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못하는 일을 꼽으라고 한다면 거의 모든 것이다 걸음마를 하기도 전부터 ‘페이톤’은 검을 쥐고 숨을 쉬며 잠을 잤고 밥을 먹었다. 전장을 누비며 적군을 돌파했고 무수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일 개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아무리 이겨도 제국은 여전히 혼미했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있었으며 죽음은 도처에 자리했다. 권태와 절망에 빠져 방랑하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홉 공주의 패트런, 주교 파르마를 만나게 된 것은 그 즈음의 일이다. 파르마는 성직자인 주제에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와 쾌락을 누리며 권세를 다투면서도 오히려 민중에게 인기를 끄는 이상한 자였다. 아마도 인간을 습격하는 ‘악마’와 유일하게 맞서는 고위 성직자였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파르마는 페이톤에게 수도로 갈 것을 권했다. 혼탁한 세상일수록 오히려 중심에 답이 있다고 한 것이다. 믿은 것은 아니나 따로 갈 길도 없었다.