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설턴트 일을 하지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 몰랐을 일을 알게 되는 행운(긍정적으로 생각해서요)이 가끔 찾아옵니다.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우연히 반가운 물건들을 만나곤 하죠. 그 중 하나가 사일로(silo)입니다.
가축 사료, 곡물, 시멘트 등의 분말 상태의 물질을 저장해 두는 용기. 원통형이 대표적이지만 각진 형태도 있고, 하나 혹은 여러 개 내지 수십 개의 집합체로 구성되는 경우도 있다
사일로(silo)는 영어 단어로 먼저 외웠던 것 같습니다. 뭔지도 모르고 ‘저장소’ 정도로 암기했던 것 같습니다. 회사에 와서도 회의하다가 많이 사용했어요. 소통 안 된다고 하면 ‘사일로 조직’이라는 용어를 바로 들이 밀었죠. 그런데 실상 실물은 영접한 적이 없었습니다. 사료 회사 프로젝트를 하기 전까지는요. 물론 고속도로 옆에는 수많은 사일로가 수십 년 전부터 서 있었습니다. 단지 제가 인지를 못했을 뿐이지요.
사료회사에서 배운 건 사일로만이 아니었습니다. 고객사의 영어명칭을 보다가 처음에는 오타인줄 알았습니다. ‘**feed’, 동사로만 알았던 feed가 이름에 있더군요. 고객에게 잘못된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맞다고 합니다. 사료가 영어로는 ‘feed’랍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오래 일한 사람만이 내릴 수 있는 간단한 정의를 알려주시더군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은 ‘푸드(food)’, 동물이 먹는 것은 ‘피드(feed)’ “
이건 개념적인 구분이고, 실제로는 어떻게 구분되는지 물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재료의 등급이 다를 뿐이랍니다. 예를 들어, 옥수수가 원료로 사용되는 식품을 만든다면 특정 등급 이상을 쓰면 ‘푸드(food, 식품)’, 그 이하 등급을 사용하면 ‘피드(feed, 사료)’가 되는 식이죠.
이 지점에서 부모님 세대의 큰 걱정이 해결됩니다. 관련자의 증언에 따르면 보관 기간이 길어져 등급이 떨어지는 정부미는 북쪽의 동포들에게 다 가지 않는답니다. 대부분이 사료 회사의 사일로에 부어진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제 머리 속을 빙빙 맴돕니다. 최근 빅데이터에 '우리집 막내’가 주요한 키워드로 자주 나옵니다. 누굴까요? 반려견입니다. '우리집 막내’가 반려견을 지칭한 지는 꽤 되었습니다. 자동차 광고에 반려견이 안전벨트를 한 모습이 등장하기도 하고, 어떤 회사의 펫사료 이름은 ‘밥이보약’입니다. 아빠(항상 개 다음 서열이다)가 등장해 개사료를 보고 군침을 흘리는 광고도 있죠. 당연히 재료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등급을 사용합니다. 그럼 이 제품은 피드인가요? 푸드인가요? 지금까지의 실무적인 정의가 여러 곳에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정의입니다.
먹는 것과 먹이는 것
‘food’와 ‘feed’를 영어단어에 있는 첫 번째 의미로 보면 ‘먹는다‘와 ‘먹이다’로 해석됩니다. 사람이 먹고, 동물이 먹는 것이라는 구분 이전에 능동적으로 먹는 것과 수동적으로 먹이는 것의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어떤 제품이 좋고, 비싸지는지가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사람이 먹는 푸드(food, 식품)는 어떤 특징을 가질까요?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아야 합니다. 반대로 동물, 특히 식용 가축을 먹이는 피드(feed, 사료)는 적게 먹이고 빨리 살이 쪄야 합니다. 푸드(food, 식품)의 경우 먹는 행위와 먹는 의지가 둘 다 동일하게 사람이지만, 피드(feed, 사료)는 먹는 행위는 동물이 하지만 먹이는 의지는 사람의 것입니다.
행위와 의지의 주체가 분리되다 보니 행위는 의지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증량률(사료 1kg당 늘어나는 체중의 비율)이 관리되고 먹이는 양에 비해 똥을 적게 싸는 형태의 사료(일반사료보다 비쌉니다)를 먹이게 됩니다. 능동과 수동의 차이가 이렇게나 무섭습니다. 그래서, 행위와 의지의 주체가 달라지면 빈번하게 비극이 일어납니다.
사람에겐 행위와 의지의 주체가 달라지는 일이 전혀 없을까요? 많습니다. 컨설팅을 하다 보면 자주 마주치게 되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정보 시스템 구축을 전제로 한 컨설팅을 하면 경영층과 담당자 사이에 끼일 때가 있습니다. 경영층은 어떻게든 컨설턴트에게 많은 것을 받아내려 하고 담당자는 일이 늘어나니 최대한 줄이려 하니까요. 이 싸움은 너무나 뻔합니다. 돈을 집행하는 경영층이 이길 수 밖에 없는 싸움이지요. 하지만 시스템을 이해하고 활용해야 할 사람은 담당자들입니다. 소화할 시간도 주지 않고 먹이를 무지막지하게 먹인다면 반은 옆으로 흘리고, 소화불량에 걸리겠죠. 비슷한 맥락으로 컨설턴트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고객군이 두 군데입니다. 병원과 대학이죠. 의사결정과 일하는 사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병원은 의사결정을 내리는 팀장이나 부문장이 모두 의사입니다. 대학은 교수님들이죠. 두 직업군 모두 남의 말 잘 안 듣기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실행은 일반 직원들이 합니다. 행위와 의지의 주체가 극명하게 갈라져 있죠. 그렇다보니 중요한 의사결정이 잘 되지 않고, 결정이 되어도 현실과 다른 이상한 방향으로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스템을 오픈하면 난리가 나는거죠. 그래서 절대 가지 말라는 사이트가 있습니다. “대학병원 프로젝트”입니다.
삶에도 이 공식은 잔인하게 들어맞습니다.
사는 행위와 사는 의지가 모두 나에게 있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 의지를 누군가에게 넘기는 순간 비극은 찾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