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이 가치는 아니다

구두를 수선하는 방법

by 현실컨설턴트

울산에서 프로젝트를 할 때였습니다. 그날은 유독 추웠고 바닷바람마저 강하게 불었습니다. 하필 그날 구두 밑창이 다 닳았습니다. 지방 도시 중에서도 조선소가 있는 시내에서 벗어난 곳이라 구두 브랜드가 입점해 있는 백화점이나 쇼핑몰이 근처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제는 대도시에서 찾아보기 힘든 조그만 구둣방이 길 옆에 보였습니다. 바쁜 김에 들어갔죠. 좁은 구둣방에는 60대 후반쯤 되어 보이시는 남자분이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 졸고 계셨습니다. 은은한 알코올 냄새로 봐서 저녁 드시면서 반주 한잔 걸치신 분위기였죠. 조심스럽게 구두를 보여 드리며 수선이 되는지 물었습니다. 표정 없이 구두를 받으십니다. 제가 얼마나 걸리겠냐고 여쭈었더니 30분 정도 걸린다 하십니다. 시간이 걸리니 저녁을 먹고 돌아와 찾기로 했습니다. 근처 식당에서 일행들과 함께 밥을 먹고 돌아갔습니다. 30분이 훨씬 지났지만 오래된 그라인더로 아직 작업이 한참입니다. 가게가 좁아 들어갈 곳도 없었기 때문에 길 가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10분 정도 더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신발을 받았습니다. 얼마냐고 여쭈었더니 만사천원이랍니다. 지갑에서 만오천원을 꺼내 드리고 거스름돈은 괜찮다고 말씀 드리며 돌아섰습니다. 솔직히 그 가격에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태연한 척 했죠. 구두를 산 매장에 맡겼으면 공짜였거나 5천원 이내의 요금이 나왔을 테니까요. 더 큰 문제는 수선 품질이었죠. 제대로 작업을 하셨다면 밑창과 구두의 연결부분이 거의 구분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받은 구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새로 붙인 밑창은 구두와 완전히 밀착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구두수선.jpg 울산 어느 구두방의 수선 결과


아니나다를까 이때 붙인 것은 2주 만에 자동으로 떨어져 나갔습니다. 결국 주말에 해당 브랜드 매장에 다시 맡겨야 했습니다. 조금 비싸진 7,000을 지불했고요. 저에게 남은 건 상한 마음과 시간 낭비였습니다. 제가 별다른 말 없이 돈을 드리고 나온 것은 벌써 쌀쌀해진 날씨에 연세 있으신 분이 그 오랜 시간 힘들게 작업하시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이해는 한 번으로 족하죠. 아마 저는 다시는 그 가게를 찾지 않을 겁이다. 그뿐 아니라 무조건 백화점이나 브랜드 매장을 찾을 겁이다. 이게 어쩌면 우리나라 골목상권 몰락의 매커니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분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이 추운 날씨에 40분 넘게 그라인드질을 하고 본드 냄새 맡으면서 일했는데 만사천원은 받아야지.’

자신의 노력에 대비해 가치를 매기신 거지요. 완전히 이상한 계산법은 아니지요. 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셈법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제 입장에서 본다면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가치라기 보다 손실에 가깝습니다. 게다가 그 기다림의 결과는 굉장히 실망스러웠습니다.





컨설턴트라는 직업이 이런 측면에서는 가장 냉혹한 영역입니다. 사람이다 보니 같이 일하는 고객 파트너에게 섭섭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혼자 나직이 읊조리는 말이 있습니다.

고객에게 내 노력을 어필한 적이 없는가?

고객에게는 전혀 무가치한 내 시간과 노력을 알아달라 하지 않았나?

내 노력을 인정해 달라고 하는 건 아마추어입니다. 내가 그 일을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고객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고객은 컨설턴트가 준 해결책이 어떤 가치를 가졌느냐가 중요할 따름입니다. 직업의 특성상 컨설턴트는 종종 고객의 요청으로 프로젝트에서 쫓겨납니다. 냉정한 프로의 세계이죠. 그때마다 울분에 차 절규합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밤을 새가며 일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안타깝지만 냉정하게는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컨설턴트도 가치를 제공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하겠지만, 고객도 준비가 필요합니다.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눈과 체계를 갖춰야 하지요.

얼마 전 재미있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가짜 이력으로 굴지의 대기업 CEO까지 올라갔고, 자신의 내연녀를 회사의 임원으로 채용하려 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였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중견기업이나 중소기업, 규모가 적은 회사일수록 임원들의 학력이 높은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오너가 학력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지요. 이렇다 보니 두 가지 문제가 따라옵니다.

첫째, 사람 뽑기가 어려워집니다. 오너는 자신의 회사를 과대 평가하는 경향이 있죠. 최소 이 정도 스펙은 되어야 한다며 배리어를 높입니다. 그 수준의 사람은 더 이름있는 회사에 가겠죠. 어쩌다 겨우 뽑아도 다른 문제가 크거나 때로는 학력을 위조한 경우도 있습니다.

둘째, 사내에 유리천장이 생깁니다. 스펙이 좋은 사람을 데리고 오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원래 회사가 가진 임금 테이블과 다른 테이블이 생기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회사는 신계과 인간계로 나뉘게 되죠. 신이 아무리 근사한 비전을 제시해도 그걸 실행하는 건 인간입니다.

이런 부작용에도 왜 스펙에만 목을 맬까요? 꽤 여러 곳의 중견기업 경영진과 얘기하다 보니 나름의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수 많은 어휘로 표현되었지만 결론은

인재를 판별할 마땅한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열정과 태도가 실력은 아니다


PI(Process Innovation) 프로젝트라 불리는 프로세스 컨설팅을 작업의 첫 걸음은 임원 인터뷰입니다. 저는 가능한 고객사의 모든 임원을 인터뷰하는 편입니다. 중견기업이나 중소기업에서 현황파악을 겸한 CEO와 임원 인터뷰를 하면 공통적으로 나오는 키워드가 있습니다.

“직원들의 열정, 개인역량, 뛰어난 영업력”

인터뷰를 할 때는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역시 열정이 없이는 안 되죠.’라고 맞장구를 치지만 인터뷰 결과를 정리하고 앞으로 고객사가 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할 때는 가차없이 말합니다.

“귀사는 구성원들의 열정과 우수한 개인역량, 영업력으로 지금까지 성장해 왔으나, 날로 치열해지는 시장경쟁과 사업확장을 뒷받침할 체계적인 지원체계는 부족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열정, 개인기, 영업력이 강점이라는 말은 돌려 생각하면 회사차원의 체계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반증입니다. 물론 그게 무조건 나쁜 건 아닙니다. 기업이 막 만들어진 스타트업이라면 직원들의 개인기에 의지해야 합니다. 멀티플레이어 능력이 절실하죠. 하지만 글로벌하게 사업을 해야 하고, 외국인 직원도 빈번히 보인다면 체계적인 시스템이 없이는 일이 돌아가지 않게 됩니다.

스포츠를 생각하면 열정과 정신력이라는 단어가 딱 떠오릅니다. 특히 2002년 이전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시그니처 단어였죠. 월드컵 본선이 다가오면 미디어는 투혼과 정신력으로 도배되곤 했죠. 며칠 후, 경기에서 지고 나면 정신력 문제라 질타했습니다. 이런 일은 4년마다 반복되었고 4년 후에도, 또 4년 후에도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변화가 생긴 건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히딩크 감독이 부임하면서부터입니다. 히딩크가 대표팀 감독이 되면서 선수들이 지옥훈련이라고 부를 만큼 혹독한 체력 강화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까지 한국팀의 강점이 체력과 정신력이라 알려져 있었는데 말이죠. 전문가들은 일제히 우려를 표했습니다. 월드컵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무슨 체력 훈련이냐는 비난과 전술 훈련에 집중해야 한다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대표팀은 평가전에서 5:0으로 참패를 당하기까지 했죠. 하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한국 대표팀은 변하기 시작했고, 결국 월드컵에서 유례없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체계적인 분석을 통해 한국 선수들의 체력이 수준 미달임이 판명되었고 히딩크와 같이 온 스태프들이 만든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 프로그램을 소화했다고 하죠. 왜 그때까지 우리나라 축구계는 모르고 있었던 걸까요?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은 다를까요? 불행하게도 히딩크가 떠나고 역사는 또 반복됩니다. 벤투 감독이 오기 전까지 말입니다. 카타르 월드컵을 앞두고 축구협회 관계자에게 조언을 요청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물었습니다. 지금은 선수들의 체력과 경기 데이터에 기반한 훈련이 이뤄지고 있냐고. 그 분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런 것은 철저히 외국 감독과 스태프에게 의지하고 있고, 그들이 떠나면 한 줄의 데이터도 남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들에겐 그것이 노하우이고 재산이니까요.


회사에서도 체계와 시스템이 없으면 구호만 남발합니다.

“가격 경쟁력 강화”, “제품 경쟁력 강화” 같은 슬로건은 글로벌 회사나 중소기업이나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글로벌 기업의 것을 얼마든지 따라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절대 복사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 구호를 전략으로 만들고 전략을 전술로 풀고, 이를 디테일한 실행계획으로 푸는 것. 궁극적으로는 이런 것들이 제대로 수행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체계와 시스템입니다.


투혼과 정신력을 강조하고, 경기에서 지면 정신력 문제라 질타하는 팀과 회사는 둘 다 미래가 없습니다. 미래는 노력, 열정, 개인기, 팀웍을 대체할 체계와 시스템을 갖추는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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