 큰 일이 일어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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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의 소설 '아버지'라는 책이 있다. 고등학교 때 읽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위암에 걸려 시안부 인생을 살아가는 아버지의 쓸쓸한 그림자를 이야기 한 책이었다. 이제 나도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아버지'라는 삶을 살고 보니, 그 소설 속 아버지 그리고 정말 나의 아버지의 모습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예전엔 미처 몰랐는데, 한 가정의 아버지이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남자들에게 화려함 뒤의 씁쓸함이란 빼놓을 수 없는 수식어인 것 같다.


아버지는 건설 현장에서 페인트 칠하던 일을 하셨다. 한국이 해방을 맞기 한 해 전인 1944년에 일본 어딘가에서 태어났다고 하신 아버지는 해방이 되면서 할아버지 손을 잡고 한국으로 건너 왔다고 했다. 고향에서 제사가 있는 날이면, 아버지는 늘 과거의 이야기를 하시곤 한다. 당시 할아버지가 꽤 많은 돈을 가지고 한국으로 왔는데, 집에 불이 나면서 모든 돈을 잃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3살 때, 할아버지는 16살 때 돌아가셨고, 많은 날을 굶고 어쩌다가 동냥을 하면서 삶을 연명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동동 구루무(화장품) 장사, 새우잡이 어선, 좌판상 등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고 했다. 늘 자신의 삶에서  아쉬워하는 부분이 하나 있는데, '초등학교라도  졸업했다면 철도청(코레일)이라도 들어가서 공무원이 되었을 텐데...' 하는 것이다. 그렇게 공무원이라도 되었으면 자식들을 조금 더 유복하게 키웠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철 없던 시절. 힘들게 건설 현장 노동자로 일하는 아버지의 땀을 생각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일을 다녀오시면 늘 수첩에 어디서 일하고 왔는지 적어 놓고, 매월 급여가 맞게 들어 왔는지 확인하시곤 했다. 나는 늘 그 수첩을 몰래 보면서 아버지가 많은 날을 일하길 바랬다. 그래야 좀 더 많은 돈을 가져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터에서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시면 "인자 오씨요~" 하며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아버지는 당연히 돈을 벌어오는 존재이고, 나는 그 혜택을 입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행여라도 아버지가 야간 작업을 하고 오면, 돈을 더 벌어서 좋겠다라는 것 이외에는 많은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 아버지가 사고를 당한다. 고층 건물 외벽 도장 작업을 위해 '로프(밧줄)'를 탔는데, 그 로프가 풀리면서 바닥으로 추락하셨다. 그리고 커다란 철재판이 아버지를 덮쳤다. 순천에서 응급 처치를 받고 광주 병원으로 이송되어 큰 수술을 받았다.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폐를 뚫었고, 신체 여기 저기에 부상이 심각했다. 이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광주로 올라 가셨고, 순천에는 누나, 형, 나만 남았다. 어머니가 올라 가시고 형제들만 홀로 남아 잠을 자는데, 그 날따라 새벽 안개를 뚫고 슬픈 소리가 들려 왔다. "워~! 워~! " 하는 박자 있는 새 소리 같았는데, 그 소리를 나는 25년이 지나도록 잊지 못한다. 무엇인가 앞으로 닥칠 고난의 전주곡이었을까? 


어머니가 없는 기간 동안 중학생 누나가 어설프게 싸 준 도시락이 생각난다. 마땅히 음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므로 집에 있는 콩자반을 반찬으로 넣어 주었다. 학교에서 도시락 뚜껑을 여는데, 콩자반을 보자 부모님의 부재가 밀려왔다. 정확한 기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머니는 순천으로 내려오고, 대신 형이 광주로 올라가서 아버지 간호를 했다. 내가 너무 어려서 형의 광주 생활을 자세히 모르지만, 고생이 많았을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어머니가 순천으로 내려 왔지만, 가장의 부재를 완전히 대신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해도 한나절이겠지만, 어머니는 참 순수하고 성실한 분이셨다. 내가 6살 무렵,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어머니가 남의 집 일을 하러 가실 때 따라 갔던 생각이 난다. 하루 종일 일하면 3천 원을 벌 수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후 간간이 파출부 일을 하셨지만, 가장의 부재는 바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다가 왔다.


우리집은 '생활보호 대상자'가 되었고, 명절이면 우리집에 '라면 1박스'가  전달되었다. 국민 건강 보험이 완전히 자리잡기 전이었지만, '영세민 카드'라는 것을 들고 병원에 가면 값 싸게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10살의 나이에 이런 어려움을 느끼면서 자라서 일까? 근검절약이 내 몸에 배지 않을 수 없었다. 훗날 취업을 하고 급여의 97%를 모으는 달도 있다고 사람들에게  얘기했을 때,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내 몸이 시키는 일이라 나도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내가 그렇게 자라 왔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그런 어려운 시절이 있었기에 아무 연고도 없는 대전에서 홀로서기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상당 기간 동안 광주에서 입원을 하고 계시던 아버지가 순천으로 병원을 옮겼다. 아버지가 순천으로 내려 오시자, 나의 또 다른 하루 일과가  시작되었다. 매일 나는 똑같은 일과로 초등학교 3학년 후반과 4학년을 보내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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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살이라는 어린 나이였지만, 그 당시 내가 겪은 많은 일들은 훗날 나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생각 없이 한창 뛰어 놀아야 할 나이임에도 나는 늘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어린 철학자가 되곤 했다. 그런 이유로 나의 생각이 늙어 버렸을까? 한창 연애를 해야 할 20대 초반에 결혼을 염두 하며 여자를 골랐고, 자기 멋에 취해 인생의 자유를 즐겨야 할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에 전원 주택을 꿈꾸며 '정태춘'의 노래를 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가 주변 사람들과 비슷한 궤도를 달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4학년으로  기억되는데, 학교에 갔다 오면 숙제를 하고 늘 아버지 병문안을 갔다. 사실 병문안을 갔다기보다는 병원에 가서 놀다가 집에 오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그 당시 초등학생의 시내버스 요금이 70원이었는데, 나는 늘 기사님 몰래 50원만 내고 떳떳하게 버스에 올랐다. 어머니에게 100원을 받으면 50원으로 '비바 초콜릿'을 사서 먹고 나머지 50원으로 버스를 탔던 것이다. 병원에 가면 늘 음료수가 많았다. 그것을 마시고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버스비를 받아 저녁 무렵에 집으로  돌아왔다.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가면 주변 환경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 온다. 어딘지 모르게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학생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수다 소리가 나의 눈과 귀를 심심하지 않게 했다. 그 당시에는 그것들을 즐기며 병원으로 가는 길이 즐거웠지만, 지금  돌아보니 나는 분명히 어딘지 모르게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약 1년 반 만에 아버지가 퇴원을 하고 다시 일을 나가셨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고아원'에 후원을 시작했다. 당장 우리도 먹고 살기 어려웠기에 아버지의 그런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후 차츰 하나씩 후원처를 늘려 가더니 25년이 다 되어 가는 요즘도 각종 후원 단체에 매월 성금을 보낸다. 부자들도 꺼려하는 기부를 행하는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처음에는 아버지의 인생이고 선택이니 머리로 이해 하고 넘어 갔다. 그런데 내가 취업을 했을 때, 아버지는 "너도 기부를 해봐라!"라고  말씀하셨다. 회사에서 스트레스 받아 가면서 받은 돈을 기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진주에 프란치스코 요양원이라는 곳이 있다. 오갈 곳 없는 노인분들이 거처하는 곳인데, 그 곳에 매월 3만 원씩 보냈다. 혹시 내가 바라는 일이 있는 달에는 복 좀 달라는 의미로 5만 원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 일을 하다 보니, 회사에서 간혹 연말에 월급에서 공제되는 성금 액수를 적으라는 회람이 돌 때, 어렵사리 1만 원을 적어내는 사람들 틈에서 3만 원이라는 숫자를 고민하지 않고 적어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기부를 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이다. '결국 이것은 돌아온다.' 돈이라는 형태로 돌아오지 않을 뿐, 전혀 의도하지 않은 순간에 행운이 되어 나를 지켜 줄 것이라 믿는다. 세상은 미지의 끈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5학년이 되었다. 아마 이 때부터 내가 공부로써 약간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 같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공부가 재미있었다. 그 때 난생 처음으로 '부반장'이라는 것을 맡게 되었다. 대부분은 학급 업무는 반장 소관이었고, 부반장의 임무는 딱 한 가지였다. 수업이 끝낼 때쯤 선생님이  "이상"이라고 하면, 부반장이 "차려! 경례" 하는 것이 전부였다. 행여라도 선생님의  "이상"이라는 소리를 못 듣고 부반장이 박자를 놓치면 바로 선생님의 고성이 들려 왔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교실에서 공부하는 꿈을 많이 꾸는 것은 아마 이런 영향인 것 같다.


5학년의 추억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지네'와의 싸움이다. 우리 집은 언덕배기 아래에 있어서 여름이면 유난히 지네가 와글와글 했다. 지네가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여름이면 집 주변 여기 저기에 약을 뿌렸지만, 그것도 잠시 동안 효과가 있을 뿐이었다. 늘 지네는 자고 있는 우리 가족을 습격했다. 하루는 내 눈 옆을 지네가 물고  도망갔다. 지네독이 눈에 퍼지면서 다음 날 눈을 뜨지 못할 만큼 '밤탱이'가 되어 학교를 갈 수밖에 없었다. 눈이 너무 아파서 조퇴를 하고, 약국에서 약을 지어 먹었다. 그래서 언제라도 지네 이 녀석을 잡기만 하면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하루는 지네를 잡아서 소주병에 넣어 버렸다. 술 먹고 기분 좋게 취해 보라는 의미였다. 소주 속에서 지네가  괴로워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도 참 잔인한 인간이었다. 지네가 얼마나 나를 원망했을까...


 다시 시간은 흘러서 6학년이 되었다. 분교가 생기면서 나는 새로운 학교로 옮겨 갔다.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은 터라 운동장은 늘  질퍽질퍽했다. 1학기에 나는 '저축부장'이라는 것을 맡았다. 매월 학생들은 돈을 가져다가 저축을 했다. 저축 부장은 친구들의 돈을 받아다가 서무 누나에게 내역서와 함께 전달하면 되는데, 어느 날 이것에 문제가 생겨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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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오해를 받는다는 것은 늘 억울함으로 이어진다. 오해에 휘말림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찔리는 구석이 있다면 그나마 억울함이 덜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속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백함을 아무리 주장해도 헤어날 수 없는 오해에 사로잡힐 때는 억울함을 넘어 내 주변에 나 이외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외로울 따름이다.


저축부장에게 사건이 발생한다.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친구들의 돈을 걷어 명세표에 적은 후, 조심스럽게 봉투에 담아 두었다. 그런데 체육시간에 선생님이 잠시 나를 부른다. 봉투가 이렇게 찢겨 있는 데, 너가 저축 대장을 잘못 관리하여 돈이  잘못된 것은 아니냐고 나를 꾸짖어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찢어진 봉투를 보았다. 봉투는 분명 저축 관련 봉투가 아니었음에도 선생님은 나를 믿지 않았다. 그 봉투는 우유대금을 걷는 봉투였다. 우유 담당자가 대금 관리를 잘못하여 봉투가 찢겨진 채로 방치된 것을 선생님이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억울했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다행히 나중에 선생님이 이 사실을 알고 나를 다독여 주었다. 하지만 내가 받은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6학년의 나의 마음의 크기는 고작 그 정도였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의 회사 생활에 비견하면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한 사건임에도 어린 나의 마음은 생각지도 않은 억울함 앞에서 많은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중학생이 되었다. 머리를 빡빡 밀고 초등학교와 분위기가 다른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어색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초등학교 때 느꼈던 다정다감이란 없었다. 처음 중학교 생활에 빨리 적응하지 못했는지, 어떻게 공부를 해 나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첫 시험을 보았고 정확히 나는 244등/740여 명의 성적을 받았다. 초등학교 때에 비해 성적이 많이 떨어졌기에 약간 분발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다음 달 시험에서 159등/740여 명의 성적을 받았다. 그런데 성적표의 가정통신문란에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두뇌에 비해 노력이 부족하다" 이 문구를 보고 한참을 생각했다. 도대체 내 두뇌가 얼마나 훌륭하기에 이런 이야기가 쓰여 있는 것일까? 159등이면 그럭저럭 잘 한 것 아닌가? 그 날 인생에 있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성적에 관하여 꾸지람을 들었다. 약간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그 후로 부모님은 나의 성적에 대해 단 한 번도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그냥 아들을 믿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참 신기하다. 아버지는 왜 나를 꾸짖었을까?


다음 달 시험을 보았다. 나는 좀 더 노력을 했고, 59등/740여 명의 성적을 받았다. 전교 50등 안에 들면 '금배지'라는 것을 가슴에 달고 다닐 수 있었다. 금배지를 단다는 것은 성적우수자의 상징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늘 이 배지를 달고 다녔지만, 그 전까지 그것은 다른 친구들의 전유물이었다. 내가 살던 순천은 고등학교 입시에 있어서 비평준화 지역이었다. 원하는 고등학교에 원서를 넣고 시험을 치러야 했다. 반에서 10등 안에 들면 '순천고등학교' 원서를 써 주었다. 지금 내 모교인 순천고등학교는 평준화가 되어 그 명성을 많이 잃었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전국에서 알아주는 학교였기에 이 학교에 아들이 입학한다는 것은 부모님의 자랑이었다. 고등학교 입시를 보러 갔다. 수학시험에서 절반을 못 풀고 나왔다. 입시에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에 저녁까지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저녁 늦게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축하한다. 합격이다" 이 말 한마디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고등학교 입시를 끝냈다. 아버지는 사고로 인해 장애인 판정을 받았고,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업재해를 입은 근로자 자녀를 상대로 캠프를 보내 주는 행사를 했다. 나는 그 캠프에 참가했다. 처음으로 타지에 사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는 부산에 사는 여자 아이였다. 성격도 괜찮고 그녀는 활발했다. 별명이 '부산우유'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캠프가 끝나고 몇 번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 편지가 아직도 남아 있다. 가끔 나의 편지철을 펼쳐 볼 때면 그 아이가 생각난다. 지금은 두어 명의 아이를 거느린 엄마가 되었을 텐데, 참 그 시절이 그리울 따름이다.


중학교 3학년은 늘 공포의 연속이었다. 정말 무서운 선생님이 내 담임이었기 때문이다. 매일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면 모의고사 성적에 대한 응징이  시작되었다. '빠따'라고 불리는 채벌은 차마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극도의 고통이었다. 다행히 나는 그 빠따를 제대로 맞아 본 경험이 없지만, 빠따를 맞은 친구들은 늘 허벅지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참 그 선생님이 그립다. 우리를 그렇게 때렸던 것이 모두 우리가 잘 되어라고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 빠따를 생각하면 요즘 아이들의 행태가 참 안타깝다. 선생님이 조금 때렸다고 파출소에 신고하고, 동영상을 찍어서 교육청 홈페이지에 올리는 그런 행태들 말이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고, 정확한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또 한 번의 눈물을 흘리고 만다. 남자가 세상에 태어나서 세 번만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참 여러 번 눈을 훔쳤던 것 같다. 내가 나약했다기보다는 감성이 먼저 앞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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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고등학교 1 학년 때 기억의 대부분은 공부와 관련된  일뿐이다. 평일에는 밤 10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했고, 주말에도 학교 도서관에 와서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하곤 했다. 어떻게 된 것인지 그 때는 공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분위기여서 나도 그랬던 것 같다. 늘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오고 갔다. 방학 때는 저녁을 먹으러 집에 갔다가 다시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왔는데, 고물 카세트 플레이어로 들었던 리차드 막스의 'Now and forever' 를 늘 듣고 다녔던 기억 때문인지, 가끔 라디오에서 그 노래가 나오면 나의 고등학교 1학년이 떠오른다. 



당시에도 약간 선행학습 열풍이 있었다. 고등학교 수학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정석'에는 '기본'과 '실력' 시리즈가 있다. 말 그대로 기본은 좀 쉬운 책이고, 실력은 상당히 난이도 있는 문제가 있는 책이었다. 실제 자신의 능력이 어떻게 되든 간에 '실력'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정석책을 본다는 것은 프라이드의 상징이었다. 나도 친구들을 좀 따라 해 본다고 몇 번 이 책에 기웃거려 보았지만, 금세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수학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목이었다. 어려운 문제를 풀었을 때 느끼는 쾌감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랑했던 수학으로부터 2년 뒤 처절한 배신을 당하지만, 평생 수학을 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은 늘 머릿속에 가득했다.



1997년이 밝았다. 수학을 좋아했지만, 수학 선생님을 담임 선생님으로 맞이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고등학교 2학년부터는 수학이 본격적으로 어려워지는데, 늘 수학 시간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 담임 선생님이셨던 수학 선생님은 칠판에 나와서 문제 풀이를 시킬 때, 젓가락을 뽑았다. 늘 교탁 위에는 학생들의 번호가 쓰여 있는 젓가락통이 놓여 있었고, 선생님이 젓가락을 만지작 거릴 때마다 오금이 저리는 전율을 느꼈다. 왜냐하면 문제풀이에 실패할 때의 응징이 상상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는 수학이 좋아서 공부했다는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단지, 두들겨 맞지 않기 위해서 공부한다는 말이 적당한 표현이었다. 


같은 해 겨울, 혼자 도서관 구석에 엎드려 펑펑 울었던 사건이 발생한다. 아버지 사고로 인하여 근로복지공단에서 약간의 등록금 지원이 나왔고, 동시에 학교에서도 특정 학생을 대상으로 등록금 면제 혜택을 주었다. 그런데 의도하지 않게 이 두 가지 혜택이 겹치면서, 내가 등록금 장사를 하는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되어 버린다. 담임 선생님은 교무실로 나를 불렀고, 나의 생각을 묻지도 않고 심하게 나를 꾸짖었다. 학교를 마치고 어둑어둑한 도서관에 홀로 앉았다. 약간의 추위가 몰려 왔지만, 어딘지 모르게 솟구쳐 오르는 억울함 때문에 추운 것도 잘 느끼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기억을 시작으로 지난 날의 내 모든 아픔이 한 순간에 쏟아져 내렸다.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 병문안을 가면서 느꼈던 미묘한 외로움의 데자뷰가 느껴졌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점점 나는 스스로 이 모든 상황을 견뎌 나가야 하는 성숙함을 키울 수 있었다. 대학교 때 옥탑방에 살면서도 주인 아줌마가 칭찬하는 자취생이 되었던 것도 이런 일을 겪으면서 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1988년 초등학교 2학년 IQ 검사 때 '68'의 성적을 받으면서 시작된 나의 바보 인생은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외로움'으로 변모되어 왔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과정 상에서 발생된 많은 사건들이 지금의 내가 대전 땅에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요즘도 새로운 배울 거리가 있으면 눈을 돌려 관심을 가지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시에 내 자아가 느꼈을 외로움에 대한 보상작용 지모른다. 나는 이런 많은 사건을 겪으면서 성장해 온 덕에 지금 평범한 삶을 누릴 수 있는데, 과연 내 아들에게도 그 평범함을 위해 우여곡절의 사건을 애써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자식이 평탄한 인생을 살게 하고 싶은 것이 평범한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훗날 아들에게 내가 겪었던 우여곡절을 이야기하며 인생의 많은 고난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지혜를 가지게 하고 싶다. 그리스의 고대 도시를 거닐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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