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매거진, 웹썰-단편
1
나는 갑이다.
이 세계는 갑과 을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과 사람이 있을 때는 항상 관계가 생겨난다.
그 관계는 결코 동등하지 않다.
한 쪽이 주도권을 쥐고 다른 한 쪽은 그쪽을 따라가게 된다.
계약에서는 주도권을 쥔 쪽을 갑으로, 종속된 자를 을로 표현한다.
당연히 나는 갑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갑의 대열에서 탈락한 적이 없다.
학교, 직업, 연애, 무엇 하나 주도권을 쥐어보지 못한 적이 없고, 언제나 시작도 결말도 나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이루어냈고 하기 싫은 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한 적이 없다.
적은 파멸시키고 친구는 반드시 성공시켰으며 사랑도 복수도 언제나 내 뜻대로였다.
실력, 배경, 재산 같은 천박한 단어로 나를 수식하고 싶지는 않다.
유럽에서는 나 같은 사람을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일컫는다.
나는 굳이 그렇게 말하기보다 자유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서도 자유로운 자유인.
어쨌든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는 누구보다 자유롭다.
아니, 자유로웠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혹은 최고급 청담동 레스토랑에서 그녀가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기 전까지는.
“산갈치를 찾아와.”
마치 장미꽃 백 송이에 둘러싸인 소녀처럼 화사하게, 그녀는 가볍게 자리에 앉으며 참혹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왔다.
그게 너무 눈부셔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장미’다.
외모, 태도, 동작, 기품, 행동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남자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여자 그 이상을 치닫는다. 맵고, 짜고, 달고, 쓰고, 변덕과 엉뚱함이 항상 교차해 잠시도 남자가 끊임없이 시험하고 태만하게 늘어져 있지 못하게 긴장시키는 진짜 ‘장미’다.
가끔 가시를 내밀 때는 찌릿하고, 따끔하고, 흥분되기까지 한다.
그게 마음에 들어 청혼할 준비까지 하고 왔지만 이 상황은 지나치게 여자답다.
“산갈치라니, 대체 그게 뭐야? 물고기야?”
난생 처음 듣는 이름이다. 산갈치라니 산에 사는 갈치라도 되나.
“그건 지금부터 찾아보도록 해.”
“왜 찾아와야 되지?”
“왜냐면 그걸 찾아오면 결혼해줄 테니까.”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녀가 변덕스럽고, 예측불허인데다, 자주 전혀 엉뚱한 짓을 저지르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일생일대의 결혼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을, 고작 물건 하나 찾아오는 것에 건다?
말도 안 된다.
나는 황급히 무선 인터넷으로 검색을 시도했다.
다행히 요새는 넷 상에 무수한 지식과 백과사전이 널려 있다.
간단한 검색으로 나온 정보를 보며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설마 산갈치라는 게, 동해 깊은 바다에 산다는 물고기 말이야? 길이는 5미터에 육박하고 둘레는 60센티가 넘는다는 거대 생선?”
“잘 아네. 물고기 맞아. 하지만 하나도 모르는구나.”
“무슨 말이야, 대체 그게?”
갈수록 가관이다.
들을수록 기가 찬다.
물고기라고?
고작 물고기 한 마리에 인생을 거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다면 상관없다.
어부나 전문 해양학자라도 그 물고기를 나보다 빨리, 확실히, 멋지게 잡아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이 세상에 돈으로 부리지 못할 자도 없고 돈으로 되지 않을 일도 없다.
나는 갑이다. 하고자 하는 일은 절대로 이뤄진다.
단지 장미가 바라는 '산갈치'라는 게 뭔지는 아직 모르겠다.
“대체 어떤 건데?”
장미는 웃으며 답했다. 참으로 찬란하고 아득하다. 저 웃음은 내 것이다. 내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
“이렇게.”
그 순간 세상이 변했다.
장미의 손에서 와인병이 화이트 와인을 잔에 쏟아냈다. 와인의 강물이 잔을 넘어 테이블을, 그러더니 주위 사방을 뒤덮었다. 어느새 온 세상이 새하얀 와인의 바다로 뒤덮여 있었다. 순백의 투명한 바다가 수평선 끝에서 끝까지 일렁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시원의 바다.
그곳에 물고기 한 마리가 튀어 올랐다.
은백색으로 빛나는 커다란 물고기.
마치 갈치를 닮았지만 갈치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활기차며 눈부시다.
한 마리가 아니다. 두 마리, 세 마리, 수십, 수백, 수천 마리의 물고기가 유백색의 바다 위로 튀어 오른다. 온 바다가 은백으로 뒤덮이고 있다. 한 순간 하늘 위로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은백의 강이 바다와 하늘을 잇는다.
은백색 물고기들이 만들어낸 빛의 길이다.
눈을 깜박였을 때 세상은 본래대로 되돌아왔다.
눈앞에는 와인을 붓고 있는 장미만이 있을 뿐이었다.
“한 달이야. 그 안에 찾아와.”
장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내가 ‘을’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2
산갈치.
내가 찾아야 할 것, 그리고 장미의 운명을 결정할 물고기다.
그 놈만 있으면 나는 다시 갑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장미를 을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찾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일반적인 산갈치를 잡는 것은 간단했다.
알고 보면 산갈치는 동해 깊은 바다에 사는 물고기라고 한다.
갈치를 닮았는데 길이는 5미터에 육박하고 둘레는 1미터에 육박하며 무게는 100킬로그램에 달하는 무거운 어류다.
어부들도 아주 가끔 보고 해안가에 나타나는 토픽이 실릴 정도지만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
1억을 선금으로 지불하자 선장은 며칠 되지도 않아 산갈치 한 마리를 잡아왔다.
“이게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장미가 보여준 물고기가 아니다.
분명히 은백색에 거대한 갈치를 닮은 물고기다.
하지만 모양은 비슷하되 내가 본 그 물고기들이 아니었다.
온 세상을 빛으로 뒤덮어 마침내 하늘과 그 아래 바다를 잇던 은백의 산갈치들이 아니었다.
장미의 산갈치가 아니었다.
그때 장미가 어떻게 그런 광경을 보여줄 수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단지 그게 돈으로, 능력으로, 인맥으로 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내게 불가능한 것을 보게 된 순간, 내가 불가능한 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을이 되었다.
갑이 된 것은 장미다.
다시 갑이 되기 위해, 장미를 을로 만들기 위해 내게는 반드시 산갈치가 필요하다.
그때 본 그 산갈치가 있어야만 한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선장은 비웃으며 돌아갔다.
선금만으로도 그에게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선장을 비웃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당신은 을에 불과한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포기하는 순간, 도달할 수 없다고 물러서는 순간, 당신은 을이 된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자, 끝까지 추구하는 자, 그리고 마침내 이루는 자만이 갑이 될 수 있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단 하나뿐인 진리다.
하지만 어떻게 그 산갈치를 찾을 수 있을까.
유전공학이나 기계로 만들어볼까?
전세계에 공고를 내서 산갈치를 수집할까?
약을 써서 환각이라도 일으킬까?
한 달 동안 모든 것을 해보았다.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이 세상은 자본주의로 이루어져 있고 돈은 무엇이든 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한 달은 너무 짧았고 이루어진 것들은 하나같이 가짜였다.
내가 보았던 그 산갈치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침대에 주저앉아 버렸을 때, 창 밖으로 밤하늘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났다.
“바로 저거다!”
한 달의 마지막 날, 나는 마침내 길을 찾았다.
수없는 별빛의 밤하늘에서.
3
이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
“산갈치는 찾았어?”
만나자마자 장미가 내게 물은 첫 마디였다.
나는 한 달 만에 처음으로 웃었다.
“물론, 따라만 와.”
갑은 설명하지 않는다.
갑은 변명하지도 않는다.
오직 행동으로 보이고 납득시킬 뿐이다.
나는 장미를 이끌고 공항에서 개인 전용기를 탄 후 목적지를 향해 떠났다.
장미는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훌륭한 갑의 자세다.
하지만 곧 장미는 다시 을이 될 것이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카자흐스탄의 바이코누르 우주센터.
카자흐스탄 땅이지만 러시아가 임차해 로켓 발사기지로 쓰고 있는 장소다.
우리를 위해 유인우주선 소유즈가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는 수백억을 주고도 6개월 이상 훈련을 받고 꽤 많은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나는 그 모든 절차와 문제를 돈으로 해결했다.
본래 비용의 3배를 지불했다는 뜻이다.
불편한 우주복을 입고, 우주선에 나란히 누운 채 나는 장미를 보았다.
“기다려, 산갈치를 보여줄게.”
장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로켓이 불을 뿜었다.
거대한 중력이 내 온몸을 짓눌렀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그 고통에 뼈가 다 부러질 것 같았다.
저 앞에선 우주비행사가 나를 비웃는 듯 했다.
선장과 똑같다.
나는 견뎌냈다.
나는 갑이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자다.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는 대기권을 뚫고 우주에 와 있었다.
모든 중력이 사라지고 자유롭게 허공을 떠도는 무중력의 공간.
창 밖으로 수없이 많은 별들이 유영하고 있었다.
지구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빛의 파노라마가 눈을 적셨다.
먼지와 대기, 아무런 광공해 없는 아득한 어둠과 빛의 향연.
문득 장미가 외쳤다.
“저걸 봐!”
우주복의 스피커로 들려오는 장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밝고 활기찼다. 나는 장미를 따라 거대한 창 밖의 광경을 보았다.
그곳에 산갈치가 있었다.
수없이 많은 유성들이 푸른 지구를 향해 떨어지며 빛났다.
수십, 수백, 수천의 유성들이 산갈치처럼 저 아래 바다와 이곳 검은 하늘을 잇고 있었다.
은백의 길이 빛 속에 생겨난다. 장미가 아득히 나를 보았다.
“고마워.”
그때 나는 저것이 장미의 산갈치가 아님을 직감했다.
그러나 분명히 저것은 산갈치다.
바로 나의 산갈치.
나는 웃었다.
“내가 고마워.”
영원히 장미는 나의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장미에게 갑이 되지 못할 것이다.
장미의 산갈치를 찾아주지 못했고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몰랐다.
내 방법은 틀렸다.
그러나 내가 찾은 것은 틀리지 않았다.
창 밖, 아득한 검은 우주와 푸른 지구, 그리고 둘을 잇는 수없이 많은 유성우를 보았다.
허공에 두둥실 뜬 채 아득했다.
처음으로 나는 갑도, 을도 아닌 채로 자유로워졌다.
수십, 수백, 수천의 산갈치와 함께.
3줄 요약
‘나’는 갑이다.
어느 날, 나는 애인 장미에게 ‘산갈치’를 찾아와야 결혼해주겠다는 제안을 듣는다. 마침내 나는 ‘산갈치’를 찾아오지만 장미에게는 거절당한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자유롭다. 이미 ‘나의 산갈치’를 찾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