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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기식 Mar 07. 2020

국제기구에 문을 두드리기 까지

1. 배 경 

나라의 경제사정이 어렵고 조기 퇴직을 하거나 직장에서 칼 바람을 맞아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직장을 떠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젊은 사람들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장을 구하기가 하늘에 별을 따는 것 같고 직장을 구한다고 하더라고 과연 나의 적성에 맡고 나의 미래를 맡길 수가 있는냐 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많이 있다. 이러한 기회에 국제기구에 도전하여 국가와 자기 자신을 위하여 무언가 혼신의 힘을 다 할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 정말 중요할 것이다. 저자인 나 자신도 20년간 정부재투자기관에서 근무하다가 몇번의 시도 끝에 국제기구에 거의 20년간 근무하였다.


1988년 공기업에서 한창 근무중 환경을 바꾸고, 다른 세상을 만들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에서 한국과학원에 입학시험을 치고 30세가 넘은 나이에 젊은 영재들과 공부를 시작하였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어렵고 힘들었지만 석사과정을 거치고 박사과정을 1994년에 박사학위 논문 최종발표를 하고 1995년 늦깍기로 한국과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회사로 복귀하여 근무하였다. 한국과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직장에서 근무하는중 계속된 비슷한 일의 반복과 생활에 무언과 다른 탈출구를 찾고 있었다. 


어떤 분야에 나를 몰입하게 할 것인지? 하고 생각하고 있던 중 한국원자력 산업회의에서 발간하는 원자력산업지에서 국제원자력기구에서 직원을 충원한다는 광고를 보고, 나는 원자력공학을 전공하였으니 원자력에 관한 국제기구인 국제원자력기구(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IAEA)에 한번 근무하여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가지게 되었다.


마음속에 국제기구에 대한 막대한 동경을 가진채, 1999년 독일 지멘스와 근무하고 있는 회사와 합작으로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하여 독일에 4개월 정도 있을 기회가 있었다. 지멘스의 본사가 독일 뉴렌베르그 주위의 작은 도시인 엘랑겐이라는 도시에 본사가 있어 엘랑겐 거주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해외 근무를 하게 되어 약간 어리둥절 하였지만, 최신 디지털 계측제어 시스템을 개발하는 팀에 합류하여 원자력발전소에 디지털 계측제어 시스팀을 어떻게 적용을 할까 하는 방법을 배우고 원자력발전소에 어떻게 적용을 할 것인지 하는 것에 대하여 공부하게 되었다. 


독일에서 근무하면서 느낀 점은, 왜 독일이 강해질 수밖에 없는가를 배우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러시아워이라고 하면 8시에서 9시 사이인데 독일, 엘랑겐에서는 6:30분에서 07:00 사이이었다.  독일 지멘스 근로자는 보통 7시30분에 일을 시작함으로 새벽이 러시아워가 되고, 오후 4시가 넘으면 매니저 그룹만 남고 거의 다 퇴근을 한다.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일에만 집중하고, 동료간에 잡담을 하거나, 신문 기사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거의 없다. 또한 근무중 개인적인 전화를 거는 사람이 거의 없이 일에 집중하는 것을 보면 이런 점은 배우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일에 대한 집중력과 기술적 우수성, 그리고 각자 일을 하는 것을 보면 개인의 의사가 아닌 회사의 절차서에 기준을 두고, 서두르지 않고 체계적으로 일하는 것이 독일의 제조업이 세계를 석권하고, 물건에 대한 가격이 가장 비싼데도 불구하고 왜 독일 의료기기의 제품이 가장 인기 있는 제품이 되었는지, 같이 근무하여 보면 알수 있다. 또한 대형 프랜트의 설계에서 제작, 건설을 거쳐 시운전에 이르는 전 과정을 보면 독일의 제품의 우수성이 책상에서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각 전문가의 손끝의 집중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쉽게 인식할 수 있다. 물론 독일도 산별 노조가 강하고 노조활동도 강하지만, 품질이나 작업에 대한 집중도하고는 별개의 문제인 것 같다. 독일의 파업에 의한 노동의 손실시간을 유럽국가들 가운데 파업에 의한 손실시간은 영국,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보다 최소 6배에서 최대 35배 작은 것으로 나타났다. 


독일에 있으면서 국제원자력기구(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IAEA)에 두번 방문하였다. 두번 다 개인적인 휴가를 내고 차량을 임대하여 650Km가 넘는 길을 혼자서 운전을 하여 국제원자력기구가 무엇하는 곳인지를 위해 방문하였다. 지금이야 차에 네비게이션을 사용하거나 아니면 Google Map의 네비게이트를 이용하여 쉽게 비엔나에 있는 국제원자력기구를 방문할 것이다. 그러나 1999년 당시는 인터넷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A 4 용지 크기의 지도 한장만을 가지고 독일 엘랑겐서 비엔나를 방문하게 되었다. 


독일에서 M1 도로를 따라 파사우를 거쳐 오스트리아 국경을 통과하여 짤즈브르그를 지나 드디어 비엔나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비엔나의 어디에 국제원자력기구가 있는지? 말도안되고 처음 방문한 도시를 다시 지도 한장만으로 찾는다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비엔나 시내를 돌아 돌아 드디어 국제원자력기구에 도착하였다. 차량을 어디에 주차할 것인지 모르고 있다가 지금 생각하니 카니져뮬러 지하철 공용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국제원자력기구의 방문자 센타로 들어갔다.  

그림 1 비엔나에 본부를 둔 유엔 국제기구 전경


먼저 출입을 위해선, 초청을 받거나, 아니면 국제원자력기구의 직원이 직접 방문자 센타에 내려와서 방문자를  데리고 방문자 확인을 받은후 출입을 할수 있었다. 이를 위해 국제기구에 근무하는 평소에 알고 지내던 국제기구에 근무하는 한국사람을 찾아 출입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기 위하여 출입담당자에게 한국사람의 이름을 주니, 경비원이 전화를 걸어 주었다. 확인하고자 서로 유선상으로 이야기하여 보니 전화를 받는 사람의 발음이 아무리 해도 이상하고 억양이 이북 사람 같아 다시 확인을 하니 북한에 파견된 직원이라고 한다. 


너무 놀라서 다시 확인하니 마지막 성과 이름의 첫자가 같으니, 출입경비원이 이 분을 찾아서 바꾸어 준 것 같다. 출입을 하여 그 당시 원자력 안전국장인 아니카니노라는 불란서 출신 여자분을 잠시 만나뵙고 서로 이야기하고, 간단하게 이력을 설명하고 분위기를 파악하였다. 그리고 같은 부서에 근무하고 있는 몇 직원들을 국제기구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보고 다시 650Km을 차를 운전하여 비엔나에서 독일 엘랑겐으로 귀가하였다. 


하루에 650Km을 운전하여 가서 하루 자고, 다음날 오후에650Km를 운전하여 돌아 갈려고 하니 얼마나 피곤한지, 가는 중간 중간에 약간의 휴식을 취하였지만 노래를 부르면서, 잠을 쫓으면서 운전을 하고 있는데 운전 중에 비는 왜이렇게 오는지 작은 차를 빌려 가서 사고 나면 정말 큰일 나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렵게 운전을 하여 겨우 엘랑겐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하여 처음으로 국제기구와 만나게 되었다.


일단 국제기구에 대한 관심이 점차 점차 커지고, 한국으로 귀국하기전에 다시 한번 국제기구을 방문하여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한번 국제원자력기구의 원자력안전국장과 면담을 신청하고 다시 비엔나로 오게 되었다. 전번에 얼마나 고생이 되었는지, 차로 운전하지 않고, 밤 기차를 이용하였다. 국제기구 원자력안전 담당국장은 출장으로 자리에 없고, 담당 과장과 직원을 만나고 잠시 비엔나 시대를 돌아보고 기차로 돌아왔다. 두번의 방문을 통하여 국제기구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대충 이해하기 되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머나먼 꿈이라는 생각이외에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느덧 독일에서 근무하던 4개월이 지나가고 한국으로 귀국하여 근무하던 회사로 복귀하여 근무중 도무지 이렇게 직장 생활이 하는 것이 과연 나의 장래에 도움이 되는데 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게 되었다. 이렇게 고민이 많던 시기에 국제원자력기구에서 채용공고를 보게되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개인이 웹사이트를 통해서 지원하는 것이 아니고, 국제기구에서 과학기술부로 공문이 오면, 관련회사로 배포되고 이를 근거로 회사에서 추천을 받아 과학기술부를 통하여 국제원자력기구에 응모하는 과정이 지극이 복잡하고 어렵게 되어있었다. 응모자체가 복잡하고 어렵게 되어 있었다. 


일단 공고를 보고 나의 경력을 어떠한 방법으로 기술하여야만 공고에 나온 사항을 만족할까? 어떻게 지원서를 작성할까 고민을 하기 시작하였다. 일단 공고에 자기소개서(Personal History Form)은 PDF 파일로 되어 있어MS word를 이용하여 개인의 경력 및 이력사항을 적어 넣을 수가 없다. 따라서 PDF 파일을 일단 MS word를 이용하여 PDF를 개발하여, 기술된 경력 및 이력이 국제원자력기구에서 원하는 방향, 공고에서 요구하는 있는 사항을 중점적으로 부각하도록 작성하였다. 지금은 MS word file 형태의 이력서 양식을 제공하고 온라인으로 개인의 자료를 기록하여 등록하도록 되어있다. 


일단 작성하고 난후 한참 동안 보내지 않았다. 마감까지는 충분한 시간이 있음으로 마감 2 주전에 발송하였다. 그 이유는 미리 보내면 서류가 맨 밑에 있어, 검토자가 검토하는데 지쳐서 남은 것은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고 그냥 한꺼번에 부적격자로 분류할까봐 서류가 도착하는 시간을 고려하여 2 주간 시간을 차이를 두고 국제원자력기구에 1999년 10월 3번째주 월요일 송부하였다. 그리고 아무런 소식 없이 6개월 이상을 기다렸다. 

 2000년 4월의 어느날, 비엔나 한국 대사관이라고 하면서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당시 주 오스트리아 대사관 과학관이신 조 과학관께서 지난번에 응모한 자리에 우선 순위 1번으로 추천되었는데 몇일만 기다리면 마지막 결정이 될 것 같다는 전화를 받았다. 얼마나 가슴이 뛰는 소식인지 지금 생각하여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반 세근반이 된다. 몇일을 기도하면서 기다리던중 당신이 선택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선택되었다” 라는 소식을 얼마나 기다린 소식인지, 이 한마디를 듣기가 이렇게 어려웠는지…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독일에서 두번이나 국제원자력기구를 방문한 일, 방문하여 두 시간 정도 국제원자력기구 건물에서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던 일,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여 마음은 비엔나에 두고 되돌아온 일등 여러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영화처럼 상영되고 있었다.




그림 2. 임용을 알리는 서류가 둔 국제원자력기구에서 보낸 봉투 및 임용편지

이제 2000년 8월 이후 국제기구에 근무를 시작하여 2019년 9월 정년퇴직까지 거의 20년을 근무하였고, 직급도 진급을 하여 직원으로 최고 단계인 P-5(Professional -5) 로 진급도 하였다. 직원을 채용하기 위하여 인사위원회의 위원이 되어 보기도 하고, 직접 응모자를 면접, 서류 검토등 많은 일을 수행하였다. 나 혼자만의 경험으로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경험을 일목 요연하게 정리하여 각 단계별 절차, 응모 요령, 이력서 작성, 면접 요령 등을 한국에 있는 중견 경력자들에 알려주어 국제기구에 응모하여, 임용되기 위해서는 어떤 점이 중요한지, 어떻게 진행되는지, 절차가 무엇인지를 하는 과정을 자세히 알려주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하여 본다.   


모든 것이 그냥 말처럼 쉽게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무언을 먼저 준비하여야 하는지? 원서는 어디서 받는지? 국제기구에 응모하는 경우 대한민국 정부를 통하여 응모를 하여야 하는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었다.  이제는 한가지 한가지를 말할 수 있는 입장이지만 1995년 초 국제기구를 처음에 생각을 하면 정말 막막하였다.  이책은 국제기구에 지원하는 직장인들과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의 길잡이가 되기를 원한다.

 마지막으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최근 한국의 UN 예산 분담금 지불 순위는 11위이다. 상당히 높은 분담금 지급 순위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UN 본부나 각 산하 국제 기구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의 숫자는 부족하다는 것을 분명하다. 부족한 만큼 국내외에서 전문분야의 공부를 통해서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한국인 글로벌 인재의 지원을 유엔본부 및 유엔 산하 국제기구에서는 간절히 고대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이 간략한 정보가 UN 본부나 UN 관련 국제 기구에서 일하고자 하는 글로벌 한국인 여러분들에게 미력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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